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강남 소주 (18)
흑가면의 사내와 도포를 입은 장발사내가 같이 소주 시가를 걷고 있으면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모두 비무초친에서 뛰어난 무공을 선보인지라 알아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모두가 그들을 에워싸고 사방에서 말을 걸어대는데 과연 정해진 곳으로 가서 싸움을 할 수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당태세를 모시고 가는 광탄사 무삼군의 표정은 모든 일에 초연한 듯 미소를 띠고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중이었으니, 모르는 이들은 마치 당태세와 무삼군이 원래 친교가 있는 사이라 믿을 정도였다.
“어디로 갈 예정인가?”
당태세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걸자 무삼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두 사람은 운하로 내려가 작은 쪽배를 타고 운하 위에 배를 띄웠다. 무삼군이 귓속말로 사공에게 뭐라고 말하자 사공은 말없이 삿대를 들고 두 사람을 태운 배를 힘차게 저어 북으로 올라갔다.
“그나저나 일을 엉망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려. 소문주를 그렇게 두들기시다니.”
광탄사의 말에 당태세는 앞으로 다가오는 물길을 보면서 대꾸했다.
“어차피 네 명 안에 들지도 못할 실력이었다. 진작에 분수를 알려줬어야 했거늘.”
“과욕이 모든 것을 망치지요. 지금 제 옆에 계신 누구처럼 말이오.”
“내가 모든 것을 망쳤다고?”
광탄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예봉취와 소문주가 비무초친 결승에서 붙어서 소문주가 위소저를 택하게 되어 있단 말이오. 그런데 어디서 튀어나온 가면이 신랑을 박살내 놓았으니, 이젠 어쩌라는 것인가?”
“자네와 예봉취는 돈을 못 받는가?”
광탄사는 씨익 소름끼치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는 선금만 받소이다.”
“그럼 모두가 잘 된 일 아닌가. 위소저는 허수아비 같은 신랑을 안 얻으니 좋고, 자네들은 돈 벌어서 좋고.”
“하하하! 그렇지요! 대신 나는 이렇게 처리할 일이 남아있게 되었지!”
무삼군의 웃는 소리와 함께 배가 우뚝 멈춰 섰다. 배는 어느새 한가한 작은 부두에 멈춰서 있는데, 이곳은 인가도 아니고 상가도 아닌 곳이었다. 무삼군이 먼저 배에서 내려 부두를 걸어가자 당태세 역시 가면을 쓴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작은 현관 같은 부두를 지나 돌로 된 길을 따라 들어간 좁은 문 안에는 허름한 도관(道館)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도관을 지키는 도사들은 모두 사라진 듯 보였다.
“어느 곳이나 제사를 못 받는 신들은 있는 법이죠. 그런 곳에 묵으며 제를 드리는 것도 수행의 일환입니다.”
광탄사는 이곳을 자신이 소주에서 묵는 숙소로 정했던 모양이었다. 당태세는 주변을 보다가 물끄러미 광탄사를 보며 물었다.
“너는 진짜 도인이냐?”
“물론이지요. 제사는 물론이고 축문도 제가 씁니다. 강론이라도 해 드리리까?”
“너는 사형문주 유독중에게 무공을 전수받은 사형문도 아니냐.”
“그것도 광탄사인 저고, 도사인 무삼군도 저입니다. 생각외로 사형문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네놈들은 백룡문의 청부를 받아 여기까지 왔겠지?”
광탄사 무삼군은 여인처럼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가하고, 모든 것을 움직이니 동서남북 모두가 사형문의 손에 놓이는 도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는 무삼군을 보며 당태세의 눈이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평범한 도관이었다. 허름하니 먼지가 쌓여있는 이 곳에는 무기를 놓을 곳도 없었고, 주변에 흐르는 기운을 보니 복병을 숨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광탄사 무삼군은 온전히 자신의 무공 하나로 당태세를 잡겠다는 소리였다.
그제야 심기를 가라앉힌 당태세는 숨을 고르더니 무삼군을 바라보았다.
“사형문의 빌어먹을 십대제자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느냐.”
광탄사는 놀랍다는 듯 눈을 지그시 뜨고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답을 해주었다. 이 도관을 당태세의 무덤으로 쓰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인 듯 보였다.
“예열천존 지학묘는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그의 유지는 예봉취 백심주가 받들고 있지요.”
“예봉취가 십대제자중 하나가 되었단 말이구나. 어쩐지 권각이 깊더라니.”
“패둔성과 낭광수도 돌아가셨지요. 이 두 분의 유지도 다른 이들이 잇고 있습니다.”
“그 놈 둘은 예전부터 몸이 허하여 일찍 죽을 줄 알았느니라.”
광탄사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도관 쪽으로 인기척이 있는지 확인하더니 다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가면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이제 웃음기라고는 돈을 주고 찾아봐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본문에 대해서 굉장히 세세하게 알고 계시는군. 그대의 정체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당태세는 그제야 천천히 자신의 검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광탄사 무삼군을 바라보았다.
가면 속에서 늙은 노인의 얼굴이 튀어나오자 광탄사는 슬쩍 눈썹을 꿈틀대더니 경계하는 눈빛을 띄었다. 당태세의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라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문파에 처음 듣는 존함이오.”
“오늘 들었으니 잊지는 않겠지. 명부전에 가서 시왕(十王)께 꼭 말씀드리거라.”
광탄사 무삼군이 두 손을 펼치자 넓은 소매가 아래로 내려가며 새의 날개깃처럼 옆으로 퍼졌다. 조금씩 광탄사의 눈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보게 될 금나수와 솔각은 타뢰대에서 봤던 것과는 천양지차의 무공이 될 것이었다.
당태세 역시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비망권의 기수식을 잡은 뒤 무삼군을 향해 한마디를 더 던졌다.
“묻는 김에 하나만 더 물어보자.”
“원하시는 대로. 죽기 전까지 뭐든지 가(可)하오.”
“왜 그리 사형문은 사방에 사람들을 보내 돈을 긁어모으느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
“그건 내가 대답할 일이 아니오. 답을 듣지 못하고 여기서 생을 마감하심이 안타깝구려.”
무삼군의 말에 당태세가 피식 실소를 지어보였다.
“초영검과 무영쌍륜도 같은 말을 하더구나. 너도 그들과 같이 대답 하나 못하고 죽을 셈이냐?”
순간 무삼군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하더니 두 손을 슬쩍 들어 소매를 둥실 위로 치켜 올렸다.
“그대는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노사.”
“내 말에 먼저 답을 하라.”
“우리는 사람과 칼을 모으는 중이다.”
“뭐?”
당태세가 눈을 둥그렇게 뜨는 순간, 광탄사의 입이 닫히며 눈매가 사납게 변하였다.
사내의 보법이 천천히 방위를 밟으며 당태세의 앞으로 다가왔다. 금나와 솔각이라면 분명 당태세의 타격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할 터, 무삼군 역시 당태세의 권각을 주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고 있는 당태세의 표정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노인은 순천문의 무공을 꺼낸 이상 더는 양보도, 패배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광탄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을 터였다.
남은 것은 승부뿐이었다.
“예봉취를 데리고 오지 않은 너의 오만함을 탓하게 될 것이다.”
히죽 웃는 무삼군이 미끄러지듯 당태세를 향해 뛰어들었다.
사내의 두 손이 앞으로 뻗으며 꽃잎이 벌어지듯 소맷자락이 합쳐졌다가 옆으로 퍼져 나갔다. 꽃잎의 가운데에는 독랄한 갈퀴가 놓여있었다.
저 손에 잡히면 먼저 중심을 잃고, 그 뒤에 허공에 매쳐진뒤 땅으로 떨어져 뼈가 부서질 터였다.
당태세 역시 몸을 뒤로 움직이며 들어오는 무삼군의 손의 궤적을 벗어나 발을 틀어 무삼군의 측면을 노렸다. 무삼군 역시 몸을 멈추고 방향을 바꿔 당태세의 몸을 좇았다.
순간, 당태세의 오른발이 그대로 앞으로 뻗으며 부인각으로 무삼군의 정강이를 노렸고, 무삼군은 재치있게 몸을 틀어 당태세의 부인각을 피한 뒤 그대로 두 팔을 뻗어 당태세의 목을 움켜쥐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목을 움켜쥐면 그대로 울대를 부수고 명을 끊어버릴 터였다.
하지만 당태세의 팔꿈치가 바람처럼 밀려 들어와 무삼군의 얼굴을 그대로 치며 오히려 무삼군의 오른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당태세가 팔을 엇갈아 돌리며 무삼군의 팔을 부러뜨리려는 순간, 무삼군의 몸이 위로 펄쩍 공중제비를 하며 긴 소매로 당태세의 시야를 가리고 자신의 관절을 풀었다.
당태세는 손을 풀고 무삼군의 긴 소매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섰다. 무삼군 역시 뒤로 물러서며 다시 자세를 취하는데, 당태세의 팔꿈치에 맞은 입술에서는 어느새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늙은이, 온몸의 뼈를 박살내 주마.”
“금나수는 너만 쓴다더냐?”
당태세의 비릿한 웃음이 눈이 뒤집힌 무삼군이 다시 땅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당태세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무삼군에게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의 권과 장이 같이 맞부딪히고 손가락이 갈퀴처럼 변해 상대방의 요혈을 노렸다. 당태세의 권이 무삼군의 어깨를 치자 무삼군의 두 손이 당태세의 팔을 잡고 몸을 틀었다.
순식간에 공격의 주도권이 무삼군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당태세는 저항하지 않고 무삼군의 힘을 타고 그대로 몸을 맡기니 무삼군은 그대로 당태세를 붙잡고는 땅으로 내팽개쳤다.
순간 당태세가 허리를 돌려 한 번 더 회전하는 힘을 더했고, 이번에는 무삼군도 같이 몸이 돌아갔다. 무삼군이 재빠르게 손을 풀고 다시 튀어들어가 당태세의 어깨를 잡아채었다.
순간 당태세의 권이 지(指)로 변하며 무삼군의 손등을 찍고 순식간에 연격을 난타하며 무삼군의 몸을 뒤로 밀어내자, 무삼군의 소매가 활짝 펴지며 들어오는 당태세의 권을 싸잡고 다시 옆으로 돌려버렸다.
“제길!”
당태세는 욕을 내뱉으며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무삼군은 자신의 손아귀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붙잡을 수가 있었고, 모든 것을 메치고 내던질 수 있었다. 실로 가공할 금나수였다.
당태세가 몸을 허공에서 바로 뒤집으며 땅에 착지하자 무삼군은 바로 당태세에게 달려들며 매섭게 권을 날렸다.
당태세는 어깨로 무삼군의 권을 받으며 그대로 몸을 돌려 장으로 무삼군의 허리를 밀어치니 무삼군은 훅 소리를 내며 슬쩍 뒤로 빠져나갔다.
“제법 공방의 묘리를 아는구나.”
“집어 치워라, 늙은이!”
무삼군이 다시 달려들며 소매에 바람을 한껏 집어넣고 당태세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독이 오를대로 오른 무삼군의 손속은 날카롭고 흉악했다.
도사의 옷자락 사이에서 팔이 화살처럼 튀어나와 당태세의 두 손목을 삽시간에 움켜쥐었다. 당태세가 채 눈치를 채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 당태세가 발을 빼기도 전에 무삼군의 몸이 바싹 들어붙더니만 당태세의 오른발과 왼발을 한꺼번에 휘감고는 공중에서 허리를 퉁기며 그대로 땅바닥으로 당태세를 떨구었다.
“망할!”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몸을 틀어 오른쪽 다리부터 먼저 땅에 떨어졌다. 철갑을 씌운 의족이 오히려 약점이 아니라 보호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무삼군의 쇠 같은 팔뚝이 그대로 머리 앞에서 열십자로 당태세의 팔을 잡고 팔꿈치로 목을 누르기 시작했다. 무삼군의 시뻘건 입술에 히죽 소름끼치는 미소가 올라왔다.
혈도가 막히고 숨이 턱 막혀왔다. 무삼군의 온몸이 당태세를 천근의 무게로 누르는 중이었다. 빠져나갈 곳은 한 틈도 없어보였다.
그 순간, 천천히 당태세의 손이 장에서 권으로 변하며 무삼군에게 단단히 잡힌 손을 슬쩍 뒤로 빼었다가 짧게 앞으로 뻗으며 무삼군의 가슴팍을 가볍게 찍었다.
소리 하나 울리지 않는 깃털같은 타격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무삼군의 가슴에서 김빠지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사지에 충만했던 기력이 일시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일순간 당태세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던 무삼군이 축 늘어지며 당태세의 배 위에서 고개를 떨구고 쓰러져 버렸다.
노인은 끙 소리를 지르며 올라탄 무삼군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목을 만지며 컥컥거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시왕을 보러가는 것은 무삼군이 아닌 당태세가 되었을 터였다.
“대체…무슨….”
아직 무삼군은 말을 걸 정도의 의식이 남아있었다. 사내는 숨을 헐떡이고 눈을 희번덕대면서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태세는 쓰러진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시며 한마디를 던졌다.
“내력을 한 번에 방출하여 네 심장을 멎게 한 것이다. 최심경(摧心勁)은 몰라도 촌경(寸勁)은 알겠지.”
무산군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린 채 당태세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눈이 위로 돌아가며 사지를 쭉 폈다. 급박하기 이를데 없는 싸움에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정작 옆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당태세에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머리를 계속 내젓고 있었다.
싸운 시간은 채 일각이 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 사이 두 사람간에 넘나든 공방만 수 차례였다.
“……이런 식이라면 백타는 안 하는 게 낫겠다.”
당태세는 손등으로 허리를 툭툭 치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 흙이 묻어 엉망이 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객잔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곽일지의 집에서 환복을 해야 제대로 당태세가 되어 움직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오늘은 다른 약속이 하나 더 있었다.
“…그놈은 제대로 맹세를 이행하려는 지가 궁금하구먼.”
당태세는 땅에 풀러놓았던 검은 포증의 가면을 다시 뒤집어쓰고 도관을 천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광탄사 무삼군의 표정은 마치 때 아닌 낮잠에 빠진 도사의 모습과 진배없었다.
가면 쓴 노인이 사라지고 대자로 뻗은 채 누워있는 도사만이 도관을 지키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나둘, 작은 빗방울이 풀잎 사이에 맺히기 시작했다. 기어이 소나기가 한바탕 내릴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