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강남 소주 (17)
종리세리를 위시한 세 명의 백룡삼교가 각기 자신의 장도를 뽑아들고 당태세를 둘러쌌다.
비록 몸은 늙었을지라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칼을 빼든 모습은 실로 백룡삼교가 얼마나 많은 도산검림을 헤치고 나왔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노인들의 자세는 빈틈이 없었고 칼을 뽑아 상대를 가차없이 대적하는 자세 또한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정작 그들과 대면하고 있는 당태세는 여전히 목괴로 땅을 짚은 채 그를 포위하는 이들을 바라볼 뿐이었고, 그들이 슬쩍 한 발을 앞으로 당겨 들어오자 싸우지 말자는 듯 오른손까지 들어 보였다.
“당문주. 자세를 취하시게!”
“그 전에 세 늙은이들에게 내가 물어볼 말이 있다.”
“무엇인가? 빨리 하라. 시간은 흘러가고 노인들은 성급하다!”
“내가 돌아다니며 소주의 일을 찾아보니, 소문주가 흠모하던 이 소저와 부 소저는 한소군 도려진이 죽인 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당태세의 말을 듣고 있던 종리세리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백룡삼교 세 사람 역시 허를 찔렸다는 듯 멍하니 당태세의 말을 듣고 제자리에 붙들려 서 있었다.
당태세는 그들 네 사람의 표정을 슬쩍 보더니만 히죽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씨 가문을 멸절시킨 것은 그대들의 소행이 아닐까 생각된다. 맞는가?”
순간 황포노인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 질렀다.
“그 입 닥치지 못할까!”
황포노인이 고함을 치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두 노인도 칼을 가슴 위까지 올리며 당태세를 향해 번개처럼 몸을 움직였다.
순간 당태세가 목괴로 땅을 찍으며 뒤로 빠져나갔고, 백포와 청포 노인의 장도가 앞으로 떨어지는 순간 목괴를 앞으로 뻗어 두 사람을 동시에 후려쳤다.
생각 외로 강맹한 일격에 두 노인은 동시에 뒤로 한 발짝을 물러섰고, 당태세는 그들을 보면서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십자포의 소씨집안은 원래 백룡문과 무슨 관계인가? 내 생각에 그들은 백룡문이 소주에 터를 닦을 때 물심양면 도와준 집안 같은데…그게 사실 아닌가?”
“네 놈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당태세! 십자포의 소대가는 수적들에 의해 죽었다. 우리 백룡문과는 상관없어!”
“내가 십자포의 주민들에게 들은 바와는 다르구먼. 용 세 마리가 저택을 부쉈다던데.”
“뭐?”
세 노인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기 시작하고 뒤에 반 족장 정도 떨어져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종리세리는 이제 당태세와 백룡삼교를 번갈아 지켜보는 중이었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백룡문은 소대가와 계속 같이 갈 생각이었겠지. 소씨 소저를 소문주가 좋아하지 않았다면 말이네. 한소군 도려진은 기겁을 했을테고. 아무리 부가(富家)로 행세하는 소씨 집안이라지만 뱃사람, 어부의 집안과 백룡문의 후사가 사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당태세의 가느다란 눈이 세 노인을 죽 훑으며 지나갔다.
“그리고 한소군의 지령은 그대들이 받았겠지. 한소군 혼자서 어찌 그 집안을 모두 도륙할 수 있었겠는가.”
“닥쳐라, 당태세!”
“그래서 소씨 소저는 어찌 되었느냐? 태호에 가라앉았느냐? 네놈들이 해치웠느냐?”
황포사내가 더 이상 당태세의 말을 들어줄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칼을 뽑아들고 저벅저벅 앞으로 나섰다. 청포와 백포의 노인도 황포노인과 함께 다시 도세를 취하였다.
세 사람의 도법은 모두가 같은 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어딘가 달랐다. 당태세는 목괴를 고쳐잡으면서 세 사람의 보법과 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삼린분조(三鱗紛照).
백룡삼교가 펼치는 합격의 이름은 예전 강호에서도 그 파괴력과 독랄함으로 유명하였다.
같은 자세, 같은 출수, 그리고 전혀 다른 궤도의 움직임으로 최소한 한 사람의 칼은 몸에 맞는다고 알려진 수법이었다.
당태세는 목괴를 두 손으로 잡고 세 사람이 보법을 맞춰 다가오는 것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종리세리는 노인 넷이 벌이는 검결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당태세와 백룡삼교의 대화가 시작된 순간부터 마뜩찮은 표정에 미간에 주름까지 잡고 있던 무관은 뭔가 결심한 듯 자신의 안모도를 다시 칼집 안으로 밀어 넣더니 두 손은 아예 팔짱을 껴버렸다.
당태세는 멀리 서 있던 종리세리의 행동을 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합!”
순간, 청백황의 장포가 마치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뒤로 휘날리며 번쩍이는 칼날 셋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당태세의 몸도 노인들의 출수에 맞춰 옆으로 움직이며 목괴로 들어오는 칼날들을 막아내었다.
가슴을 뚫을 기세로 날아오던 세 개의 도는 당태세의 눈앞에서 갑자기 각자 방향을 틀며 머리와 허리, 가슴을 동시에 찔러들었다. 당태세의 발이 한 발 뒤로 더 빠지더니 목괴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붙였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목괴에 걸린 장도 하나가 위로 들려 올라갔지만 나머지 두 개는 목괴의 기세를 피해 옆으로 흘러나간 뒤였다.
같이 붙어있던 청백황의 장로들이 순식간에 각자의 위치로 떨어져 나가며 삼각형이 되어 당태세를 가두었다.
당태세의 눈이 게슴츠레 사방을 돌아보며 장도의 기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황포의 도가 옆구리로 날아오는 순간, 백포의 칼이 반대쪽 허리로 들어오고, 청포의 도는 뒤에서 당태세의 머리를 쪼갤 요량으로 떨어졌다.
순간 당태세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청포의 몸 쪽으로 붙으며 머리 위의 칼을 목괴로 막아내고 목괴의 손잡이를 뻗어 그대로 청포노인의 손목을 걸어 앞으로 당겼다.
청포노인이 비틀대며 자세가 무너지는 틈을 타 당태세의 목괴가 노인의 허벅지를 때리자 청포노인은 짧은 비명과 함께 옆으로 몸을 굴리며 당태세의 공격에서 빠져나왔다.
그 순간, 당태세의 양옆으로 백포와 황포의 도가 매섭게 후려치며 들어와 당태세의 전진을 막아내었다.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옆에서 매섭게 베어 들어오는 두 칼을 번갈아 막아내며 몸을 보호하였고, 그 틈을 타 자세를 회복한 청포노인이 다시 칼을 휘두르며 앞에서 덤벼왔다.
세 사람을 한꺼번에 막아내지 않은 한 셋의 협격은 물 흐르듯 이어져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게 될 것이고 결국 차륜진에 휘말린 상대는 자신의 진기가 고갈된 채 난도질로 생을 마감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태세는 그들의 전법을 익히 알고 있었고, 아까와 같이 협격진의 가운데 놓이는 상황을 최우선으로 피하려고 애썼다.
당태세의 몸이 황포노인에게 먼저 달라붙었다. 넉자 전당괴가 당태세의 두 손에서 회전하며 창처럼 황포노인의 칼을 막아내며 일순간에 십수방의 요혈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황포노인이 이를 악물고 도를 휘두르며 당태세의 쾌격을 막았지만 순식간에 어깨와 허리를 한대씩 얻어맞았다.
“명불허전 귀린갈!”
황포노인의 감탄과 함께 청포노인의 몸이 황포노인을 가로막으며 당태세의 목괴를 내리치자 백포노인이 옆에서 칼을 쥐고 그대로 당태세의 목과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그때였다.
당태세가 갑자기 자세를 낮추더니만 목괴의 가운데를 잡고 몸을 한 바퀴 회오리처럼 돌리며 두 사람의 사이에서 번개처럼 뒤로 빠져나갔다.
순간 당태세의 두 팔 가운데에서 번득이는 광채가 꼬리처럼 당태세의 뒤에 붙으며 따라나왔고, 그 광채는 청포도인의 목을 그대로 훑어버리고 다시 당태세의 손으로 들어갔다.
황포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청포도인이 목을 움켜쥐고 칼을 떨어뜨렸다.
백포도인이 알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당태세의 머리로 칼을 내리치는 순간, 당태세의 왼손에 잡혀있던 목괴가 들어오는 칼을 그대로 아래에서 막아내고 오른손에 들린 소도가 백포도인의 옆구리를 옴팡지게 쑤셔버렸다.
백포도인은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고, 눈이 화등잔만 해진 황포노인은 자신의 사제들이 풀숲에 머리를 박고 절명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어느새 당태세의 손아귀에는 짧은 단괴와 소도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소씨 처자는 어떻게 죽었는가?”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메마른 당태세의 질문에 황포노인은 넋이 나간 듯 천천히, 또박또박 대답하기 시작했다.
“…호수 아래 가라앉혔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피가 나올 정도로 꽉 깨물었다.
“백룡삼교가 협객이라는 소문은 그저 젊은 시절의 풍설이었구나.”
“우리는……백룡문은 가주의 명에 충심을 보일 뿐이다.”
당태세가 황포노인의 말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연약한 여인을 호수에 가라앉히는 게 충이냐? 네놈들은 직언(直言)을 했어야지!”
“……거역할 수가 없었다…그게…맞는 듯 보였어….”
“백룡문이 너희 대에서 망하는구나!”
순간, 황포노인은 눈을 뒤집으며 속에서 끌어올린 웅장한 기합을 내뱉으며 칼을 옆으로 세운 뒤 질풍같이 당태세에게 달려들었다.
노인의 팔이 움직이며 보이지도 않는 베기가 당태세의 몸통을 양단 낼 기세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 순간 당태세의 우수에 들린 소도가 들어오는 노인의 장도를 빗겨 막아내었고, 그와 동시에 당태세의 좌수에 잡혀있던 목괴가 낫처럼 거꾸로 잡히더니 손잡이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노인의 목을 강타하였다.
갑자기 사방에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협객들이 이따위로 늙을 줄이야….”
다시 무더운 햇살 아래 매화도는 평온한 광경을 되찾았다.
잔디밭에 아무렇게 널브러진 세 노인의 시신은 기묘하게 평안해 보였고, 마치 누워서 낮잠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당태세는 조용히 목괴를 가다듬고 검결의 장소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종리세리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당태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젠장, 내 밑천을 다 보여줬구먼.”
당태세가 힐끗 종리세리를 보며 투덜대었지만 종리세리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당태세를 노려보더니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보아하니 다리는 다 나은 듯 보이오만.”
“다 낫지 않았소. 나은 척하는 것 뿐이지.”
“그렇군.”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종리세리 앞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노인의 몸에서는 피비린내와 살기가 같이 진동을 하였지만 종리세리는 눈썹하나 움직이지 않고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같이 칼을 뽑고 싸우지 않았소?”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지.”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소?”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 이들을 돕고 싶지 않았을 뿐이오.”
당태세가 쯧쯧 혀를 차며 종리세리를 바라보았다.
“……관인이 그렇게 살아서 출세를 하겠나. 그대는 명을 받아 나를 잡으러 왔다면서.”
“명을 받은 것도 맞고 당신을 추포하러 온 것도 맞소이다. 하지만 이건 아닌 듯 하오.”
“까탈스럽군.”
“당문주. 당신의 과거는 이미 백룡문주에게 들어서 알고 있소이다.”
뜻밖의 말에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종리세리 역시 눈을 노인에게서 떼지 않고 예의 무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살생은 중죄고 당신은 죄인이오. 선무사(宣撫使)는 지역의 난리를 평정하고 백성을 위무하는 것이 우선이며, 장군부의 천호는 장군의 명을 제대로 받드는 것을 업(業)으로 하오.”
당태세는 자신의 목괴를 다시 바로 쥐었다. 하지만 종리세리는 여전히 팔짱을 풀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천호의 자격으로 그대를 좇고 있으며 선무사의 직위로 그대의 난행을 막고자 하오. 하지만 그대가 지금까지 살생한 자들 역시 하늘 아래 떳떳한 것이 없더군. 개중 몇은 역적이고 개중 몇은 관과 결탁하거나 시중의 시세를 농단하여 백성을 겁박해 이득을 취하던 이들이더군.”
당태세는 종리세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하였다. 하지만 종리세리는 자신의 뜻을 나름대로 결정한 듯 보였다.
“당문주. 그대에게 하나 물어봅시다. 지금 당신이 말한 백룡문의 범죄가 사실이오?”
“사실이네.”
“당신은 과거의 원한을 갚기 위해 출도한 것이오? 아니면 저들이 이렇게 햇살 아래 살면서 그림자 속으로 추잡한 짓을 감추고 있음을 알고 치죄하러 온 것이오?”
당태세의 매서운 눈에 갈무리되었던 살기가 다시 꿈틀거렸다.
“나는 오직 복수를 위해 움직일 뿐이다.”
“그렇다면 운이 좋았던 거군. 당신이 청조의 선량한 백성을 해한다면 그것으로 복수행은 끝이요.”
당태세는 가소롭다는 듯 종리세리의 말을 듣고 비웃음을 날렸다.
명(明)의 시대는 가고 만주족의 청(淸)이 천하를 뒤흔들고 있지만 당태세는 여전히 청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복수를 위해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고 다리를 이어붙여 여기까지 내려온 과거의 망령일 뿐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죄지은 자를 처리해서 나를 살려두겠다 이건가?”
“나 역시 이곳까지 당신을 추적하다 내린 결론일 뿐이오.”
“그렇다면 죄인들은 천호 당신이 처리하겠다는 심산인가?”
“장군부에서 그런 명을 받은 적은 없소.”
“선무사의 직위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럼 그대가 흡족해할까?”
당태세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종리세리를 바라보는데 종리세리는 자신이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아까보다 홀가분한 표정이 되어 팔짱을 풀고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옆을 지나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항주에서 기다리겠소. 항주의 동성문주가 깨끗한 삶을 영위한다면 그곳이 당신과 내가 만나는 마지막 도착지가 될 것이니.”
종리세리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초목을 헤치고는 섬의 기슭을 향해 걸어갔다.
무관이 자신의 시야를 벗어나 자취를 남기지 않고 기척을 흩어버릴 때가 될 때까지 당태세는 사내가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리세리의 말은 두서가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보였다. 지금 종리세리는 백룡문에 관한 당태세의 행동에 더 이상 끼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미친 놈 아닌가.”
당태세는 슬쩍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당태세는 여전히 종리세리가 사라진 곳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한참 뒤 당태세의 입가에 새겨졌던 비릿한 미소는 햇살과 함께 사라졌고, 뜨거운 햇살 아래 묵묵히 서 있던 노인의 황량한 얼굴엔 새로운 결의가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네 일을 마무리하고 찾아오라 이거로군.”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고 목괴를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비무는 남아 있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