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타뢰대 (7)
검은 포증의 얼굴을 뒤집어 쓴 당태세가 견대모 등순과 자리를 좁히며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발은 정확하게 등순의 왼발 앞으로 나갔고, 그와 함께 당태세의 일권이 다리와 허리의 힘을 이용해 강렬한 발경을 내밀었다.
견대모 등순의 오른손이 앞으로 내려오며 철비박(鐵臂膊)의 수로 들어오는 당태세의 정권을 쳐올렸다. 순간, 견대모 등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태세는 순식간에 철비박에 걸리려는 정권을 회수하더니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섬전 같은 연타가 내쏘기 시작했다. 강권이 아닌 쾌권이 순식간에 등순의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졌다.
등순이 재빨리 양손을 움직이며 당태세의 재빠른 주먹들을 막고 튕겨내며 자신의 두 손을 모아 한꺼번에 양 주먹을 옆으로 쳐 올리는 순간, 당태세의 발 하나가 앞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이게 무슨….”
순간, 당태세의 팔꿈치가 강렬한 일격과 함께 밀려 들어왔다. 견대모 등순의 파자권에 비길 만한 강렬한 주타(肘打)였다.
쾌(快)의 권에 대비하던 등순의 몸이 일순간 휘청하더니 들어오는 당태세의 일격을 가까스로 팔뚝으로 막은 채 반격을 하려 하였지만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제 이타가 날아들었다.
당태세는 교묘하기 짝이 없는 권보를 쓰며 견대모의 호흡을 빼앗고 있었다.
느리면서도 호흡을 갈무리한 당태세의 정권은 말 그대로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강권이었다.
자신의 철비박을 사용해 튕겨내었지만 밀려나는 반탄력에 하마터면 등순은 자신의 중심을 내어줄 뻔 하였다. 순간 당태세의 좌권이 같은 형상으로 등순의 가슴팍을 향해 들어왔다.
이번에는 등순도 정신을 차리고 두 팔을 겹치고 쌍비박의 형상으로 팔을 위로 튕기고 그 사이로 자신의 팔꿈치를 밀어 넣으려 하였으나 그 순간 짧게 당태세의 우권이 다시 휘어져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등순은 재빨리 당태세의 팔을 피하며 한 발을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다시 당태세의 발이 하나 앞으로 들어오며 순식간에 권형(拳形)이 변화하였다.
순식간에 등순의 사방을 압박하던 강기(剛氣)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당태세의 양손이 다시 수도(手刀)로 변하여 강권으로 막고 있던 등순의 철비박을 뚫고 들어와 어깨와 옆구리의 요혈을 찍었다.
순간 등순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비틀대고 한쪽 다리가 무너졌다. 당태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당태세의 발이 다시 앞으로 밀고 들어오며 방위를 밟고 권을 내리려는 순간, 등순의 발이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당태세가 다시 한 발을 더 깊숙히 밀어 넣으며 두 손과 무릎이 동시에 등순의 몸을 밀었다.
이를 악문 견대모 등순의 눈이 번득이며 몸을 틀었다.
등순이 무릎에 이어 태산이 무너지듯 쏟아지는 당태세의 고법을 왼 어깨로 막아내고 두 손을 뻗어 폭포처럼 위에서 떨어지는 당태세의 쌍장을 막아내었다.
그와 함께 견대모 등순의 몸이 이번에는 틈을 주지 않고 당태세의 몸을 향해 바짝 붙어서 팔꿈치와 주먹을 연속해 타격을 날렸다.
첫 번째 타격을 열십자로 손을 모아 막아낸 당태세의 몸이 모처럼 뒤로 밀리는 순간, 등순은 온몸의 탄력을 한 손에 모아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혼신의 일권을 앞으로 뻗었다.
실로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없는 철초였다.
이 기세의 권이라면 자명하게 북경 무명수의 십자권을 뚫고 들어가 상대방의 명치를 적중시킬 터였다.
그 순간, 등순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두 손을 십자로 엇갈려 막고 있던 흑가면의 손이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러더니만 흑가면의의 왼손이 자신의 권을 잡고 그 돌진력을 축 삼아 몸을 자신에게 바짝 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등순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공수의 전환이 감쪽같고 강유(剛柔)의 전환이 번개 같은 인물은 생전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무명수의 오른 팔꿈치가 눈으로 잡지도 못할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자신의 태양혈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때 등순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왼손을 올려 머리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이미 등순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무명수의 팔꿈치보다 느렸다는 것을.
“이 얼마나 박력있는 한판인가! 승자는 북경 무명수!”
멀리서 아련하게 파도소리처럼 들려오는 관중들의 환호성과 외침이 조금씩 커지며 하얗게 탈색되었던 하늘의 색깔이 다시 푸른빛으로 돌아왔다.
등순은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머리가 멍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가 눈을 다시 깜박이고 푸른 하늘을 다시 쳐다보았을 때, 시커먼 손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왔다. 검은 가면을 쓴 사내의 손이었다.
“좋은 공부였소. 견대모.”
그제야 등순은 자신이 비무초친에서 패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 외로 마음은 덤덤하였다. 그는 오늘 또 다른 하늘 하나를 보고 또 다른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등순의 손이 천천히 뻗어 올라 흑가면 북경 무명수의 손을 잡았다.
“좋은 공부로 식견을 넓혔습니다. 무명수.”
비틀대며 견대모 등순이 몸을 일으키자 관중들은 다시금 하늘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었다. 실로 장쾌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승부였다.
하지만 단 한 명, 단상 위에 곱게 앉아 칠보 비녀를 장식하고 청록의 단삼을 우아하게 차려입은 미부의 얼굴에는 불쾌함만이 가득해 보였다.
여인은 다시 노인들을 불러들였고, 노인들은 여인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고 슬쩍 복면을 쓴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단상의 아래쪽에는 그들이 속삭이는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관복입은 무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검은 가면 속의 당태세 역시 타뢰대를 빠져나가며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
무대 안과 밖의 배우들은 모두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난 이제 가 봐야겠소이다.”
“어서 가시구려.”
부후경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만면에 웃음을 지어보이며 당태세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비틀대며 비무장을 빠져나가는 부후경의 뒷모습을 보던 당태세는 아무쪼록 그가 의자에게 무사히 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직 비무는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늘의 마지막 경기. 백룡문 소문주의 경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상대는 다름아닌 호둔조(虎鈍爪) 하운병이었다.
상대방이 사형문에서 보낸 자라면 쉽게 소문주가 이길 것이었고, 그가 사형문과 관련이 없다면 제대로 된 무위를 선보일 터였다.
그 순간, 당태세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공기가 어느 순간 일변한 것을 알았다.
이미 탈락한 사람들은 모두 비무대 밖으로 나간 상태였고, 그의 주변에 남아있는 자는 예봉취 백심주와 광탄사 무삼군 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의 시선은 지금 당태세에게 꽂혀 있었다.
“참으로 훌륭한 공부십니다. 어디서 가르침을 받으신게요?”
긴 도포자락을 날리며 여인 같은 미소를 머금은 광탄사 무삼군이 슬쩍 당태세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사내의 목소리는 하염없이 부드러웠지만 눈웃음 속에는 서늘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북경에서 내려오는 가전이오.”
“무슨 일로 이 소주까지 오신게요?”
“옛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소이다.”
“그런데 왜 가면을 쓰신 것이오?”
그때, 타뢰대에서 두 선수의 소개말이 시작되었다. 장환한 백룡문 소문주의 소개에 비해 호둔조 하운병의 소개는 실로 짧고 간략하기 그지 없었다.
별달리 백룡문도에게 소개를 준 것도 없고, 지금까지 올라오면서 보여준 무위도 그리 인상적인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엄연히 여덟 명 중의 하나로 올라온 사람인데 자신의 공부가 특별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도 희한한 일이었다.
십중팔구는 자신의 무위를 숨기고 있거나 운이 좋아서였을 것인데, 운으로 올라올 만큼 만만한 대전은 아니었을 터였다.
당태세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는데 집중하려는 순간, 뒤에서 광탄사의 끈덕진 물음이 그를 불러 세웠다.
“아쉽소이다. 소생과의 대화가 그리 재미없으시오?”
“저 호둔조라는 이의 무공을 보고 싶을 뿐이오.”
“호둔조가 올라올 것이라 믿으시는 모양이구려?”
당태세가 타뢰대에서 눈을 떼고 광탄사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반대지.”
당태세의 눈이 다시 타뢰대를 향했다.
이미 그곳에서는 소문주와 하운병의 비무가 벌어지는 중이었고, 두 사람의 권각이 얽혔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둔(鈍)자 별호를 사용하는 이들은 용력이 뛰어나고 맹렬하여 공성장(攻城將)의 위치와 같다고 들었소이다. 헌데 지금 호둔조는 자신의 공력을 다 내어보이지 않고 있구먼.”
당태세가 고개를 돌려 광탄사를 바라보자 광탄사는 지금과 다른 기묘한 표정으로 가면 속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나긋나긋한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치 맹금이 먹잇감을 노려보는 듯한 매서운 눈길을 당태세에게 보내는 중이었다.
“광(光)자 별호처럼 화려하지 않고, 예(銳)자 별호처럼 빠르지는 않아도 충분히 무섭고 두려워해야 할 권인데 말이오. 안 그렇소.”
“……그대가 오히려 무섭고 두렵구려. 북경 무명수.”
광탄사의 붉은 혀가 더 붉은 입술을 비집고 나와 뱀처럼 입주위를 맴돌다 다시 사라졌다.
“어디까지 무엇을 알고 계시는 걸까? 그 정도까지 안다면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아실 것인데.”
이것은 호둔조가 사형문의 일원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여덟 명 중 남은 네 명은 사형문이 둘, 소문주가 하나,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당태세가 하나였던 것이었다.
아마 당태세의 자리는 철염라 손고해가 맡기로 했던 곳일 터였다.
광탄사 무삼군이 슬쩍 고개를 쳐 들자 지금까지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예봉취 백심주도 슬쩍 몸을 돌리고 이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더는 참견하지 마시구려. 북경 무명수. 그대가 누구에게서 청부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소문주는 당연히 결승에 올라가야 해. 그리고 위소저와 혼인도 해야 하지. 그게 목표니까.”
“광탄사 그대는 실로 도인이군. 거짓말을 못하니.”
당태세의 말에 광탄사는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사의 눈빛에는 싸우면 기필코 끝을 보고 살업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호승심과 살기가 같이 담겨 있었다.
“알아듣기를 바라오. 그대가 현명하다면 말이야.”
“미안하군. 나는 위소저를 차지하고 싶어서 말이야.”
“죽을 것이네.”
“얼마든지.”
그 순간,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지며 백룡문도의 일성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환호성 뒤에는 백룡문 왕보휘의 이름이 같이 나오고 있었다. 당태세는 가면 뒤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렇게 소문주는 자신이 올라갈 길 까지 올라온 것이다.
“화려한 초식과 강맹한 일격! 소주일공자가 결국 소주제일미를 찾아가는가! 승자는 백룡문의 청운룡(靑雲龍) 왕보휘!”
백룡문도의 말이 끝나자 무삼군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당태세를 지나쳐 타뢰대로 올라갔다. 그의 뒤를 이어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예봉취 백심주도 당태세를 지나 타뢰대를 향하였다.
일순간, 당태세와 백심주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였다.
예봉취 백심주의 고요한 눈빛과 은근히 밀려오는 무형의 기운이 당태세에게 확신을 갖게 하였다. 결승에 나가 서게 될 인물은 예봉취 백심주였다.
“만장하신 성민 제중들이여! 이 자리에 올라온 네 명의 걸물을 보시오! 가히 만부부당의 권사들이니 어찌 소주의 자랑이 아니겠소! 이들이 이제 사흘 후 이곳에서 비무초친의 마지막을 겨룰 두 명을 뽑게 될 것이오!”
네 명의 사내가 타뢰대에 올라 예를 취하자 백성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답으로 올라왔다.
당태세 역시 묵묵히 두 손을 모으고 환호에 답하여 자신과 싸우게 될 백룡문 소문주 왕보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단상에서 한 명의 무리가 같이 타뢰대로 올라와 올라온 이들에게 치하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 비무초친을 주최한 백룡문의 사내들이었다.
당태세의 바람과는 달리, 백룡문주는 끝까지 이 회합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결승에서 모습을 나타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당태세 자신이 찾아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훌륭한 무공을 보여주시니 참으로 감사하군요.”
그 순간, 기척을 죽이고 미끄러지듯 다가온 한소군 도려진의 얼굴이 사내의 앞에 놓였다.
여인은 나이를 먹었지만 젊은 시절의 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예전과 똑같은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도저히 장성한 사내를 둔 어미로는 보이지 않는 용모였다.
“내가 아는 이들의 무공이 얼핏 보인 것 같은데……착각이겠지요?”
당태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면 사이로 슬쩍 고개를 숙이고 묵례를 했을 뿐이었다. 도려진은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자신도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속삭이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용은 후회를 한다고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여인은 말을 남기고 다시 아들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타뢰대를 빠져나갔다. 당태세는 멀어져가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때를 놓치는 것도 어리석지만 때를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은 더 미련한 짓이었다.
“……때는 분명 올 것이니.”
그때, 갑자기 그의 앞으로 한 사내가 다가오더니 당태세에게 불문곡직 말을 걸기 시작했다.
“북경 무명수 대협, 대협께 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태세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그는 다름 아닌 백룡문 소문주, 청운룡 왕보휘였다.
“혹시 내일, 잠시만 따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라고?”
“태호의 매화도에서 미시(未時)에 뵙는 것으로 해 주십시오.”
재빠르게 말을 마친 왕보휘의 몸이 마치 바람에 뒤집히는 꽃잎처럼 훌쩍 무대위에서 몸을 돌리며 타뢰대를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당태세는 멍하니 사라진 사내의 자취를 쫓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