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강남 소주 (16)
애초에 당태세라는 사람은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고 세상에 신세진 것도 없으며, 오직 무위와 도리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위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불문곡직 자신의 기권을 알리는 백룡문 소문주의 언사는 실로 가소로우면서도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노인의 눈이 새하얗게 불꽃속의 쇠처럼 달궈지며 열린 입에서는 상강(霜降)의 서릿발 같은 매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무가(武家) 동량(棟梁)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렷다. 네 위신이 저잣거리 싸구려 물건팔이라도 되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슨 흉계인가?”
번뜩이는 당태세의 눈길을 보던 왕보휘는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저 제가 보기에….”
“보기에?”
“대협께서는 저희 가문의 돈을 받지 않으신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당태세는 힐끗 왕보휘의 전신을 훑어보고 주변을 최대한 살펴보았다.
사내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딱히 기운을 억누르거나 암기를 발출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당태세의 매서운 눈은 여전히 사내를 감시하듯 노려보는 중이었다.
“네놈은 네 집안이 이 비무초친을 쓰레기 잡극(雜劇)으로 변질시켰음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를 결승까지 올리려는 심산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헌데?”
“대협께서 이 싸움에 아무런 연고 없이 들어오셨으니, 분명 우리 집에서는 대협을 매수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결승에 올라가기 싫고, 위소저와 혼약하기도 싫으니……제발 제 집안의 부탁이나 돈을 거절해 주십사 하는 것으로….”
“우스운 놈이군.”
당태세의 고소(苦笑)가 비릿하게 풍기자 왕보휘는 급작스레 말을 끊었다. 지금까지 침착하고 관후해보였던 사내의 표정에 초조함이 보이고 당황함이 드러났다.
눈을 깜박이며 당태세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표정은 영락없이 어미잃은 미아(迷兒)의 표정이었다.
“네 놈이 비무를 애초에 때려치면 될 일이다. 그것이 따로 사람을 불러내 부탁할 만한 일이라도 된단 말인가?”
당태세의 말은 왕보휘의 속내를 정확하게 찌르기라도 한 것인지, 왕보휘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만 당태세를 힐끗대며 띄엄띄엄 말까지 더듬었다.
“제가…정한 일도 아니었거니와…모친의 염원을 거스르기도 힘든 것인지라….”
“한심하구먼.”
“죄송합니다.”
“정말 한심한 놈이로세! 사내 대장부가 관례까지 올려놓고 평생 그렇게 살 작정이었느냐? 아예 그렇게 살 것이라면 위소저와 혼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인데 왜 지금 와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느냐!”
“실은……제가 따로 연모하는 처자가 있습니다.”
“뭐야?”
이번에는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질 차례였다. 왕보휘는 당태세가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고는 용기를 얻었는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털어놓을 심산인 듯 보였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그 소저는 평범한 여인이고, 저의 집과는 격차가 있는지라 모친께 아뢰지는 못하였지요. 내심 언제쯤 말씀을 드릴까 하였는데 이렇게 비무초친의 날이 잡히고 제가 참석을 하게 되어……조만간 마지막 우승까지 올라가더라도 저는 위소저와의 혼사는 관둘 셈이었습니다.”
“관둔다고?”
“그 전에 대협 같은 이를 만나게 되어 떨어지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었지요.”
당태세는 하도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용이 개를 낳았구나.
당태세는 불현듯 왕보휘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철선군자 왕양성과 한소군 도려진의 용모를 반반씩 섞은 준수한 외모에 체격도 좋았다. 비무에서 봤던 무공 역시 화권수퇴이긴 해도 그럭저럭 쓸 만한 것이었다.
비무가 끝나고 당태세에게 보여준 예의는 분명 진심일 것이었고, 그의 성품 또한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한 성의 명망을 모두 갖고 있는 거대문파의 소문주 치고는 대단히 훌륭한 성품이라고 봐도 무방하였다.
당태세가 하늘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왕보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놈은 부모가 보기에 훌륭한 자식이고, 아랫사람이 보기에는 관후한 위인일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대협.”
“하지만 중심이 텅 비어 있으니 평생 네놈은 한소군 도려진의 치마폭 아래에서 어리광을 부리다가 네 어미가 죽으면 같이 지리멸렬해질 놈이로다.”
왕보위는 갑자기 노인이 지껄인 부모에 대한 욕설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져 당태세를 노려보는데, 당태세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신랄한 말을 이어갔다.
“네 평생 한 번이나 부모의 말을 어겨본 적이나 있느냐? 그런 놈이 여인을 데리고 부모에게 소개를 시키겠다고?”
“……이 일이 정리되면 저는 분명 문주님과 내주님께 소저를 소개시키고…….”
하아, 당태세는 한숨이 나오며 저절로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뿐 아니라 집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놈이 분명하였다. 당태세는 잠시 망설이다 마음을 먹고 왕보휘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네놈이 지금까지 만난 여인들은 나는 알고 있다.”
“네?”
“부소저와 소씨집안의 소소저. 그리고 지난 전란에 죽은 이소저에 대해 네놈은 뭘 알고 있느냐?”
순간 왕보휘의 얼굴에 사색으로 변하며 입이 딱하니 벌어졌다.
“노…노사, 대협께서는 어찌…아니, 무엇을 알고…아니…대체 누구시길래….”
“그들이 어찌 죽었는지 네 놈은 아는가 모르는가?”
“네? 네?”
“백룡문의 액룡조에 부소저가 찔려 죽은 것을 알고나 있는게냐?”
순간, 왕보휘의 얼굴에서는 핏기라고 찾아볼 수도 없었다. 사내는 액룡조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뭔가를 알아챈 것 같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태세는 한심하다는 듯 왕보휘를 쳐다보다 숨을 고르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내가 지금까지 며칠 안 되는 시간동안 알아낸 것이 이만큼 이니라.”
노인이 두런대는 소리는 잔디밭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고, 고요한 호수 위의 고요한 섬은 모든 비밀을 감싸고 은밀하게 두 사내의 대화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당태세의 짧은 말이 끝나자 왕보휘는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멍한 표정이 되어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네놈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겠느냐?”
“제가…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당태세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냐?”
“네?”
“미안하거나 슬프지 않으냐?”
“물론 슬프고 한스럽습니다. 하지만 결코 제가 한 일은 아닌지라….”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노인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를 드러내고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맥락없는 노인의 독백이 무릎 꿇은 왕보휘의 귀를 매섭게 파고 들었다.
“내가 칼을 뽑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다. 어찌 이런 구차한 자의 피를 볼 뻔하였는가.”
왕보휘는 당태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쳐들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대협, 저는 이번에 기권할 것입니다. 그리고 황소저를 데리고 소주를 떠나겠습니다.”
“허?”
“진심입니다! 소소저와 그 집안의 일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변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부소저의 일 역시 그저 제가 못나 여인을 죽였다 자책하였지요. 하지만 이소저의 일은…솔직히 저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긴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야반도주라도 해서 살아남겠다는 게냐?”
왕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이 일을 겪었는데, 어찌 제가 또 연애하는 이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이 여인마저 모친의 손에 잃는다면 저는 아마 더는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당태세가 물끄러미 왕보휘를 바라보니, 사람이 줏대없고 자신밖에 모르는 것 같았지만 지금 품고 있는 연심(戀心)만큼은 절절한 듯 보였다.
당태세는 슬쩍 호기심이 동하여 한마디를 더 물어보았다.
“네가 야반도주를 하면, 그 다음에는 뭘 먹고 살 것인데?”
“집안의 패물을 훔쳐서라도 나가야지요! 궁벽한 산촌에서 조촐하게 둘이 산다면 어찌 못 살겠습니까?”
당태세는 잇새로 한숨과 실소가 동시에 새어나왔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왕보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멸과 동정이 같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당태세는 슬쩍 이마를 누르더니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왕보휘에게 말했다.
“…오냐, 오냐! 내가 네 청을 들어주마. 너를 비무초친에서 떨어뜨려 주겠다.”
“감사하옵니다!”
“대신, 조건이 두 개 있다.”
왕보휘가 눈을 크게 뜨고 당태세를 쳐다보는데, 당태세는 손가락 하나를 펴며 조용히 말했다.
“첫째, 비무에서는 네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여라. 네놈이 전력으로 덤비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
왕보휘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당태세는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
“두 번째는 네가 비무에서 진 다음, 이 섬으로 내가 명하는 것을 득달같이 가져오라. 비무가 끝나고 내가 너를 만나러 이곳에 올 테니, 너는 그 물건을 가져와서 내 앞에 보이라.”
“그 물건이 무엇입니까?”
당태세가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이르자, 왕보휘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는 의외로 왕보휘가 선선히 제안을 수락하자 눈살을 찌푸리며 왕보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노인의 독백은 화사한 섬의 경치에 어울리지 않게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철선군자 왕양성, 자네는 구차하게 살아남아 실패한 인생을 살았구나.”
순간, 당태세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노인의 눈에 광채가 빛나더니 슬쩍 뒤쪽을 노려보았다.
당태세의 행동에 왕보휘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빼고 기웃거리는데, 당태세는 청년의 행동을 저지하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소문주는 어서 배를 타고 이곳을 떠나거라.”
“무슨 일이십니까?”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너부터 없애리라.”
“아…알겠습니다!”
기에 눌린 왕보휘가 화급하게 자리를 벗어나 숲속으로 몸을 빼는데, 당태세는 몸을 빙글 돌려 왕보휘가 사라진 곳의 반대편 초목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울창하게 우거지지 않은 관목과 나무 사이로 일단의 형체들이 일렁이며 당태세가 서 있는 잔디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태세는 그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목괴를 단단히 옆구리에 붙이고 서서 다가오는 이들을 오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당태세를 향해 다가오는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얀 변발을 어깨 아래로 늘어뜨리고 청, 백, 황의 장포를 두른 노인들이었는데, 그들의 손에는 기다란 장도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당태세가 그들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오랫만이오. 백룡삼교(白龍三蛟).”
황의의 노인이 당태세의 인사에 예를 갖추며 정중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백룡문의 늙은이들이 순천문주를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태세는 노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또 다른 사내를 보며 목례를 하였다.
“다시 보는구려. 종리천호.”
“다시 보게 되었소이다. 당문주.”
백룡삼교의 뒤에 서 있던 종리세리가 당태세를 보며 짧은 인사를 던졌다.
당태세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웃을 일이 많은 날이었다.
기분이 쾌(快)하여 웃을 일이 많은 것이 아니라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어 터지는 웃음들로 가득 찬 날이었다.
“보아하니 소문주를 미행해서 따라온 것이로군.”
“이미 본가에서부터 소문주의 거동이 수상쩍다 하였소. 우리에게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나가시는 경우는 드문 일이니까.”
황포사내의 말을 청포사내가 이어받고 침중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지난 비무 때 무명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본 사람이 꽤 있었지. 아무래도 뭔가 일을 그르치실 것 같더니만 결국 이렇게 되는군.”
“당태세가 조만간 나올 것이라는 말씀을 이 천호에게 들었지. 낌새가 안 좋아 같이 동행할 것은 권유드렸는데…이런 대어가 낚이는구먼.”
백포노인의 말에 당태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네 사람을 둘러보다가 이를 드러냈다.
“대어 같은 소리. 정말 쓸모없는 늙은이들이로다.”
“뭐라고?”
“그대들이 다 큰 사내 하나를 어린아이로 만들어 지금 이 사달을 내놓은 거 아니더냐!”
당태세의 말에 황포 노인이 당태세를 노려보면서 씹어뱉듯 말을 내던지며 인상을 썼다.
“당문주. 그대가 왜 백룡문의 내규에 간섭을 하려 드시는가? 어찌되었든 내주께서 추살령을 그대에게 내리셨으니 오늘 그대는 이 섬 외의 다른 뭍을 밟지 못하리라!”
종리세리는 슬쩍 인상을 쓴 채 당태세를 바라보는 중이었고, 백룡삼교들은 이미 도포를 젖히고 자신들의 도를 꺼낼 준비를 한 상태였다.
당태세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알겠다는 듯 노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공들에게 편도가 아니라 왕복으로 뱃삯을 지불했길 바라네. 배가 빈 채로 돌아가게 생겼구나.”
당태세의 말과 함께 네 사람은 말없이 자신들의 도를 칼집에서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