132. 소주 백룡문 (2)
언덕 위 정자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잔디는 모두 누웠고, 구름은 빠르게 언덕 옆을 스치고 너른 호수를 향해 몰려갔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고, 찻잔의 주인은 차를 마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언덕배기 아래에서 올라오는 지팡이 짚은 노인과 시비를 바라보고 간단하게 묵례를 하였다.
노인은 앉아있는 중년인의 옆으로 말없이 다가오더니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을 둘러보았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넓은 태호의 끝자락이 정자의 아래 언덕에 갈려 있었다. 장관이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있던 중년의 마른 사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소주 제일의 경치지. 이곳에서 호수를 보면 저 멀리 비구름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도달하는 지가 그대로 다 보인다네. 여름에는 어선들이, 겨울에는 백학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녀. 선경(仙境)이 따로 없네.”
“이 경치를 누리려고 북경을 떠났던가. 백룡문주?”
당태세의 냉소에 가까운 화답에 백룡문주는 잠시 입을 닫았다가 덤덤하게 대답하였다.
“천하의 귀한 무공을 얻어 장문이 되고, 목숨을 건져 남으로 내려와 부귀를 얻고, 때를 잘 만나 명성을 얻었으니 부족한 것이 없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가 비굴함으로 얻은 것임을 잘 알고 있네.”
“양심이 남아 있던가.”
“그것 하나만은 늘 남아서 나를 십칠 년 동안 괴롭혔어. 하지만 내가 가진 걸 부술 용기는 없었기에 오늘 같은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
당태세의 새파랗게 이글대는 눈동자가 의자에 한가롭게 앉아있는 왕양성을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래, 오늘이 그 날이다. 백룡문주. 각오는 되어 있느냐?”
“한소군은 죽었겠지?”
“그래.”
백룡문주 왕양성의 입에서 가없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누굴 탓하리. 모든 것이 내가 자초한 것이야. 당문주.”
“자네 탓이 맞아.”
짧은 한숨이 백룡문주 왕양성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사내는 굳이 자신의 과오를 반박하거나 당태세의 말에 토를 달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과 어조로 물끄러미 사람 너머를 보듯 당태세를 지켜보았다.
“북경의 천호에게 자네가 행하고 다닌 이야기를 들었지. 난 그에게 자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알고 있네.”
“나는 자네가 살아서 우리를 찾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은 예견하고 있었어. 제대로 된 인생말년은 못 볼 것 같았지.”
“왜 그랬나, 왕양성?”
당태세가 앉아있던 사내를 보며 진지하게 되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왜 황제를 배신한 것인가? 자네는 끝까지 죽음으로 나와 함께 할 것이라 믿었는데.”
왕양성은 대답대신 멀리 눈 앞에 펼쳐져 은색의 소광(昭光)을 뿌리고 있는 태호를 바라보았다. 청수한 사내의 얼굴에는 얼핏 봐서는 보이지 않는 잔주름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연륜이 느껴지는 사내의 눈매는 호수를 바라보며 옛 풍경을 그리고 있는 듯 보였다.
“황성을 둘러쌌던 수많은 기치창검과 이자성의 군사들. 결국 그들은 농민이자 명의 백성이었을 것인데…갑자기 적도가 되어 내 앞에 나서는 순간. 나는 갑자기 세상사 모든 일이 두려워졌네.”
“두려워?”
“결국 내가 쌓은 모든 것과 명(明)이 쌓은 모든 것은 자멸이로구나. 만주족이 아닌 한인들끼리 싸워 죽는구나 싶은 생각이 드니 가슴이 먹먹했어. 게다가 내 옆에는 어린 자식을 안고 눈물로 지새는 부인이 있었고.”
“한소군이 아니라 자네, 왕양성의 결단이었나? 황제를 배신하고 이자성에게 붙기로 한 것이?”
왕양성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 끝이라고 생각했어. 이상하지. 끝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비굴하게라도 살아남고 싶더군. 그래서 그런 일을 벌인거야. 그 때도 알고 있었어. 지금 살아 생을 도모하면 결국 후회만 남을 것이라는 것을.”
“애 때문인가?”
“……아니야. 내가 살고 싶었어.”
당태세는 물끄러미 태호를 바라보는 왕양성을 바라보았다.
한 때, 고결하기로는 북경 제일이었던 사내. 그리고 오직 협의지심이 발동할 때만 검을 뽑던 사내의 마지막은 텅빈 저택에서 모든 것을 떠나보낸 껍데기일 뿐이었다.
당태세는 이를 드러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목괴를 짚고 있던 노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누구는 명조(明朝)가 좋았는 줄 아느냐?”
당태세는 생선가시를 씹듯 이를 드러내고 이제 사라지고 없는 왕조의 추억을 잘근잘근 씹어대었다.
“세금은 무한정 치솟고, 농민들은 굶어 죽으며 관리들은 열에 아홉은 탐리였고 제대로 창을 쓸 줄 하는 병사도 없는 나라였지. 이자성이든 만주족이든…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왜 그리 예전의 왕조에 집착했나.”
“왕조에 집착한 게 아니야. 우리가 살아온 마지막이 존귀하기를 바랐어!”
“존귀…….”
“내가 뵈었던 마지막 황제는 존경할 만한 분이었지. 나라가 무너지는 장엄한 낙조를 함께 할 수 있었던 분이었다. 그건 백룡문주 자네도 공감하지 않는가?”
왕양성이 당태세의 말에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 기억될 만한 사람들로 남고 싶었나?”
“협객으로 살아온 세월과 마지막 황제 앞에 충실한 삶이 되기를 바랐다.”
왕양성은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당태세는 그런 왕양성을 보며 조용히, 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그의 옛 전우를 꾸짖었다.
“하지만 그 세월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고 살아있는 자네들은 모든 걸 망쳤더군.”
“자네 눈매는 변한 것이 없구먼. 당태세.”
“자네는 많이 바뀌었네. 왕양성.”
“미안하네.”
왕양성의 말은 예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듯 당태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말에는 오히려 가식이 없었다.
언제부터 왕양성은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준비하고 있었을지 당태세는 알 수 없었다.
종리세리에게 말을 전해들은 다음부터였을까, 아니면 비무초친에서 복수의 향내를 맡은 다음부터였을까. 이도저도 아니면 십칠년 전 바로 당태세가 죽던 날부터 준비해 왔던 말이었을까.
모진 말을 내뱉어야 할까. 아니면 나도 이 자에게 준비한 말을 들려줘야 할까.
노인은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입을 벌리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네 아들은 살아남아 여인과 함께 북으로 떠나갔네.”
“고맙네.”
“백룡문은 멸문이지만 자네 핏줄은 남겠지.”
“고마워. 정말 고마우이.”
“그러니 자네는 목숨으로 참회하게.”
당태세의 말이 떨어지자 왕양성은 천천히 일어서며 자신의 검을 잡았다. 깡마른 사내의 표정에는 실날같은 미소가 흐르고 있었는데 이미 세사의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도인 같은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 서 있던 시비가 조르르 달려오며 왕양성의 소매를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문주님! 아니되세요! 싸우지 마셔요!”
“놓거라. 얘야.”
“문주님! 문주님이 잘못 되시면 저는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야하나요!”
어느덧 시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뺨을 타고 주르르 떨어지는데, 그 처연한 모습은 주종의 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태세가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왕양성은 당태세를 보며 쓰디쓴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소군과 거리를 둔 지는 이미 십년이 넘었다네. 서로 명분만 부부였지. 서로를 부드럽게 불러 본 기억이 이제는 가물가물하구먼.”
당태세는 그런 왕양성을 찌푸린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인생 추잡한 꼴은 백룡문에서 다 보게 되는구나.”
당태세의 표정을 보고 있던 왕양성이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멀리 내려다보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눈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았던 풍경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오래 살면…좋은 것으로 인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욕망으로 모자란 것을 메꾸게 되는 모양이네.”
“안다는 인간이 그렇게 살고 있단 말인가?”
당태세의 말에 왕양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알아챈 지 오래되었지. 이젠 끝내야지 끝내야지 하면서 지지부진 이어온 게 내 인생이야.”
왕양성은 검을 들어 검집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시비는 계속 옆에서 울음을 멈추지 않는데 그를 보던 왕양성은 그를 달래듯 타이르며 중얼거렸다.
“울지 마라 얘야, 나는 지금 네가 아니라 내 부인에게 칼로 화답한 저 노인에게 용무가 있느니라. 아무리 정 없이 부부의 이름으로 산 지 십년이 가까이 되어 간다지만 그래도 그 이는 내 아내가 아니었느냐.”
“문주님!”
“너는 이 길로 소주를 떠나 멀리 가거라. 이곳의 풍광과 사람들을 잊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이들을 만나라. 네 눈에 지금까지 비친 모든 것은 꿈이며 환상이고 거품이고 그림자니.”
이어 왕양성의 손이 검을 휘두르자 검신이 울리며 기묘한 울음을 토해내었다.
그를 보고 있던 당태세는 목괴에서 칼을 뽑았다. 당태세의 소도와 왕양성의 검이 서로를 보며 바람 속에서 번쩍이는 빛살을 뿌리니, 바람에 쓰러진 잔디들은 두 사람의 서슬에 다시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순천문주 당태세. 죽은 한소군 도려진의 혈채를 내가 갚겠소이다. 공격을 받으시오.”
“자네의 절기는 철선 아닌가. 부채를 들게.”
왕양성은 당태세의 말에 서글픈 웃음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십칠년 전 북경을 떠나며 부채는 황도에 남겨두고 왔소이다. 이젠 검이 내가 쓸 무공의 전부요.”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룡문주 왕양성. 그대의 검을 받아들이지. 덤비시게.”
“아들을 살려주어 고맙소.”
“말이 많네.”
백룡문주의 검이 가슴 앞으로 모이며 중지가 하늘을 가리키더니 곧장 당태세의 목을 노리고 바람을 가르며 다가왔다.
백룡문의 검은 살아있는 용처럼 움직이며 변화하였다. 천하를 뒤덮고 풍운을 불러오며 산을 쪼개고 바람을 뒤엎는 기세로 밀려오는 검식은 당태세의 앞에서 한번 변하고 다시 여섯 번 변하였다.
용은 구름에 숨어 조화를 부리며 천하를 조망하니, 이것이야 말로 백룡(白龍)이 천하를 소요(逍遙)하는 방법일진대 오직 백룡문은 그 기세를 검 끝 하나에 담아 천하에 자신의 무명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때, 황제를 보위하였고, 같은 협객들의 의지가 되었고, 힘없는 백성의 한 줄기 빛이었던 검광이 한때의 전우를 향해 뻗어왔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검광의 현란함 가운데로 당태세의 소도가 곧장 밀치고 들어가며 자신의 발을 땅에서 떼었다.
당태세의 소도는 백룡의 이빨과 발톱을 지나 여의주를 스치듯 타고 올라가 흰 용의 가슴을 열고 그대로 날을 밀어넣은 뒤 다시 노인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노인을 스쳐간 하얀 용은 자신의 발톱을 사방에 휘날리며 번쩍이는 태호의 절경을 바라보다 그 몸짓을 멈추었다.
백룡문의 절기 백룡소요보가 멈추었을 때, 백룡문주 왕양성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구었다.
당태세 역시 자신의 세도를 목괴 안에 집어넣고 불어오는 바람에 등을 내맡기고 있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백룡문주 왕양성은 자신의 검을 출수할 때, 방어를 일절 하지 않았다.
“고작 이리 살려고…….”
당태세는 이를 지그시 깨물더니 난폭하게 몸을 돌려 쓰러진 왕양성의 품에 있던 증서를 꺼내었다.
이미 왕양성의 숨은 끊어진 지 오래였다. 아직 반쯤 벌어져 있는 백룡문주의 눈을 당태세가 감길 때, 지금까지 말없이 서 있던 시비가 무너지듯 쓰러지며 왕양성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고작 이리 살겠다고…….”
당태세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찬 바람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잔물결이 반짝이는 태호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는 이곳을 떠날 때가 된 것이었다. 여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산새소리를 대신하여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흘렀다. 무척이나 밝고 맑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