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강남 소주 (15)
거센 파도와 같은 하루가 지나간 뒤, 객잔의 아침은 조용하기만 하였다.
어제까지 소주 전역을 들끓게 했던 비무초친의 이야기는 하루가 지나자 끓는 물이 식듯 잠잠해지고, 무사태평하고 조용한 일과가 시작되고 있었다.
머리가 듬성듬성 올라온 중년 사내가 이발사에게 머리를 밀고 있었고, 여인들은 서로 재잘대며 아침 찬거리를 준비했다. 아침부터 바람하나 없는 하늘은 무더운 하루를 예고하였지만 아직 오전 나절은 견딜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당태세는 다리의 쇠 의족을 풀어놓고 침상 아래 넣어둔 뒤였다. 아무리 돌아간 다리를 제대로 돌려놓고 뜀박질과 발구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신기한 보철(補綴)이었지만 쓰지 않을 때는 풀어놓는 것이 다리에 무리를 주지 않는 것 같았다.
해도침옹 양중일의 처리 이후 뒤틀린 발에는 점점 힘이 붙고 발가락도 움직일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동안의 단련과 틈틈이 하는 연공으로 근육도 다시 붙는 중이었다. 이제 의족을 차고 있으면 별도의 지팡이가 없이도 완벽한 보행이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태세 혼자만이 간직해야 할 비밀이었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숙부님, 어제는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일찍 들어오신 모양이던데요.”
아룡이 불쑥 객잔의 방을 들어오더니 당태세에게 문안인사를 올렸다.
소주에 온 뒤로 아룡은 아예 죽이 맞는 사람들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을 무슨 취미처럼 하고 돌아다녔는데, 대체 경비를 얼마나 쓰고 다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하나뿐인 피붙이 조카를 돌보는 심정으로 입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 근방을 돌면서 이것저것 봤느니라. 너는 비무초친을 봤느냐?”
“아, 그럼요! 어제도 불꽃튀는 명승부가 벌어졌지요!”
아룡이 씩 하니 웃어보이자 당태세는 덩달아 아룡의 미소에 맞장구로 함박웃음을 선사하였다.
“그래! 돈은 많이 땄느냐? 누구에게 걸었는데?”
당태세의 말이 아룡은 고개를 저으며 재미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제가 돈을 건 사람은 이(二)번인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번에 돈을 걸어서 그리 큰 재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저런, 원래 도박이라는 것은 확률이 낮은 쪽에 돈을 넣어야 나중에 크게 버는 것 아니냐?”
“그렇긴 해도 어차피 이번 도박은 누가 소문주랑 싸우느냐에 걸려 있거든요. 어차피 결승은 소문주가 올라갈 테니 그 적수를 찾는 것에만 돈이 걸립니다.”
“소문주는 결승까지 올라간다고?”
“당연히 올라가겠죠. 그래야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막말로 위장군 댁 같은 명문이 어디 뭐하는 지도 모르는 싸움꾼에게 자기 딸을 준답니까. 백룡문에 딸을 주겠지.”
아룡의 말이 대부분 소주 성민의 마음과 진배없을 것이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슬쩍 한 구석에서 뭉클대는 호승심까지 억누르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혹시 누군가가 소문주를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는 거냐?”
아룡이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실소를 지어보였다.
“아니, 그런 짓을 누가 한단 말입니까? 세상에.”
“자기 실력 하나만 믿고 진짜 위소저만 생각하는 바보 멍텅구리가 있지 않겠느냐?”
아룡은 슬쩍 턱을 매만지며 눈을 위로 뜨고 고개를 갸웃대더니만 이내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생각이 없을까요. 다음에 소문주하고 붙는 인간이 좀 모자라 보이는 인간 같긴 합니다만 그 정도로 눈치없지는 않을 겁니다.”
“모자라 보인다고?”
당태세의 표정이 굳어지고 언성이 조금 높아졌지만 아룡은 당태세의 표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예, 좀…이상한 사내가 하나 있긴 합니다. 복면 쓴 권사인데 싸우는 거 보면 동네 주먹질하는 수준이거든요. 그런데 용케 운과 때가 맞아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습니다. 대충 이정도 올라왔으면 이제 겁이 덜컥 나겠지요. 자기 실력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온 데다 훨씬 더 유명한 백룡문 소문주가 붙는데 다리가 떨리는 게 당연하지요!”
“그래, 더 말해 봐라.”
“그런데 백룡문 쪽에서도 슬쩍 뭔가 미끼를 주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맨 첫날 본 거 있잖아요? 그렇게 돈 몇 푼주면 그 친구 아마 소문주에게 얻어맞고 가면 벗겨지고는 쓸쓸히 퇴장당하는 순이겠지요. 제가 안 봐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십분 입니다.”
끄응 하며 당태세가 잠시 속이 안 좋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구먼. 결국 소문주는 올라간다는 거고.”
아룡은 당태세가 드디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한다는 듯 짧게 한숨을 쉬더니 숙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룡은 당태세가 조용히 입술만 움직이며 욕을 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
사시(巳時: 09:00-11:00)무렵, 긴 대나무 죽장을 하나 손에 쥔 노인 하나가 태호 북쪽에 있는 대장간을 방문하였다.
노인은 슬쩍 주인 없는 공방을 둘러보다가 건너편 창고 앞에 앉아있는 아이에게 동전 한 닢을 쥐어주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이는 노인에게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더니 대장간 뒤쪽에 있는 작은 집 안으로 노인을 인도하였다.
노인은 허물어질 것 같은 작은 문으로 들어가 소년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소년이 노인을 안내한 곳은 의외로 커다란 공간이 있는 집터였는데, 그곳에서는 갓 만든 것 같은 농구와 작살, 어구가 걸려있었고, 작은 선반 위에는 도검과 작은 날붙이들도 놓여 있었다.
야장이 따로 차려 놓은 비밀 작업장이 분명했다.
“노사께서 북경 무명수가 부탁한 물건을 인도받으실 분이오?”
어느새 노인의 뒤에는 야장 이국맹이 서 있었다.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국맹은 쓰다달다 말없이 그에게 기다란 나무 괴(拐)하나를 가져다주었다.
겉은 나무로 되어 있었지만 들어보니 꽤 묵직한 맛이 있었고, 가볍지는 않았지만 손에 잘 감기는 것이 무게중심을 잘 맞춰놓은 듯 보였다.
“부탁한대로 만든 전당괴요. 자단으로 겉을 만들고 속에 철을 박아 넣었소. 겨드랑이에 끼는 괴의 맨 윗부분은 끝에 쇳덩이를 박아넣었지. 그걸로 사람 머리를 곡괭이처럼 찍으면 머리가 박살날거요.”
노인은 슬쩍 괴의 윗부분을 만져보더니 맘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괴를 직접 받쳐 끼고 몇 번 걸음을 걸어본 뒤에는 좋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협의 솜씨가 좋긴 하구려.”
“자, 잠깐. 잠깐만!”
이국맹이 슬쩍 당태세의 얼굴과 손, 그리고 자신이 건넨 전당괴를 같이 살펴보더니만 눈이 둥그래져서 말을 걸었다.
“설마, 노사. 노사가 북경 무명수인 것은 아니시겠지요?”
“목소리를 듣고도 모르는가?”
당태세의 손에서 휙 하니 번쩍이는 것이 이국맹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확하게 은 한냥의 돈이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의 이국맹을 바라보던 당태세는 흡족하다는 듯 새로 만든 괴(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소 닷새만에 나온다기에 품질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그대는 거의 구야자(歐冶子)의 헌신이구려.”
“……닷새동안 밖에도 못 나가고 오직 그 지팡이 하나만 만들었는데 뭐가 대단하다고….”
당태세는 대답대신 괴를 잡고 슬쩍 움직이며 괴로 창을 대신해 휘둘러보았는데, 노인의 작은 투로 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괴에서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국맹은 자신이 만든 지팡이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좋구먼. 손에 착착 감기오.”
당태세가 흡족해하는 표정을 짓자 이국맹은 슬쩍 미소를 짓더니 지팡이를 가리켰다.
“그 가운데 튀어나온 단추를 눌러보시오.”
“뭐요?”
“날붙이를 넣어 달라 하지 않았소. 괴의 주둥이 아래를 잡고, 그렇지. 거길 잡으면 뒤쪽에 작은 단추가 있을 거요. 그걸 누르면….”
순간, 괴의 한 가운데가 쩍하니 갈라지며 하얀 백광(白光)이 뽑혀 나왔다.
예리하게 갈린 세도(細刀)가 천천히 괴를 칼집삼아 그 안에서 밀려나오니, 한자 세치 정도의 날이 날린 소도(小刀)가 튀어나왔다. 소도가 빠져나간 전당괴 역시 한자 세치가 줄어들어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단괴가 되어 있었다.
이국맹이 그를 보더니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정도면 원하시는 물건이 되었는지 궁금하구려.”
“……소도와 단괴라. 운용방법이 무궁무진하지. 이거 참 대단하구먼. 이 칼날 부러지진 않겠소?”
“이 태호를 누비던 어부들의 낚시바늘과 작살을 모아 만든 날이오. 최소한 용왕은 죽이지 않았어도 살겁(殺劫)에 찌든 쇳덩이들이지. 칼로 쓰기엔 부족함이 없을 거요. 부러지지도 않고.”
“그 낚시바늘에 소씨 집안의 물건도 있으려나?”
“……그 이야기도 들어 알고 계시오?”
“그 죄는 업보를 받아야 할 자들이 응당 받을 거요.”
당태세의 말이 끝나자 이국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아무쪼록 원하시는 바 일을 행하시길 바라오. 무명수.”
“그러리다.”
“그리고 내 벗 누이의 원한도 같이 갚아주시오.”
이국맹과 당태세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야장과 손님은 더 나눌 말이 없었다.
노인이 괴를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야장터의 밖으로 걸어나갈 때 자리에 떨어진 것은 한 자루 긴 죽장밖에 없었다.
야장 이국맹은 어둠 속에 주저앉아 밝게 빛나는 문으로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
여전히 태호의 물은 잔잔하고 잔물결조차 일지 않았다.
긴 지팡이를 손에 쥔 노인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로 작은 배를 몰고 들어가자 밝게 빛나는 호수 가운데 긴 자취가 만들어졌다. 노인을 태운 어부는 매화도라는 지명을 잘 알지 못하였고, 섬을 찾아가는 데만 반 식경이 걸렸다.
“미시(未時)까지 보자 하였는데 내가 더 늦겠구먼.”
가까스로 노인이 탄 배가 태호의 망망대해 가운데 놓여있는 작은 섬을 발견했을 때, 이미 작은 배 한 척이 그 섬에 정박해 있었다. 노인은 새로 받은 목괴의 단단함과 무게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섬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좁은 섬은 커다란 저택 하나 정도의 크기였지만 울퉁불퉁한 바위 대신 정갈한 잔디와 기이한 나무들이 자라는 곳이었다. 아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도원경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섬의 한 가운에 푸르게 자라나는 잔디밭 위에 청년 한 사람이 뙤약볕 아래에 공손히 시립한 채 자신이 부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백룡문 소문주 왕보휘였다.
“북경 무명수의 전인(傳人)되십니까.”
“내가 바로 그로다.”
순간 왕보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지만 이내 젊은 청년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생각 외로 담백할 뿐 아니라 언행에 무게가 있는 사내였다.
“백룡문의 왕보휘, 무명수 노사를 뵙습니다.”
“네가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 어차피 비무에서 만나게 될 것인데.”
불문곡직, 칼로 요혈을 찌르듯 질문을 던진 당태세를 보며 왕보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숙이 숙이더니 조금 전과 다름없는 침착한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제가 다음 시합에서 기권을 할 것이니 도와주십시오.”
“뭐라고?”
당태세는 눈을 끔벅이며 앞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