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타뢰대 (10)
마지막 비무초친이 있는 날 아침, 하늘의 구름은 빠르게 북으로 올라가고 세찬 바람이 성중을 감쌌다.
기치들이 하늘로 휘몰아 올라가며 운하의 물결이 잘게 흩어져 포석에 와 맞부딪혔다. 여름날 맞기 힘든 서늘한 바람이 타뢰대 위에도 불어왔다.
오늘은 비무초친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운집한 관중들은 이전 사인(四人)의 대결보다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백룡문 소문주의 대결 여파가 마지막에 영향을 준 듯싶었다.
단상위의 인사들도 바뀌어 있었다. 지금까지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던 위장군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 옆에서 모든 행사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던 한소군 도려진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물이 와서 도려진의 자리를 채우고 있었는데, 가늘고 긴 인상의 사내는 무인이 아닌 문인처럼 보였다.
사내는 단상 아래 펼쳐진 타뢰대를 맥없이 바라보며 전혀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는데, 몇 남지 않은 단상의 사람들은 한소군 도려진 대신 들어온 그 마른 사내의 인상을 살피는데 심려를 기울이고 있었다.
“백룡문주는 변한 게 없구먼.”
당태세는 휘장 너머로 물끄러미 백룡문주를 바라보고 씁쓸한 표정을 가면 속에서 지어보였다. 한소군은 비무초친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 뒤에 서 있는 당태세를 향해 지금까지 사회를 보던 백룡문도가 넌지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잠시 이번 비무 시작 전에 두 분께 드릴 말이 있소이다. 괜찮겠습니까?”
예봉취 백심주는 자신의 자리에 선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광탄사 무삼군 대신 당태세가 멀쩡하게 돌아온 것을 보면 일말의 동요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것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룡문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두 분이 이번 비무초친 마지막 결승의 참가자입니다. 아, 물론 잘 알고 계시겠지요. 헌데……조금 껄끄러운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서 말입니다.”
백룡문도는 흑가면과 장신의 권사를 번갈아 살펴본 뒤에 조심스레 운을 떼기 시작했다.
“조금 전 들어온 전갈인데, 위장군 댁에서는 이번 비무초친의 결과로 위소저를 혼인시키자는 조약은 없는 일로 하자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사실, 이번 혼사는 백룡문이 깊이 관여를 하게 되었는데 이게 막판에 좀 어그러졌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백룡문도는 말을 하면서 내내 흑가면을 쓴 북경 무명수, 당태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책임지라는 듯한 눈치였지만 당태세는 알 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백룡문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토해내고 다시 말하였다.
“그러니 두 분에게는 소정의 찬조금이 주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비무초친에서 이기신 분께는 상금이 다시 지급되고요. 어떻습니까? 이정도 제안으로 만족을 하시겠습니까?”
“나는 좋소.”
당태세가 말하자 뒤에 서 있던 예봉취 백심주도 당태세를 보며 짧게 말하였다.
“돈이 없어도 싸울 것이네만 하나 부탁이 있네.”
“네?”
“생사결(生死決)을 내고 싶은데 괜찮겠는가?”
“네?”
“나는 괜찮네.”
당태세가 덤덤한 목소리로 승낙했다.
백룡문도는 핏기가 하얗게 빠진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만 후다닥 뒤로 튀어 올라갔다. 당태세가 예봉취 백심주를 보고는 먼저 한 마디를 던졌다.
“사형문 십대제자의 유지를 받았다 들었다.”
“그렇다. 광탄사는 죽었느냐?”
“광탄사, 호둔조, 초영검, 무영쌍륜.”
지금까지 표정없이 흑가면을 노려보던 예봉취의 얼굴에 슬쩍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갈무리되었던 무지막지한 기운이 사내로부터 밀려나오는데, 정순한 기운은 그 자체가 투기이자 살기였다.
“네 놈은 누구냐?”
“나는 네 사부 사형문주 유독중의 명을 끊으러 온 사람이다.”
그 순간, 백룡문도가 다시 내려와 두 사람을 보며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위에 말씀을 드렸는데, 백주에 생사결을 벌이는 것을 용인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비무중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질 수는 없습니다만…….”
“일어나도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말이로군.”
백룡문도는 예봉취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그 정도면 되었다는 듯 예봉취는 휘장을 걷고 먼저 타뢰대를 향하였다.
당태세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뢰대를 향해 발을 뻗었다. 어차피 둘 다 서로에 대한 속내를 안 이상 그냥 넘어갈 대결은 아닌 터였다.
계단을 타고 올라선 타뢰대의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눈이 부실 정도의 새파란 하늘이 소주의 성도 위에 운하 위에 펼쳐져 있었고, 하늘과 무대 사이에 서 있는 당태세를 향해 사람들의 환호성이 몰려왔다.
좋은 날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좋은 날이었다.
“이제 비무초친의 마지막 결승을 시작하겠습니다. 예봉취 백심주와 북경 무명수의 대결이오!”
백룡문도의 소개는 이제 장황하지 않았고, 말에 힘도 없었고, 말을 길게 끌고 가며 대중을 웃고 울리려는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관중들은 여전히 무대 위의 사내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덤덤한 사내의 소개와 함께 두 사내가 무대의 가운데로 걸어오자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며 서로의 이름을 연호하고 화난 듯 신이 난 듯 고함을 질러대었다.
비록 사람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이 자리에 모여있는 이들은 모두 두 사람의 무위를 구경하러 온 것이지 그 이상을 바라고 온 이들은 없는 듯 보였다.
당태세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예봉취 백심주를 향하였고, 백심주 역시 허리를 편 채 당태세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어차피 거쳐야 할 일.”
짧은 당태세의 독백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백룡문도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더니 손을 들었다가 무대 아래로 힘차게 내리며 짧게 시합의 개시를 알렸다.
“비무 개전!”
두 사람은 동시에 자세를 낮추었다. 서로 손을 섞은 적은 없어도 무위의 견식은 충분히 가능한 비무였다.
쉽게 손이 나가거나 두려워 출수를 못하게 되면 그것이 패배로 직결되는 판이었고, 이번에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당태세는 타 문파의 권각을 쓸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천문의 비망권으로 승부를 볼 작정이었다. 예봉취 백심주도 부후경 때처럼 손속에 정을 둘 이유가 없었다. 사문의 적이 바로 앞에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은 보법을 밟는 것도 아니고 자세를 변화시키지도 않았다. 정확하게 발 하나가 더 뻗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만큼을 벌려둔 채 마치 석상이 된 듯 그 자리에 서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관중들도 왜 싸우지 않느냐고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팽팽하게 몰아치는 긴장감이 관중들에게까지 전해지는 중이었다.
세찬 바람이 타뢰대를 지나 구경하던 사람들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이유모를 오한이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지나갔다.
두 사내의 시선 사이로 한기가 흘렀다. 움직이지 않는 두 사내의 팔다리 사이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드나들며 서로의 강약을 탐지하는 중이었다. 두 사내의 눈이 다시 빤히 적의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권이 동시에 앞으로 튀어나갔다. 서로의 권이 상대방의 턱을 향해 정확하게 들어가는 순간, 또 다른 손이 들어오는 주먹을 동시에 막았다.
두 사람의 팔이 똑같은 모습으로 서로 대각을 이루며 허공에서 멈춰섰다.
두 사람의 발이 하나씩 뒤로 빠져 몸을 받치고 중심을 잡았다. 턱을 노리던 주먹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자 주먹을 막고 있던 손바닥이 같이 돌며 움직임을 봉쇄했다. 같은 힘이 서로 연결되며 천천히 두 사람의 손이 이어진 듯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태세와 예봉취의 몸이 오른쪽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발이 서로의 움직임을 따라 같이 움직이고, 손은 기의 흐름을 따라 팽팽하게 이어져 원을 그리며 맞붙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두 사람은 기묘한 춤을 추고 있는 듯 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뿜어 나오는 무형의 기운은 관중들도 얼어붙을 만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순간, 당태세의 손이 먼저 회전하며 예봉취의 권을 밀어내자, 예봉취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그대로 회각(回脚)을 당태세의 턱에 꽂아 넣었다. 당태세의 손바닥이 발을 흘려보내며 순간 몸을 예봉취에게 붙였다.
당태세의 두 손이 주먹으로 변하며 순식간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백심주에게 일고여덟발의 연타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백심주는 슬쩍 주먹으로 들어오는 권을 쳐내며 후퇴하더니 다시 한번 긴 발을 이용하여 머리 위와 옆구리에서 떨어지는 예리한 발차기를 당태세에게 가하였다.
당태세 역시 몸을 돌리며 예봉취의 공격을 피하고는 다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자세를 잡았다. 강맹하기 그지없는 공격이 서로의 몸을 노리고 번득이자 관중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두 고수의 대결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예봉취의 진가는 각(脚)이 아니라 권(拳).’
당태세는 이미 예전 부후경과의 결전을 보면서 예봉취 백심주의 권을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빠른 발차기로 상대와의 거리를 벌리는 척하면서 순식간에 파고 들어가 강권 한 방으로 상대를 침묵시키는 전법이었다. 권각의 속도와 파괴력을 같이 구비한 자가 아니라면 하기 힘든 전략이었다.
‘사형문의 일도전쇄(一道塡碎)가 저 무공의 모체일 것이다.’
당태세는 예봉취의 무공 연혁까지 따지며 그의 수법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이 상대방을 꾀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도 생각하는 중이었다.
당태세가 다른 권법들을 섞어 그의 정체를 숨긴 것처럼, 예봉취 역시 부후경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공부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당태세가 머릿속으로 수십개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순간, 예봉취가 긴 다리를 죽 뻗으며 다시 당태세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사내의 채찍 같은 발차기가 밀려들어오며 거리를 좁히자 당태세 역시 두 팔을 뻗으며 들어오는 예봉취의 권각을 막으며 사내의 가슴을 향해 먼저 일권을 날렸다.
순간, 예봉취의 두 손이 앞으로 접히면서 들어오는 당태세의 권을 막고 다시 세찬 일격을 앞으로 뻗었다. 바로 부후경을 한방으로 쓰러뜨린 그 권이었다.
당태세의 눈이 번뜩였다.
당태세의 팔꿈치가 도끼처럼 앞으로 뻗어나와 사내의 권을 막고, 동시에 우수가 가슴 아래쪽에서부터 밀려나와 예봉취 백심주의 방어를 뚫고 백심주의 명치를 향해 튀어 올라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파고 들어오던 백심주의 권이 그 자리에서 멈추는가 싶더니만 파고드는 당태세의 우권을 그대로 감싸쥐더니 슬쩍 뒤로 퉁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차력(借力)의 기술에 당태세의 권은 그 힘을 잃어버렸고, 당태세의 권을 무위로 돌린 예봉취의 손은 주먹을 활짝 편 채로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일직선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장(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