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26화 (126/226)

126. 타뢰대 (9)

대자로 누워있던 왕보휘는 당태세의 서슬퍼런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가면 속의 눈이 뿌려대는 살기가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다.

왕보휘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모여있던 관중들은 다시 환호성을 뿌려대며 이구동성으로 청운룡 왕보휘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덤벼라.”

당태세의 말은 짧고 살벌했다. 왕보휘는 노인의 말을 거역하면 분명 그 뒤에 지금보다 더 끔찍한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왕보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호흡을 고르더니 다시 자세를 낮추고 두 손을 활짝 편 채 당태세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당태세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자세였다.

백룡문의 만천집조(滿天輯爪).

제대로만 쓴다면 들어오는 공격을 첫 합에 무위로 끝내고 두 번째 술기로 땅에 처박은 뒤 팔꿈치로 목을 부숴버리는 금나수의 일종이었다.

당태세는 왕보휘가 자세를 잡는 것을 보자마자 그대로 무대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검은 복면 사내의 손이 권에서 조(爪)로 바뀌었다.

왕보휘 역시 갈퀴처럼 손을 뻗고 들어오는 당태세의 조공을 막으며 팔꿈치를 앞으로 뻗어 재차 들어올 복면사내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그 순간, 당태세의 두 번째 공격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아래에서 위로 손이 올라오며 왕보휘의 팔뚝을 갈퀴 같은 다섯 손가락으로 꽉 움켜쥐었다.

왕보휘의 눈이 둥그래지는 가운데, 당태세는 몸을 그대로 왕보휘에게 붙이더니 허리를 이용하며 왕보휘의 몸을 그대로 업듯이 어깨에 올리고 땅바닥에 매쳐버렸다.

쾅-!

무대에 왕보휘의 몸이 태질당하고 튕겼다가 다시 떨어졌다.

왕보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순간, 단상에 앉아있던 한소군 도려진이 무의식중에 벌떡 일어서며 비명을 질렀다.

“보휘!”

한소군 도려진은 흑가면의 사내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구봉문의 봉악태청(鳳握太淸)……당태세, 네가 나를 능멸하는구나!”

한편 왕보휘는 허리를 뒤틀며 고통을 가까스로 참느라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런 사내의 머리 위에서 다시 복면가면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씨 소저의 얼굴이 기억나느냐?”

순간, 왕보휘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이를 악물었던 표정이 다시 진지하게 바뀌었다. 사내는 두 발을 위로 올리더니 풀쩍 제자리에서 재주를 넘으며 다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왕보휘의 눈에 처음으로 투지라고 불릴만한 것이 들어찼다.

당태세는 그를 보더니 손을 뻗어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이번에는 청운룡 왕보휘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소문주의 경신술은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사내의 몸이 바람처럼 흑가면에게 닿았고 섬전같은 주먹이 흑가면의 명치와 목을 향해 날아갔다.

흑가면 북경 무명수의 손이 장으로 펴지며 들어오는 권을 침착하게 막아내자 이번에는 소문주의 몸이 땅을 박차고 승천하는 청룡처럼 높이 뛰어올랐다.

사람들의 탄성과 함께 소문주의 두 발이 하늘에서 바람을 가르고 쏟아지는데, 예리한 발차기가 그대로 흑가면의 몸을 밀어내며 오랜만에 비무의 주도권을 가져갔다.

“청운룡 왕보휘!”

사람들의 외침과 함께 청운룡 왕보휘가 몸을 틀며 회축을 그대로 흑가면의 가슴팍으로 날려버렸다.

순간, 왕보휘는 자신의 발아래로 몸을 낮추고 물 아래의 고기처럼 밀듯이 들어오는 당태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창졸간의 순간 가면속의 눈동자가 왕보휘를 노려보았다.

섬뜩한 느낌이 밀려오는 것과 동시에 흑가면의 어깨가 그대로 얼음을 뚫고 나오는 고기처럼 위로 치솟으며 그대로 왕보휘의 어깨를 받아버렸다.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대는 왕보휘의 뒤로 돌아간 흑가면이 예리한 회각을 그대로 왕보휘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북치는 소리가 왕보휘의 몸에서 울려 퍼졌다.

컥 하는 신음소리가 왕보휘의 입에서 튀어나오는데, 다시 연이은 슬각(膝脚)이 왕보휘의 배를 걷어찼다.

관중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 눈이 풀린 채 허둥대는 소문주의 앞으로 한발 다가선 흑가면은 슬쩍 몸을 틀더니만 그대로 발을 뻗어 소문주의 뺨을 걷어차는데 퍽 소리와 함께 청운룡 왕보휘의 몸은 오래된 가죽 포대처럼 그대로 무대에 처박혔다.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경기를 주재하던 백룡문도가 연단 중간에서 위로 올라가야 할지 말지 결정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었다.

구겨진 빨래처럼 쓰러져 있던 왕보휘가 쿨럭대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손을 무대에 대고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죽은 이소저의 자태는 기억 나느냐?”

이익,

갑자기 왕보휘의 입에서 작은 기합성과 함께 몸을 번쩍 들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었던 백색장포는 이미 흑가면의 발길질과 태질에 엉망이 된 지 오래였고, 산발한 머리와 멍든 얼굴은 비무의 시작때와는 천양지차인 몰골이었다.

하지만 왕보휘의 눈동자는 처음보다 훨씬 강렬하게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으니, 그 대상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호승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당태세는 속으로 슬쩍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못해도 용의 자식이라 이거구먼. 문약한 놈을 때려잡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씩씩대며 일어난 왕보휘는 당태세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하고 가면속의 눈을 노려보았다. 소문주 청운룡은 이제 화려한 기수식을 선보이지 않았다.

단지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앞다리를 허보로 만든 채 언제고 튀어나가 적의 목을 낚아챌 틈만을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봤던 왕보휘의 어떤 자세보다도 간결하게 무위가 드러나 보였다.

흑가면은 그런 청운룡의 자세를 맞이하며 자신 역시 팔을 가슴에 짧게 붙이고 조금씩 발을 움직여 왕보휘의 앞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청운룡!”

누군가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왕보휘의 발이 바닥을 찍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당태세 역시 슬쩍 몸을 앞으로 붙이며 두 팔을 뻗었다.

왕보휘의 주먹이 아무런 형식도 준비도 없이 그대로 적가면을 때렸다.

들어오는 권은 가면사내의 손에 막혀 옆으로 빗나갔고, 또 다른 손바닥이 왕보휘의 뻗은 주먹 사이로 들어가 젊은 백룡문의 어깨를 올려쳤다.

왕보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지만 사내는 주먹뻗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왕보휘의 몸이 돌며 팔꿈치가 흑가면의 가슴을 찍었다. 하지만 흑가면의 손은 여전히 공격을 막아내고 왕보휘의 공격을 불발로 만들었다.

그러나 연이어 펼쳐지는 회각의 연격은 그대로 흑가면의 가슴팍에 빨려들 듯 들어갔다. 하나 흑가면은 그것까지 알고 있었는지 몸을 돌리며 왕보휘의 발차기를 피해냈다.

발차기가 파훼되자 왕보휘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땅을 박차고 흑가면을 향해 몸을 띄웠다.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는 흐린 하늘 아래로 백룡(白龍)이 날며 날카롭게 발톱을 휘두르듯 선풍각(旋風脚)이 흑가면을 향해 날아갔다.

흑가면의 손이 엇갈리며 발차기를 막아내는 순간, 착지한 왕보휘의 눈이 번쩍이며 그대로 허리 아래부터 뻗어올린 정권이 태산을 뚫어버릴 기세로 흑가면 북경 무명수의 몸을 강타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무명수의 엇갈려 있던 두 팔이 그대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왕보휘의 정권을 그대로 아래로 쳐버렸다.

그와 함께 주먹 쥔 두 팔이 활짝 장으로 펴지며 그대로 접시를 받치듯 앞으로 밀려들어가며 왕보휘의 갈빗대 아래를 쌍장으로 쳐올렸다.

쾅 하는 소리가 무대 전체를 울렸다.

왕보휘의 몸이 정권을 지른 자세 그대로 움찔거리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흑가면의 목소리가 다시 왕보휘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하지만 이번 음성은 매섭거나 냉엄한 목소리가 아닌, 긴 세월을 살아온 노인의 허탄한 목소리였다.

“죽은 부소저의 얼굴은 아직 기억하느냐?”

“……여전히 기억합니다.”

입에서 새어나온 말과 신음보다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먼저 무대로 떨어졌다.

왕보휘는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흑가면의 사내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쓰러진 소문주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뒤로 몸을 돌렸다.

백룡문도가 비틀대며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움직이지 않는 왕보휘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흑가면 북경 무명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승자는 북경 무명수….”

넋 나간 사람의 말처럼 백룡문도의 입이 열리자 구경하던 관중들 역시 얼어붙은 듯 말없이 타뢰대 위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웅성이며 타뢰대를 멀뚱하게 바라보며 서로 수군대기 시작했다.

무대 위의 흑가면 역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서 있을 뿐이고 어떤 승리의 자세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북경 무명수!”

한 사내의 거창한 외침이 타뢰대를 울렸다.

사내는 연신 손을 흔들며 무명수를 외치고 있었다. 바로 부후경이었다. 부후경은 연신 손을 들어 올리며 무명수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중이었다.

사내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눈은 흑가면의 사내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검은 가면의 사내는 부후경을 지그시 바라보다 천천히 자신의 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시나브로 사람들의 입에서 북경 무명수의 별호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연호는 점점 거세어졌고, 이윽고 타뢰대를 울리는 함성이 되어 천지를 뒤흔들었다.

“북경 무명수!”

한소군 도려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북경에서 왔다던 천호는 아예 오늘 비무를 보러 나오지도 않았다. 여인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창백해진 얼굴을 꼿꼿이 세운 채 천천히 단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인의 몸이 움직이자 다른 귀인들도 하나둘 자리를 빼기 시작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단상과는 달리, 타뢰대를 둘러싼 인파의 함성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드디어…이틀 뒤에…그러니까…이 자리에서 비무초친의 승자가 결정될 것입니다. 예봉취 백심주와 북경 무명수는 늦지 말고 도착하여 시합을 개시해주시오.”

백룡문도의 결승 인사는 무성의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단상에 남은 사람도 없거니와 사회를 보는 백룡문도 역시 얼이 반쯤은 나가 있는 듯싶었다.

사람들은 그런 인사에도 서로 고함을 지르고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하는데, 뒤편에서는 도박에 판돈을 건 사람들끼리 멱살을 잡고 싸우기 시작했다.

조금씩 비무의 분위기가 흩어질 즈음, 당태세는 타뢰대를 떠나 아래로 내려왔다. 예봉취 백심주는 여전히 당태세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생각보다 꽤나 거칠게 마무리를 지으시는군. 그런 식으로 결판을 낼 줄 몰랐습니다.”

무대를 내려온 당태세를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광탄사 무삼군이었다. 그는 당태세가 끝나기만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당태세 역시 무삼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이의 훈육을 왜 내가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부모의 역할 아니런가?”

광탄사 무삼군은 당태세의 말에 하얀 이를 드러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북경 무명수와 손을 섞게 되었다는 것이 기껍기 그지없는 모양이었다.

“소문주가 복이 있어 천외천(天外天)이 있음을 젊을 때 보았습니다. 더 나이 먹어 만났더라면 목숨으로 대가를 지불하였을 것인데.”

“번잡한 소리하지 말고 어서 나가세. 자네가 원하는 것은 승부 아닌가.”

“생사결(生死決)이오.”

광탄사 무삼군의 웃는 눈에 광망이 스쳐 지나갔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무삼군의 눈빛을 빤히 보던 당태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펼쳤다. 앞장서라는 이야기였다.

무삼군은 그제야 에봉취 백심주에게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이켜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당태세 역시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홀로 남은 예봉취 백심주만이 무대를 떠나가는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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