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31화 (131/226)

131. 소주 백룡문 (1)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소슬한 바람이 성루와 성벽을 따라 운하와 길로 내몰릴 때, 장포를 입은 노인은 긴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끼고 천천히 커다란 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때는 화려하기 그지없었을 법한 장려한 하얀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드나드는 이는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넓은 처마 아래에는 현액이 걸려 있던 자리가 보이는데, 누군가 집의 현판을 떼어 간 빈 자리만이 남아 가뜩이나 출입없는 커다란 집의 외형을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넓은 대문 앞에는 누군가 뿌렸는지 모를 음식물과 더러운 것들이 가득 묻어 있었고, 한때 흰색으로 깨끗하게 발라졌을 벽조차 흙과 쓰레기 천지로 변하여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노인은 한동안 대문 앞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은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가 휘어진 작은 길을 따라갔다.

연못물 사이에서 고기들이 움직이며 오랜만에 사람을 본다는 듯 노인의 그림자를 좇았고, 사람없는 정원의 다리를 건너가 정자에 다다르자 여기저기 뽑히고 흩어진 풀과 꽃잎이 떨어져 있는 마당이 드러났다.

쓰러진 좌돈과 의자들이 별채 앞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여기저기 떨어진 접시와 음식 찌꺼기들이 굴러다녔지만 누구 하나 나와서 정리하는 이들이 없었다.

마치 녹림도가 습격하여 집안을 모두 쓸어가 버린 뒤의 모습 같았다. 넓은 정원 어디에서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노인은 문득 주변을 돌아보다가 곧장 나 있는 길을 따라 조금 더 앞으로 들어가 보는데, 노인이 발을 멈춘 곳은 화려한 정원이 끝나고 다른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붙어있는 작은 문 앞이었다. 노인은 천천히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노인이 찾는 사람은 그곳에 있었다.

긴 의자 위에 보료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여인은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는데, 노인이 걸어와 그녀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을 때까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똑한 콧날과 붉은 입술에서 풍겨오는 서늘한 미모는 여전하였지만 여인의 눈은 탁하기 그지없었고, 생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노인은 물끄러미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다 여인의 손에 가서 시선이 멈추었다. 기다란 손가락 끝에 길게 낀 백은과 금장으로 장식한 긴 호갑투(護甲套)를 바라보던 노인의 입이 열렸다.

“액룡조를 그 물건으로 사용했구려. 한소군.”

“그랬지요. 당태세.”

여인의 붉은 입술 새로 나온 목소리는 탁하기 그지없었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인은 당태세에게 눈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찾아와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내 정체는 알았던 모양이오.”

“북경의 천호가 말해 주었지요. 그리고 비무에서도 대충은 알 수 있었고.”

“이제 대부분은 마무리가 되었소. 한소군.”

“그래요, 모든 것이 끝났군요. 이게 당신의 보수설한(報讐雪恨)이겠지요?”

한소군 도려진의 말에 당태세는 고개를 돌리며 도려진을 노려보았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지.”

“아니, 나는 모든 것이 끝났어요.”

한소군 도려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탁한 빛을 띄고 있던 여인의 눈동자에 서서히 광채가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기가 돌아오는 게 아니라 투기(鬪氣)가 차오르는 것이었다.

“내 자식도 사라졌고, 백룡문도 망했어. 소주에서의 삶도 이젠 끝났어. 내가 십칠 년간 쌓아올린 모든 것이 채 스무날이 가기 전에 망가지는군요. 당신을 그 때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당태세!”

여인의 부드득 이 가는 소리가 당태세의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차가운 눈매는 한순간도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랬소?”

당태세의 뜬금없는 질문은 한소군 도려진에게는 너무나도 명확한 물음이었다. 도려진은 당태세를 바라보면서 피가 묻은 것 같은 붉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난 그 때 여덟 살도 안 되는 아이를 진중에 안고 있었어! 그 아이에게 무너지는 나라에서 같이 죽자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어! 당신도 자식이 있었잖아요. 당신은 그런 선택을 한 나를 이해 못하는 건가요?”

“당신은 당신과 자식을 살리려고 나와 내 자식을 사지로 몰았지. 대의명분도 버렸고, 동지들도 버리고 나라도 버렸어. 당신 자식을 살리려고.”

“모든 어미가 그랬을 거야! 누가 자식을.....그렇게 개죽음으로 몰아넣는다고! 너나 네 자식을 그런 자리에 보내는 거야! 당태세!”

여인의 악에 받친 외침에 당태세는 눈을 끔벅이다가 한숨을 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마지막 말은 단단한 당태세의 마음에도 너무나도 깊이 꽂히는 화살 같았다.

“그래서 그 대가로 얻은 삶이 이런 것이었나?”

“그래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했어! 내 자식을 떳떳하게 문파의 계승자로 키우고, 이 땅을 지키는 무문으로 백룡문을 세우고! 누구 하나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죄 없는 처자와 집안을 도륙하면서 살았다 이거구나.”

당태세의 메마르고 차가운 눈빛이 한소군의 말을 막았다.

여인은 당태세를 노려보며 이를 드러냈지만 당태세 역시 여인을 향한 살심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노인과 미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에 적의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저 넌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위해서 다른 걸 다 희생시키는 악인일 뿐이다.”

“그래, 그게 나다. 당태세. 누구든 그렇지 않겠어? 누구인들 나처럼 살지 않겠냐고!”

“사람들을 속이며 살려고 했으면 끝까지 분수를 지켰어야지.”

“늙은이, 네 놈이 무엇이기에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언젠가 저승에서 내가 너희를 잡으러 올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느냐.”

여인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호갑투를 빼버렸다. 어느새 여인의 두 손은 보료 위에 숨겨놓은 두 가닥 소도를 잡고 있었는데, 그 칼은 묘하게 앞으로 날이 기울어 마치 낫처럼 보이는 기물이었다. 여인의 눈빛은 이제 완연하게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인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대신 앙칼지고 표독한 삵과 같은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다시 지옥으로 꺼져. 당태세!”

여인의 손이 번득이며 한 쌍의 백룡음월겸(白龍陰月鎌)이 당태세의 목을 향해 날았다.

당태세의 목괴가 앞으로 움직이며 들어오는 두 쌍의 낫을 받아 튕기고 앉은 채로 목괴를 옆으로 휘둘러 도려진의 공세를 막았다.

순간, 한소군 도려진은 그대로 껑충 뒤로 움직이며 목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고, 다시 두 자루 낫을 부리며 자세를 잡았다. 젊은 시절의 무위만은 못해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몸짓이었다.

당태세는 의자에서 일어나 여인을 향해 목괴를 창처럼 내질렀다. 여인의 쌍겸이 목괴에 얹히더니 그대로 목괴를 타고 주르륵 앞으로 미끄러지며 당태세의 목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하지만 당태세가 손을 빼고 목괴의 뒷부분을 잡자 낫의 날은 튀어나온 목괴의 손잡이에 걸려 더 올라오지 못하였고, 당태세의 손이 슬쩍 목괴를 돌리자 낫을 잡은 손이 꺾이며 몸이 뒤틀렸다.

한소군 도려진의 아리따운 아미에 주름이 잡히더니 낫을 풀고 다시 옆으로 몸을 돌려 당태세의 등을 노렸다.

당태세가 몸을 틀며 들어오는 도려진의 낫 두 개를 막아내고 가볍게 목괴를 돌려 여인의 공세를 풀었다.

한소군 도려진의 백룡음월겸은 예전의 기세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무위는 십칠년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에 비해 당태세는 조금 전까지도 살얼음판 같은 생사결을 겪고 나온 몸이었다.

여인의 낫과 몸의 진퇴와 호흡의 갈무리가 모두 당태세에게 읽히는데, 차라리 이것이 비무이고 대련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순간 당태세의 목괴가 한순간의 힘을 넣어 도려진의 왼손을 후려치자 짧은 비명과 함께 여인의 낫자루가 날아가 풀숲 속으로 떨어졌다. 망연한 표정의 도려진을 보던 당태세가 짧게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무엇이냐.”

여인은 대답대신 이를 드러내며 남아있는 낫을 들고 당태세에게 튀어들었다. 악만 남아있는 여인의 몸동작이 오히려 투로를 따르는 무인의 출수보다 흉폭했다.

여인의 낫이 그대로 당태세의 이마를 찍어 올리자 당태세가 목괴를 들어 그를 막아내었고, 공격이 막히자 낫을 돌려 옆구리를 노리는 도려진의 공격을 당태세는 가볍게 목괴를 회전시켜 재차 막아내었다.

그 순간, 도려진은 몸 전체를 팽이처럼 회전시키더니 낫을 등 뒤로 돌려 당태세의 머리를 향해 있는 힘껏 처박았고, 당태세는 재빨리 몸을 틀어 도려진의 낫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다는 것을 알차 챈 도려진이 갑자기 손을 벌리고 낫을 떨구었다. 여인은 그대로 몸을 다시 회전시키며 적수공권을 활짝 펴고 중지와 검지를 그대로 편 채 당태세의 목을 향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찔러 들어갔다.

한소군 도려진의 절초, 액룡조(扼龍爪)였다.

하지만 그 순간, 당태세의 좌수가 먼저 앞으로 뻗으며 목괴의 손잡이로 여인의 손을 위로 치켜 올렸고, 당태세의 우수가 빈틈을 파고 들어가며 도려진의 명치를 그대로 가격하였다.

가죽북을 치는 소리가 여인의 몸에서 울리며 여인은 그대로 무릎을 털썩 꿇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확하게 들어간 일격이었다.

여인의 입에서 선혈이 밀려나오며 화려한 치마와 바닥을 붉게 적셨다.

“잘 가게. 한소군.”

당태세의 말에 여인은 가슴을 움켜쥐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인은 고개를 들고 당태세를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도려진의 붉은 입이 벌어지며 이가 드러났다. 하지만 연이어 나온 말은 당태세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휘(揮)…휘아(揮兒)야…휘아야….”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샘솟으며 땅으로 떨어졌다. 여인은 고개를 떨구고 피와 눈물을 쏟으며 연이어 아들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당태세의 눈매가 조금씩 일그러지며 목괴의 가운데 부분을 움켜잡았다.

목괴에서 뽑혀 나온 번득이는 칼날은 주저함 없이 그대로 여인의 목을 향해 떨어졌고,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그대로 끊겨버렸다. 당태세는 입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당태세는 소리를 지르고 또 질렀다. 마치 하늘에 대고 한풀이를 하는 사람 같았다. 당태세는 하늘을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다가 입을 꽉 다물었다. 부릅뜬 눈에 핏발이 솟았다.

노인은 자신의 원수가 아니라 다른 곳을 보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은 피가 안 통해 하얗게 변할 지경이었다.

“하늘이여! 내 마음은 쇳덩이 같고 내 결심은 바위같소이다! 내가 꺾일 것 같소이까!”

노인은 이를 악물더니 다시 소리를 토해내었다.

“나는 모두 멸할 것이오! 모두를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원한을 다 풀고 갈 것이오! 하늘이 후박(厚薄)함이 없다면 닥치고 내 하는 일을 보시오!”

노인은 입술을 부들대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긴 밭을 기경한 황소가 자신의 일을 마치고 투레질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 때였다. 당태세는 뒤쪽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감지하였다. 뒤를 보고 돌아선 당태세의 눈앞에 가녀린 시비 하나가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너는 누구냐?”

“저는 백룡문의 문주, 철선군자 왕양성 대인의 시비입니다.”

소녀는 죽어 넘어간 한소군 도려진의 시신을 바라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당태세에게 고개를 돌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문주께서 노대인를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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