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타뢰대 (8)
슬쩍 하늘에 낀 옅은 구름은 빠르게 북쪽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바람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하기사 여름 한철에 어찌 좋은 날만 계속 되랴마는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뭍어나는 물내음은 큰 비가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는 조짐이었다.
다행히 이번 비무가 일어나는 동안에는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조만간 오늘내일 중으로 큰 비가 뿌릴 것임은 자명해 보였다.
하지만 타뢰대를 둘러싼 관중들의 열기는 날씨와는 관계가 없었다.
이제 달랑 네 명이 남은 비무초친은 정점을 달리고 있었고, 오늘 결정되는 사람들이 위소저를 두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게 될 터였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은 백룡문 소문주와 누가 붙느냐에 있었다.
“아무래도 광탄사가 낫지 않겠나? 그 신묘한 재주가 대단하지 않은가?”
“누가 뭐라해도 예봉취요. 소문주도 그 자의 권격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이네.”
장막 안까지 번져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지껄임을 들으며 당태세는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타뢰대의 뒤 대기실에 남아있는 이는 단 네 명 뿐이었다.
네 사람은 모두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당태세가 멀쩡하게 타뢰대 뒤로 들어오자 광탄사 무삼군과 예봉취 백심주의 표정은 형연하지 못할 거북함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호둔조 하운병이 죽었다는 것을 따로 알릴 필요도 없었다.
“만장하신 소주의 성민 제중 여러분! 드디어 오늘, 비무초친의 쌍웅이 결정나는 날입이다! 수많은 호걸의 숲을 헤치고 여기까지 온 이들에게 어찌 구분이 있겠습니까! 오직 주먹과 발, 그리고 용기와 지혜로 한 번의 결판을 승리로 이끌 뿐입니다!”
백룡문도의 소개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다시 하늘을 찔렀다.
이제 진행이 원숙함의 절정을 보이는 백룡문도는 정확하게 사람들의 함성이 사그라들 때를 노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누가 마지막까지 타뢰대에 남아 소주제일미를 얻을 광영을 쟁취할 것인가! 사형문의 폭풍 같은 권법가인가! 화려한 금나수의 도사인가! 힘을 숨기고 있는 신비인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소주 제일의 귀공자가 소주제일의 명예를 얻을 것인가?”
“청운룡 왕보휘!”
“예봉취가 제일일세!”
“광탄사를 무장원으로!”
사람들의 함성을 들으며 의기양양 입이 벌어진 백룡문도는 손을 양쪽으로 펼치며 우렁찬 목소리로 타뢰대에 올라올 두 사람을 소개하였다.
“제 일전(一戰)! 하늘이 울리고 땅이 진동한다. 구름을 가르고 떨어지는 주먹과 빗발처럼 쏟아지는 각법으로 소주를 취하리라! 사형문의 고수, 예봉취 백심주!”
장막 뒤에 서 있던 예봉취가 백룡문도의 말과 함께 조용히 타뢰대를 향하였다. 예봉취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당태세에게 일절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다.
그와 함께 백룡문도의 이어지는 소개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재색(才色)겸비(兼備)가 어찌 여자만의 물건이랴! 흑발의 도사가 옷소매 하나로 천지의 조화를 이루는도다! 악양의 준재, 광탄사 무삼군!”
긴 옷소매를 휘날리며 무삼군이 타뢰대의 계단을 올라서기 전, 당태세는 무삼군의 눈동자가 자신을 힐끗 노려보고 지나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태세는 그 순간, 누가 결승에 올라갈 것인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결승에 올라갈 자는 예봉취 백심주가 분명할 거라고 당태세는 예견했다.
“그리고 너는 나를 골목에서 만나겠구나. 무삼군.”
당태세가 가면 뒤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을 뇌까리는 순간, 백룡문도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의 인영이 타뢰대 위에서 격돌했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함성소리가 하늘을 쪼개놓을 것만 같았다.
광탄사와 예봉취는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앞으로 튀어나가 상대방의 몸을 치고 잡기 시작했다.
광탄사의 두 손이 예봉취의 팔을 잡고 공중에서 비틀자 예봉취는 그 자리에서 공중제비를 하며 광탄사의 금나수를 풀어버리고 재빠르게 몸을 틀며 연속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광탄사의 펄럭이는 소매가 들어오는 발차기를 감싸듯이 막으니 펑펑하는 빨래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고, 광탄사는 소매를 뚫고 나오듯 앞으로 돌진하더니 맹수처럼 예봉취를 향해 손가락을 휘둘렀다.
실로 초식의 변화가 빠르고 공격이 무궁무진 다채로운데, 두 사내는 서로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실로 엄청난 고수들의 비무에 타뢰대를 둘러싼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괴성과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잡극(雜劇)도 저 정도면 화경(化境)에 달한게지.”
당태세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는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두 사람이 타뢰대에서 날고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대련이었다.
보여지는 초식들이야말로 화권(花拳)이요 수퇴(秀腿)였다. 현란하게 내지르는 팔과 발, 금나의 수법 어디에도 살초는 끼어있지 않았다. 그저 큰 동작과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저 지경으로 반 다경 정도 뛰논 뒤에 슬쩍 오묘한 동작의 초식 하나를 섞어 놓고 그것에 맞고 땅에 떨어진 잉어처럼 펄떡대며 마무리를 지을 터였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두 사람의 수법이 빤히 눈에 보일 수도 있겠지만 고수의 대련을 쉽사리 따라갈 눈썰미는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당태세는 문득 자신의 뒤에 가만히 앉아있는 백룡문 소문주, 왕보휘를 바라보았다.
왕보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당태세를 아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심정이 복잡하기로는 소문주 왕보휘도 당태세와 마찬가지일 터였다.
‘저 놈을 약조한대로 때려눕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타뢰대에서 때려죽이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당태세는 잠시동안 고민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백룡문에 지킬 도리는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다시 무대가 떠나갈 듯 한 함성이 들려왔다.
슬쩍 둘러본 무대 위에서는 이제 예봉취도 현란하게 발차기를 하면서 무대 위를 누비는데, 실로 두 사람이 합을 맞추며 돌아다니는 빠르기라는 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광대들의 나례가 저보다 화려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미 관객들의 태반은 두 사람의 묘기에 혼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다. 저 지경이면 위에서 무슨 승부가 벌어져도 다 승복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당태세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광탄사 무삼군의 두 손이 한데 얽히더니 꽃잎이 피어나는 듯한 형상으로 모인 옷소매가 화살처럼 예봉취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예봉취가 가볍게 광탄사의 일격을 피하며 정권을 날렸지만 광탄사는 들어오는 정권을 번개처럼 낚아채더니 허리를 틀어 예봉취의 중심을 흩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다리의 위치를 바꾼 예봉취의 뒷발이 슬쩍 광탄사의 오금을 건드리자 오히려 광탄사의 중심이 비틀거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예봉취의 정권이 정확하게 무삼군의 명치에 얹혔다. 실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무삼군은 그 자리에서 한 발짝 비틀대며 뒤로 물러서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렸다. 웅장한 함성과 외침소리가 사자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승자는 벽력섬전(霹靂閃電)! 풍치전체(風馳電掣)! 전광석화(電光石火)! 다름아닌 사형문의 귀재, 예봉취 백심주!”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예봉취와 광탄사는 무대를 건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당태세는 그들이 자신의 옆을 지나는 동안 혹시라도 모를 암습에 대비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예봉취가 계단을 내려와 다시 대기열에 앉아있자 무삼군은 자신의 의장을 정리하고는 타뢰대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찌 혼자 먼 길을 돌아간단 말인가? 아직 님이 남아있는 것을?”
사내의 음산한 혼잣말이 당태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광탄사 무삼군은 당태세의 경기가 끝나고 난 뒤에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당태세는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타뢰대의 계단을 올라갔다.
드디어 자신의 무대가 된 것이다.
“옛 영웅담(英雄譚)을 타고 이 자리로 돌아온 신비의 무인! 언제쯤 그는 흑가면을 벗어던지고 정체를 드러낼 것인가? 소주제일미를 얻은 다음이런가! 출중한 실력, 알 수없는 과거! 북경 무명수!”
당태세가 타뢰대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지난 시합과는 천지차이인 반응이었다.
“이어서 등장하는 오늘의 마지막 선수! 선풍도골의 미공자, 소주의 자부심! 백룡문의 앞날을 짊어진 젊은 용이 여의주를 탐하는 도다! 백룡문 소문주 청운룡 왕보휘!”
당태세는 자신의 건너편으로 올라오는 백룡문 소문주의 모습이 관중의 눈에 들어오자 모든 이들이 소문주 왕보휘를 연호하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관중들이 원하는 것은 문무겸전의 미남 쾌걸이 미녀를 얻는 광경 아니런가.
모든 이들이 청운룡 왕보휘를 연이어 소리 높여 외치자 왕보휘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들의 환호에 답하였다. 그러자 다시금 천둥 같은 환호성이 왕보휘의 인사에 답하였다.
단상 위에 살포시 자리잡은 한소군 도려진의 얼굴에는 자기도 모르게 은은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무명수! 무명수!”
그때였다. 한 줄기 작은 외침이 타뢰대의 끝에서 울려 퍼졌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그곳을 쳐다보고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한쪽 팔은 부목까지 대고 있는 처량한 사내가 성한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고 목이 터지라 그의 별호를 외치고 있지 않는가.
사방의 모두가 다른 이름을 연호할 때 그는 홀로 꿋꿋이 허리를 펴고 다른 외침에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눈을 부릅뜨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북경 무명수!”
다름 아닌 부후경,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사내는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이며 이를 악문 채 당태세를 바라보며 주먹을 치켜들고 있었다. 당태세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알겠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 개전!”
북경 무명수가 검은 가면을 고쳐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기수식을 펼쳤다. 청운룡 왕보휘 역시 자세를 낮추고 무명수의 손과 눈을 보며 조금씩 앞으로 다가가 거리를 좁혔다.
당태세의 손이 다시 명치께로 모이며 천천히 보법을 밟아 오른쪽으로 움직이자 청운룡 역시 몸을 틀어 그와 반대로 방향을 잡았다.
두 사람의 형상이 태극(太極)을 이루며 타뢰대의 중심에서 멈추지 않고 돌아가자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 순간, 청운룡 왕보휘의 두 손이 날카로운 용조(龍爪)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북경 무명수의 목과 가슴을 찢어발길 자세로 번개처럼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보법을 밟고 있던 북경 무명수의 몸이 한 발 뒤로 물러서는가 싶더니만 그대로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번개처럼 돌렸다.
순간 짝하는 소리가 타뢰대에서 울려 퍼지며 청운룡 왕보휘의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가 버리는데, 여인들의 입에서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단상에 앉아있던 도려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일시에 가셔버렸다. 미공자 청운룡은 말 그대로 썩은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굳은 채 그대로 무대 위에 쓰러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얼굴부터 무대에 떨어진 왕보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를 못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때, 왕보휘의 머리 위에서 굵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어나라. 광대야. 이제 시작이다.”
당태세의 차가운 눈동자가 왕보휘를 얼려버릴 듯한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