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타뢰대 (6)
“조각배 하나에 인생을 맡긴 풍운아가 소주의 하늘을 넘보는구나! 출신이 비루하다 얕보지 말라. 내 권에 천하를 담겠노라! 일격필중(一擊必中) 풍운노도(風雲怒濤)! 무량촌의 소감녕 양청!”
백룡문도의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훌쩍 타뢰대 안으로 뛰어든 젊은 청년은 떡 벌어진 어깨만큼이나 성격도 화끈한 듯 무대 한 가운데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괴성을 질렀다.
사내가 쩌렁쩌렁 사방을 울리는 포효(咆哮)를 뿜어내자 모여있던 관중들도 손을 흔들어대며 사내의 호연지기에 화답하고 있었다. 소감녕이라 불린 사내도 씩 미소를 지어보이며 관중에게 팔을 흔들었다.
“한 사위 춤이 끝나면 장사가 쓰러지네! 천하의 오묘한 술수 한 몸에 모였으니 가히 이것은 비전(秘傳)중의 비전이라! 악양에서 건너온 무쌍독무(無雙獨舞) 광탄사 무삼군!”
순간, 타뢰대를 뒤흔드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실로 지난 비무때 천외천의 신기를 보여준 금나수의 귀재, 광탄사가 호한 쾌걸과 맞붙게 된 것이었다.
머리를 곱게 기른 광탄사 무삼군은 여전히 여인같이 고운 미소를 흘리며 상대를 바라보았고, 상대 역시 이를 드러내고 울끈불끈 드러낸 팔뚝에 힘을 잔뜩 주고 비무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성이 안 좋구먼. 이건 보나마나 광탄사의 승리인데…….”
당태세는 팔짱을 끼고 두 사내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감녕 양청의 권은 권사의 체형이나 기수식을 봐서 짐작컨데 쾌속 발경의 강권을 쓰는 유형이었다.
호쾌하게 적수를 분쇄할 수 있는 극강의 권이라면 어디에도 밀리지 않겠지만 상대가 광탄사라면 손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당태세가 보기에 광탄사의 금나수는 자신이 젊은 시절 강호에서 만났어도 쉽사리 승부를 점찍지 못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금나수와 솔각은 더 강해질 것이다.’
당태세가 그곳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백룡문도의 손이 땅으로 향하며 비무 시작을 알렸다.
아니나 다를까, 소감녕 양청의 발이 쾅 하니 타뢰대를 구르고 손을 죽 앞으로 펴더니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대로 일직선으로 광탄사를 향해 일권을 날렸다. 양청의 성격이 다 보이는 일직선의 호쾌한 권법이었다. 당태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맙소사.”
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양청의 몸이 타뢰대에 메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오고 곧 이어 양청의 기합소리가 다시 타뢰대에 울려 퍼지자 더 큰 환성이 울려 퍼졌다.
당태세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넌더리를 치며 실눈을 뜨고 밖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누워있던 양청이 다시 일어서며 주먹을 더 힘차게 치켜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무삼군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양청을 보고 있었다.
아마 소감녕은 쓰러질 때마다 더 강맹한 공격을 발할 것이고, 그만큼 더 힘을 모으면 광탄사는 차력(借力)을 이용하여 소감녕에게 더 큰 충격을 줄 것이었다.
광탄사의 보법은 충실하게 수비에 치중되어 있었고, 저 뜻은 들어오는 공격은 무조건 술기를 걸어 날려버리겠다는 표시였다. 하지만 소감녕 양청은 그런 상대방의 의도는 무시해버리고 강권을 날릴 게 분명했다.
“한 다섯 번 정도 태질 당하면 끝나겠구먼.”
당태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태세는 슬쩍 가면 위의 이마를 누르더니 다시 한탄 같은 짧은 소리를 내었다.
“열정으로 모든 걸 해낼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
당태세의 예견보다 빨리, 소감녕 양청은 타뢰대에 네 번 등이 떨어지고 나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공격은 악문 잇몸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혼신을 다한 노도 같은 일격이었지만 이내 그 권도 광탄사의 손아귀 안에 잡히자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온몸이 땅과 만나는 타격이 되어 돌아왔을 뿐이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소감녕 양청을 바라보던 백룡문도 역시 질린다는 듯 광탄사를 돌아보더니 관중들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승자는 악양의 광탄사 무삼군!”
당태세는 그 말에 팔짱을 풀고 쓰고 있는 가면을 고쳐 썼다. 이제 자신이 나갈 차례가 된 것이었다. 비무초친 팔인의 경기는 벌써 반이 끝나 있었다.
***
“잘 싸우시오.”
당태세의 뒤에서 익히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봉취에게 패한 뒤 누워있던 부후경은 아직도 무대 뒤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기둥을 붙잡고 간신히 서 있었는데, 몸 상태를 보면 어서 의자에게 달려가는 것이 순리였다.
“아직도 안 가고 뭐하는 게요. 이제 부대협에게 볼 일은 끝났을 테니 백룡문도 그대를 건드리지 않을거요만.”
부후경은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대협이 경기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갈 거요.”
“뭐?”
“대협이 이번 비무에서 이기면 다음번에 대협은 백룡문 소문주과 비무를 하게 됩니다. 소문주는 어차피 결승까지 올라갈 계획일 테니 말이오. 내 말이 틀렸소?”
“그렇겠지.”
부후경이 당태세의 말에 일그러진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비무가 결국 백룡문 소문주의 발목을 잡을 승부요. 난 꼭 승부를 알고 싶단 말이외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부후경을 바라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끝내고 와야겠군.”
당태세는 성큼성큼 타뢰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높은 타뢰대 위로 올라서자, 모여있던 관중들은 모두 검은 가면을 보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그를 보고 있던 백룡문도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청중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드디어 나왔소이다! 이름을 묻지 말라! 내역도 묻지 말라! 오직 내 쾌권을 보고 말할지라! 내 이름은….”
“북경 무명수!”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합창이 백룡문도의 입을 대신해 터져 나왔다. 검은 복면의 사내가 주먹을 위로 올려보이자 사람들의 외침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무대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백룡문도는 신이 난 듯 옆에서 조용히 서 있는 사내를 가리키며 관중에게 질세라 큰 소리로 표호하듯 외치며 상대를 소개하였다.
“또 다른 비무자가 가면의 판관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어찌 물건만의 이름이랴! 아직까지 한 번도 파훼된 적 없는 철옹성의 권법! 동문 일번각의 견대모(堅玳瑁) 등순!”
소개가 끝나자 키가 작달막하면서도 어깨와 팔이 큰실하게 생긴 사내가 당태세의 건너편에 자리 잡았다.
짧은 목에 긴 수염, 그리고 튼튼해 보이는 다리와 등은 영락없는 거북이가 사람으로 탈바꿈한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그가 쓰는 권법의 형을 모르더라도 뚝심 하나는 있을 것 같은 외형이었다.
“별호가 대모(玳瑁: 바다거북)라니, 대체 무슨 권법인가.”
당태세가 자세를 잡고 등순과 시선을 교환하자 백룡문도는 우렁차게 비무 시작을 알렸다.
비무개전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상대방의 권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 다가섰다.
견대모 등순은 먼저 주먹을 내지 않았고, 당태세 역시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며 쉽사리 발을 뻗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석상처럼 그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관중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누가 먼저 움직여 선공을 거느냐에 모든 시선이 맞춰져 있었다. 당태세는 등순이 결코 먼저 선공을 내밀지 않으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공역습이 주특기라? 그렇다면 장단에 맞춰 줘야지.’
당태세가 먼저 호흡을 멈추고 그대로 앞으로 나가며 경쾌하게 주먹을 뻗어내었다. 순간 등순이 반족장을 뒤로 빼며 가슴 앞에 모았던 손을 아래로 내리며 들어오는 당태세의 주먹을 그대로 퉁겨내었다.
순간, 당태세는 깜짝 놀랐다. 사내의 뿌리치는 손에 실린 힘도 어마어마하거니와, 팔뚝에 맞고 퉁겨나온 당태세의 권에 찌르르한 통증까지 전해져왔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등순의 두꺼운 팔은 구릿빛으로 빛나는데 육안으로만 봐도 단단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철비박(鐵臂膊)의 수법인가?’
당태세는 재빨리 권을 회수하고 팔을 바꾸어 좌우 쌍권으로 등순의 태양혈을 동시에 가격했다.
그 순간, 등순은 자신의 두꺼운 팔을 위로 뻗어 올려 머리를 감싸는가 싶더니만 그대로 당태세의 팔을 빗겨내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를 울릴 정도의 발구름을 시전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태세의 눈이 커지며 바로 의족 낀 오른발에 힘을 주고 온 몸을 재빨리 회전시켜 정면에서 벗어나는데, 등순의 몸이 앞으로 쏟아지며 조금 전까지 당태세가 있던 곳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뻗어 올렸다.
짧은 공간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의 권격을 가슴에 맞았다면 그대로 갈비뼈가 다 부러졌을 것이다.
흑가면은 한발 물러서며 다시 자리를 잡았다. 지금 앞에 있는 자는 사형문 못지 않는 초절한 권사가 틀림없었다.
‘느린 것이 아니다. 철비박으로 수비하며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가 강맹하게 출수하여 일격에 파괴한다.’
당태세가 자세를 풀고 등순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눈동자를 깜박이던 등순은 무슨 영문이냐는 듯 흑가면을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그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정중하게 물었다.
“그 강맹한 일격, 파자권(巴子拳)이오?”
순간, 등순의 눈이 깜박이더니 두 손을 모아 예를 취하였다. 당태세가 감탄하며 자신도 예를 취했다.
”옛 하북의 파자권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미 대가 끊긴 줄 알았는데 이 권이 소주에 내려와 있단 말인가? 감개가 무량하오!”
당태세가 말을 잇자 등순은 눈을 다시 깜박이더니 뿌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상대의 찬사에 공손하게 화답하였다.
“소생의 공부를 아는 것을 보니 무명수께서는 식견있는 권사십니다.”
등순은 웃으며 예를 취한 손을 풀더니 다시 주먹을 쥐고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타뢰대에서는 오직 승부를 가름할 뿐이니 무례를 용서하시길.”
“피차 마찬가지요.”
두 사람은 조금 전의 화기애애한 기운은 어디론가 날려버리고 다시 자세를 잡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등순의 선공이었다.
등순의 굼떠보이는 몸이 슬쩍 앞으로 튀어나오는 듯 하더니만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를 거짓말처럼 미끄러지듯 날아와 일권을 당태세에게 날렸다.
실로 거북이라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는 매서운 공격이었다.
들어오는 공격을 팔로 걷어낸 당태세가 몸을 돌리며 팔꿈치로 등순의 어깨를 찍는 순간, 등순의 두꺼운 팔이 당태세의 팔꿈치를 튕겨내고 다시 몸을 돌려 자신도 팔꿈치를 당태세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당태세의 권이 장으로 변하며 무겁게 돌진하는 등순의 일격을 막아내었다.
등순은 다시 강맹하게 발을 구르더니 이번에는 온 몸의 힘을 다하여 어깨로 당태세를 쳐 올리는데, 실로 공성퇴가 성문을 쪼개는 듯한 형세였다.
당태세는 두 손과 허리를 사용하여 들어오는 등순의 고법을 받아 힘을 옆으로 뿌리치며 보법을 밟으니, 순간 등순의 공격방향이 틀어지고 당태세의 몸은 물 흐르듯 돌아 등순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관중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오는 순간, 당태세의 손이 번개처럼 날아가며 등순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당태세는 눈이 둥그래지며 다시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상대의 방향을 간파한 등순이 자신의 두꺼운 팔을 옆구리에 붙이더니 들어오던 당태세의 권을 모두 튕겨내고 다시 돌진하며 일격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공수일체가 따로 없구나. 좋은 공부로다!’
당태세는 견대모 등순이 비무초친의 여덟 명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할 실력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펼쳐보는 좋은 비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당태세는 저 멀리 휘장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부후경의 용태가 생각났다. 더 이상 시간을 쓸 수가 없었다.
“별로 쓰고 싶지는 않지만 이거 어쩔 수가 없구먼.”
당태세는 슬쩍 두 다리를 짧게 벌리고 다리에 쇠추가 달린 듯 느리고 무겁게 발을 떼며 등순을 향해 전진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북경 무명수의 투로가 바뀐 것을 알아 챈 등순 역시 다시 자세를 잡으며 전진해오는 당태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단상 위에서 두 사내의 비무를 살펴보던 한소군 도려진의 표정에서도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건 견정문의 팔보천괴권(八步天壞拳)…….”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번득이더니 화사하던 얼굴에 표독한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여인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설마, 당태세. 네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