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28화 (128/226)

128. 강남 소주 (19)

당태세가 곽일지의 집에 들러 환복하고 다시 길을 나설 즈음, 하늘이 열리고 세차게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을 하얗게 물들이며 풍경을 흐리게 만드는 물줄기가 하늘과 땅 사이에 길을 내놓는데, 그 모습을 보던 곽일지가 당태세가 나가는 것을 말렸다.

“험한 싸움을 하고 오셨는데 어찌 바로 비를 맞으려 하십니까?”

“약속이 잡혀있네.”

“이런 시기에 따로 약속이시라니오?”

“오늘 일의 연장이겠지.”

곽일지는 따로 말을 잇지 않았다. 다리를 다쳐 집에만 있는 피혁장이라 하더라도 귀 두 개는 열려 있었다.

그는 알음알음 비무초친의 진행상황과 그 결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피혁장은 광에서 우산을 하나 가져왔고, 당태세는 우산을 빌려 쓴 채 괴창을 옆에 끼고 작은 피혁장의 집을 나섰다.

노인은 갑작스레 내린 비가 만들어낸 한산한 보도를 건너, 운하로 내려가 쉬고 있는 배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향하였다. 누구 하나 빗속에서 배를 모는 노인의 종적에 관심갖는 이는 없었다.

당태세는 배를 타고 가림막이 되어주는 빗속을 뚫고 들어가 다시 태호로 접어들었고, 사방의 빗소리를 홀로 들으며 호수 위에 외롭게 떠 있는 매화도 안으로 다시 몸을 밀어 넣었다.

“객을 맞을 만한 광경은 아니로군.”

당태세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고는 백룡삼교가 쓰러져 있는 잔디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하늘은 구멍이 뚫린 듯 비를 쏟아내며 우산을 두들겼지만 시나브로 줄어들기 시작하던 비는 급기야 언제 쏟아졌냐는 듯 갑자기 멈췄다.

어느새 하늘은 구름까지 가르며 붉은 속살을 태호에 보여주니 일시에 저녁의 호수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사방의 물안개 사이로 자욱하게 습기가 차올랐고 당태세는 고요해진 일몰의 호수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굳이 기척을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풀숲 사이에서 인영 하나가 부스럭거리며 당태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다름 아닌 청운룡 왕보휘였다.

이미 여기저기 멍든 얼굴에 걷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그였지만 사내는 자신의 등에 두꺼운 밧줄을 매고 천으로 꽁꽁 싸맨 커다랗고 넓적한 물건 하나를 잔디밭 사이로 질질 끌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왕보휘는 잔디밭에 백룡삼교가 죽은 뒤 썩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당태세를 바라보았지만 당태세는 별다른 미동도 없이 그를 앞으로 불러 세웠다.

“가지고 왔느냐.”

“네, 가지고 왔습니다만…저…저분들은…….”

“잔말 말고 풀어 보아라.”

왕보휘는 당태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이 끌고 온 물건의 천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왕보휘의 손에서 천이 풀려나오자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마치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위엄있는 서체로 쓰여진 [백룡문]이라는 세 글자가 붙은 현액이었다.

바로 백룡문의 정문에 붙어있던 그 현판이었다. 왕보휘는 자신이 가져온 현액과 당태세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보는데, 당태세는 물끄러미 그 현액을 보다가 혼잣말을 던지듯 왕보휘에게 물었다.

“이 현액을 뜯어오는 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느냐?”

“제가 명하니 모두가 말을 들었습니다.”

“뭐라 말하고 뜯었느냐?”

“제가 그 글씨를 자세히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네 부모는 그 자리에 없었고?”

“아버지는 후원에서 두문불출하신 지 오래시고, 모친께서는 내당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청운룡의 표정은 덤덤했고, 말에는 어떤 따사로운 감정이나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당태세는 그런 공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입맛을 다시더니 품에서 준비해 온 작은 병 하나와 화섭자를 왕보휘에게 건네주었다.

왕보휘는 물끄러미 당태세가 건넨 것을 바라보았다.

“기름이다. 그곳에 붓고 불을 당겨라.”

잠시 왕보휘는 두 손에 쥐어진 물건을 바라보더니 당태세에게 조용히 되물었다.

“이것만 하면 저는 가도 되는 것입니까?”

“타는 것을 보고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되겠군요.”

청운룡은 납득했다는 듯 기름 뚜껑을 따서 현액에 부어버리더니 화섭자를 당겨 단박에 불을 붙였다.

오랫동안 백룡문의 문루에 걸려있던 거대한 현액은 오래된 시간만큼이나 말라 있었고, 소나기가 내린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일순간에 불이 붙더니만 그대로 불기둥을 하늘로 뿜어 올렸다.

청운룡 왕보휘는 불타오르는 현액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심상이나 감정의 격동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보다못한 당태세가 낮은 목소리로 왕보휘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네가 태우는 백룡문의 현액은 하남의 본향에서부터 문주들이 짊어지고 지니던 백룡문의 유필(遺筆)이니라. 많은 기인협사가 저 현액 아래에서 나왔고, 충신 열사가 저 현액을 보고 자랐느니라.”

“예.”

“오늘 네가 이것을 태우는 것은 이제 백룡문이 세상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느니라.”

“그렇군요.”

당태세는 왕보휘의 대답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다시 조근조근 말하였다.

“백룡문은 네 대에서 절문(切門)이다. 너는 이제 백룡문의 사람이 아닌 것이고.”

“그럼 끝난 것이군요.”

“뭔가 속에 맺힌 것이 있느냐?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느냐?”

당태세가 재차 묻자 왕보휘는 고개를 저으며 짧게 말하였다.

“좋은 기억도 없고 다시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왕보휘는 공손한 말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 누구도 백룡문의 높은 담장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 도리는 없고, 화려한 소문주의 삶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 짐작은 하되 단정을 할 수는 없었다.

당태세는 왕보휘의 냉랭한 태도가 백룡문에서 그간 살아온 삶의 반동(反動)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맘 한구석에 남아있는 불쾌감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누릴 것은 다 누린 공자의 삶은 높은 담벼락이 있기에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왕보휘는 그것까지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였다. 아니, 한 줌의 애환도 없다는 말인가.

“백룡문으로써는 수치겠지만 너에게는 새로운 삶이겠구나.”

“기회를 주셔서……감사합니다.”

당태세는 청운룡의 사의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신 노인의 입에서는 냉랭한 대답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강호로 돌아오지 마라. 이곳은 이제 네 고향이 아니다.”

“이대로 떠나가면 양친을 다시 뵙기는 힘들겠지요?”

“평생 보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살거라. 갈 곳은 정하였느냐?”

“북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당태세는 더 캐묻지 않았다.

청운룡 왕보휘는 현액이 모두 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듯 보였다. 청년이 한 번 더 당태세를 바라보았을 때, 당태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보휘는 화급하게 그에게 한 번 더 묵례를 하고 불타는 현액을 뒤로 남긴 채 죽어 넘어간 백룡삼교의 시신을 넘어 매화도를 급히 빠져나갔다.

당태세는 슬쩍 그가 가는 길을 따라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 보았다. 이제 황혼조차 남지 않은 어두운 섬의 해안가에 등불을 들고 청년이 오기를 기다리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여인은 청년이 다가오자 등불을 들고 그를 맞이하였고, 청년은 그를 필요로 하는 여인 앞에서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가 배 위에 올라 삿대를 잡았다.

여인은 청년의 뒤에 앉아 비파를 들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니, 그 목소리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여인은 가기(歌妓)인 듯 보였다.

“저게 백룡문의 마지막 후예가 선택한 삶이구나.”

배는 칠흑 같은 호수 위를 등불 한 자루에 의지해 둥실 떠나가고, 당태세의 뒤에서는 붉은 기운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라갔다. 백룡문은 이것으로 끝이 났도다.

당태세는 뒤로 몸을 돌려 여전히 기세좋게 타오르는 현액을 바라보며 소문주 왕보휘의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를 일순간 따져보았다.

“가치 없는 일 아닌가.”

당태세는 타오르는 현액에서 쏟아지는 불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무덤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한때 천하의 영걸을 배출했던 무문은 이제 불똥이 되어 승천하며 하얗게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당태세의 입이 열리며 한숨이 새어나왔다.

“철선군자 왕양성. 자네는 자식농사도 헛지었고, 가족도 지키지 못하고 문파도 망하게 하였구나. 어쩌다 자네가 그리 되었단 말이냐?”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노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

“이 늦은 시간까지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아까 소나기가 엄청나게 쏟아졌는데 말입니다!”

“아이구, 그러게 말이다. 내 서쪽의 다관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다가 좀 늦었구나.”

당태세는 옷을 탈탈 털고 침상에 주저앉아 아룡을 보더니 씩하고 사람좋은 숙부가 지을법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어딘가 어색하기 그지없던 그의 웃음은 이제 버릇이 되고 익숙해져 얼굴에 붙었고, 아룡을 바라볼 때에는 저절로 배어나올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래, 오늘 비무초친은 재미있었는가? 거의 끝날 때가 다 되어가지?”

“말도 마십시오. 오늘 아수라장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습니다.”

“음? 왜?”

아룡이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벌리고 코웃음을 치더니 손가락을 위로 휘휘 돌리며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소문주가 복면사내에게 져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그것도 아주 늘씬하게 얻어터져서 목불인견의 꼴로 지고 말았습니다요.”

“뭐라고? 저런! 소문주가 원래 결승까지 가야 하는 거 아니었느냐?”

당태세의 말에 바로 그거라는 듯 아룡이 당태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니까 말이죠. 그 눈치없는 복면 놈이 일을 다 망쳐놔 가지고…배당도 엉망이 되고 돈 날린 인간이 허다합니다. 어떤 놈이 복면한테 돈을 걸었겠어요? 나 참! 그렇게 주먹이 세면 한인팔기나 녹영군에 자원하지 왜 이런 데 나와서 남들 도박을 망치는지!”

“그럼…그 소문주가 실력이 없었구먼.”

아룡이 어깨를 들썩하더니 피식 웃었다.

“뭐, 그 자리가 실력으로 가는 자립니까? 부모 잘 만나 올라간 자리지. 하긴 전 그리 많이 잃은 것도 아니고 예봉취가 결승가는 데 돈을 걸었으니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런 놈 코 납작하게 만들어진 것도 꽤 유쾌하긴 하군요.”

당태세도 아룡의 말을 듣더니 씁쓸한 표정에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 마음이란 게 대충 그런 거였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애를 키워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

“숙부께서는 곧고 순박하시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누구나 돈이 있고 권세가 있으면 다 자식을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지요. 숙부님은 자식이 없으시잖아요?”

“음…뭐…….”

당태세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를 보고 있던 아룡이 슬쩍 한숨을 쉬며 객잔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도 조실부모 안 하고 돈 많은 부모 밑에서 잘 컸으면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지요.”

“부모님 생각이 가끔 나느냐?”

“어렴풋이 납니다…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기억하고…어머니 얼굴은 희미하지만 생각은 나지요.”

“어머니가 가끔은 보고 싶고?”

아룡은 물끄러미 천장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가끔 생각은 나지만 저는 지금 이 삶이 훨씬 좋습니다. 어머니가 계셔봤자 추레한 한족의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겠지요. 지금 저는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만주족의 무두리가 꿈 아닙니까?”

“그래. 너는 청운(靑雲)의 꿈이 있지. 참으로 장하도다.”

아룡은 당태세의 말에 아무런 대꾸없이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아룡을 바라보다 조금 전, 사랑하는 기녀를 배에 싣고 북쪽으로 배를 몰고 나가던 젊은 왕보휘의 얼굴을 같이 떠올려보았다.

둘은 전혀 같은 것이 없었지만 또한 매우 닮아보였다. 늙은이는 갑자기 심신의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앞에 놓인 등잔의 등불을 눌러 꺼버렸다.

몸은 피곤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을 듯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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