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18화 (118/226)

118. 타뢰대 (5)

화려한 운하 앞의 누각과 흐르는 강물 위에도, 건물 뒤의 음습한 골목과 어두운 담벼락 뒤에도 어김없이 새 날이 찾아오고, 다시 날이 밝았다.

어느새 비무초친은 팔인(八人)의 고수로 좁혀진 뒤였고, 오가는 사람들의 흥분은 갈수록 높아졌다.

최소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좋으나 싫으나 나름대로 무위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었으니, 구경 나온 사람들은 각자 좋아하는 참가자를 응원하느라 서로 말다툼을 벌이고 쌈박질을 하는 것도 예사였다.

물론 개중에는 사람들에게 판돈을 걸고 흥망을 점치는 사람들도 꽤 있었으니 실로 사자림 앞은 커다란 시장바닥과 다를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백룡문이 머리 하나는 잘 썼습니다. 최소한 백룡문이 소주에서 어떤 위상인지를 이 비무초친 한 번으로 알려줍니다그려.”

흑가면 당태세는 부후경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럴 의도일 것이다.

소군 도려진이 원한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당태세도 알 수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억척스러운 여인이었다. 진흙탕에서 검을 휘둘러 적의 숨통을 끊는 데 스스럼이 없으면서도 일이 끝나면 깨끗하고 치장하고 사람들 앞에 고고함을 나타내 보이길 즐기던 여걸이었다.

그 당시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하게 보였건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왜 이리 맡기 싫은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인지 당태세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은 그것이 사람의 문제인지 세월의 문제인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평(評)하는 당태세 자신도 타인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모두가 중간에 멈출 생각이 없음이지.”

사회를 맡은 백룡문도가 천천히 타뢰대 위로 올라가는 것이 휘장 사이로 보였다.

이번 비무초친에서 가장 즐거워 보이고 가장 말을 많이 한 이 백룡문도는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활기찬 표정과 목소리로 만장한 관중들을 보며 사자후를 토해내었다.

“소주의 선량한 성민들이여! 하늘 아래 고귀한 공경대부들이여! 드디어 비무초친의 세 번째 날이 되었소이다! 오늘 여러분 앞에 나설 참가자들은 수많은 도전자들 중에서 송곳과 같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여덟 명의 준걸이오!”

사내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모여 있던 관중들의 함성이 하늘을 울렸다.

폭풍과 같은 환성이 한 차례 사방을 휩쓸고 지나가자 백룡문도는 빙그레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백룡문도가 이 자리를 즐기고 있는 건 명백했다.

“그럼 오늘의 첫 비무를 시작할 것입니다. 늘 첫 번째로 타뢰대를 밟는 사나이! 화살처럼 권을 쏘고 질풍처럼 각을 내민다! 적수가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무적의 권! 예봉취 백심주!”

사내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학처럼 기다란 사내가 긴 팔과 다리를 흔들며 타뢰대 안으로 들어섰다.

마른 듯 보이지만 언뜻 온 사이로 비치는 팔과 다리의 근골은 결코 사내가 말라깽이가 아님을 알 수 있었고, 어기적대며 걷는 듯 보이는 보법도 충실하게 사형문의 투로를 밟고 있었다.

당태세가 한눈에 보더라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어지간히 세(勢) 불리(不利)하면 일어나지 마시오.”

부후경을 바라보며 당태세가 속삭이듯 말하자 부후경은 슬쩍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란이 되어 바위에 내던져질 지언정 어찌 사내가 그렇게 살겠소.”

“부대협!”

“내가 끝까지 올라가지 못하면 대신 내 원한을 갚아주오.”

당태세가 말없이 타뢰대로 향하는 부후경을 바라볼 때, 타뢰대 위에서 호쾌한 백룡문도의 소개가 이어졌다.

“이어 나오는 참가자는 다름 아닌 동문(東門)의 쾌걸! 꺾이지 않고 밟히지 않는다! 누가 나의 적이 될 소냐! 와권의 부후경!”

부후경의 소개는 실로 짧고 담백했다. 관중들의 외침을 들어봐도 부후경을 응원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열이면 여덟아홉은 예봉취를 응원하는 소리였는데, 부후경은 고스란히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의 앞에 있는 예봉취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팔짱을 낀 채 신음을 내었다.

“비무 개전!”

백룡문도의 손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과 동시에 부후경의 몸이 무대를 박차고 몸이 한 자루 화살이 되어 튀어나갔다.

사내의 이가 악물리며 두 손이 가슴부터 비틀리며 백심주의 가슴을 꿰뚫어버릴 기세로 뻗었다.

순간 예봉취 백심주가 껑충한 다리를 들더니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허공을 걷어찼다. 아니, 허공을 걷어찬 것처럼 보였다. 순간 들어오던 부후경의 몸이 그대로 붕 뜨더니 무대 바닥에 등부터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봉취의 다리는 자세를 제대로 잡기도 전에 뻗어나가 들어오는 부후경의 옆구리를 걷어찬 것이었다. 그것도 설맞은게 아니고 정확하게 요혈을 때린 상태였다.

부후경은 지독한 고통에 허리를 뒤틀며 몸을 벌레처럼 구부렸다 피는데, 이를 악문 사내의 입에서는 신음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당태세는 휘장을 젖히고 앞으로 나가려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부후경이 다시 훌쩍 재주를 넘으며 정권을 쥐어 보였기 때문이다.

상대를 내려보던 백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부후경을 항해 다가왔다. 마치 뱀을 노리는 황새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부후경의 이가 부드득 갈리더니 재빠르게 다리를 뻗어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정권을 망치처럼 휘둘렀다.

하지만 예봉취는 슬쩍 몸을 뒤로 피하며 부후경의 권을 피하였고, 부후경은 연이어 주먹과 팔꿈치를 사용하며 예봉취를 밀어 붙였지만 예봉취는 이번에도 슬쩍 몸을 틀며 부후경의 권과 주(肘)를 피하였다.

당태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후경의 와권은 더할 나위없이 강맹하고 일격에 사태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예봉취 백심주의 움직임은 이미 부후경의 동작을 상회하고 있었다.

예봉취는 아예 부후경의 권을 한 대도 맞지 않겠다고 작심하고 무대에 올라온 듯 보였다.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부후경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지만 예봉취 백심주의 호흡은 주인의 표정만큼이나 절제되어 있었다.

“길게 못 가겠군.”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부후경의 몸이 그대로 붕 떠 뒤로 날아가더니 개구리 같은 모습으로 펄썩 엎드린 채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당태세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백심주의 다리가 부후경의 가슴팍을 차버린 것이었다.

“보통 각법이 아니다.”

일반인이 힘을 줘 발을 찼다면 등부터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지금 부후경은 맞은 자세 그대로 배를 바닥에 깔고 떨어졌으니, 이는 내공을 실어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듯 발을 놀렸다는 소리였다.

그대로 바닥에 누웠던 부후경은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무릎을 꿇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사내의 찡그린 얼굴과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은 지금 부후경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소리를 질러 부후경에게 비무를 포기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부후경은 비틀대며 일어서 타뢰대의 바닥 위에 다리를 붙이고 허리를 폈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다시 입을 다물고 팔짱을 꼈다. 저 정도 각오라면 어차피 각오를 굳혔다고 봐야 했다.

부후경은 가슴에서 손을 떼고 두 손을 뻗어 자신의 앞에 도도하게 서 있는 예봉취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사내의 얼굴은 이미 땀에 젖어 있었고 가볍게 다리까지 떨리고 있었지만 쉽게 무릎을 꿇거나 졌다고 말할 것 같지 않았다.

예봉취 백심주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슬쩍 다리를 움직여 부후경과의 거리를 벌리는데, 부후경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이라도 붙은 듯 백심주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를 쫓고 있었다.

당태세가 봤을 때 부후경은 단 한 번의 권격을 밀어넣을 거리를 재고 있었다.

그 거리 안에서 일격을 쏘아붙이고 승부는 하늘에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 거리에서의 일격, 오직 부후경이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였다. 하지만 백심주가 그런 부후경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당태세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로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부후경와 예봉취의 발이 조금씩 앞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부후경의 입이 벌어지고 이가 드러났다.

순간 발이 땅을 박차고 부후경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땅을 찬 발이 그대로 하늘로 솟구쳤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부후경은 땅을 박차며 튀어올라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예봉취의 얼굴을 선풍각으로 휘저었다.

하지만 예봉취의 몸은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처럼 가볍게 부후경의 발을 피하여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오른발을 학처럼 들어올려 그대로 부후경의 태양혈을 찍어버렸다.

그때였다. 착지하며 중심을 잃은 듯 옆으로 비틀대던 부후경이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며 들어오는 예봉취의 발차기를 피하고는 여세를 몰아 예봉취에게 굴러왔다.

예봉취의 얼굴에 처음으로 묘한 기색이 올라왔다. 부후경은 땅바닥에 누운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두 발을 뻗어 예봉취의 발을 걸었다.

순간 예봉취는 펄쩍 학이 날 듯 두 다리를 하늘로 뛰운 채 뒤로 물러서는데, 부후경 역시 몸을 가볍게 퉁겨 일어서며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양손의 연격을 날렸다.

사람들의 입이 활짝 벌어지는 순간 부후경의 주먹 끝이 예봉취의 가슴팍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거기까지였다. 일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부후경과 예봉취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기다란 예봉취의 우수가 권이 되어 부후경의 가슴에 먼저 닿아 있었고, 부후경의 팔은 예봉취 백심주의 가슴에 일촌의 간격도 못되게 떨어져 있었다. 당태세는 입술을 깨물고 지그시 혼잣말을 읊조렸다.

“저 녀석의 진짜 장기는 권(拳)이구나.”

당태세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쾌권이었다.

어느새 부후경의 입에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사내의 무릎이 꺾였다.

부후경은 눈을 뜬 채로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앞으로 쓰러지는데, 예봉취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세를 바로 잡고 관중들을 둘러보자 일제히 관중석에서는 천둥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것이 인간의 솜씨인가! 절묘하고 두렵도다! 오직 귀신의 눈에 보이는 권이로다! 승자는 사형문의 예봉취 백심주!”

예봉취 백심주가 말없이 타뢰대에서 내려오고, 백룡문도들이 두 팔과 두 다리를 붙잡고 부후경을 타뢰대에서 끌어내리는데, 당태세는 슬쩍 그들 옆으로 가 부후경의 안색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심맥이 뛰고 호흡이 불규칙하였지만 생명에는 다행이도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 손속에는 정을 둔 모양이군.”

예봉취 백심주가 당태세의 말을 들었는지 슬쩍 부후경과 흑가면을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조금 뒤 부후경의 초점 나간 눈이 되돌아오고 허공을 바라보더니 당태세를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사내의 입에서 지친 목소리가 나왔다.

“어찌 되었습니까?”

“한 대도 못 때리고 신나게 두들겨 맞았소.”

“제기랄.”

“내상을 입었고 심맥도 다쳤소. 몸을 조리해야 하오. 그냥 놔두면 무공을 쓰지 못할게요.”

“이제 쓸 곳도 없는 무공이요. 나 같은 놈 살아서 무엇하겠소.”

부후경의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워있는 사내의 몸이 가볍게 떨리는데 검은 가면을 쓴 사내는 누운 사내를 물끄러미 보더니 그의 손을 잡고 조용하지만 힘 있는 소리로 말을 건넸다.

“맹세는 내가 지켜주겠소.”

부후경의 눈이 가면 속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형형한 빛이 번득이는 검은 가면 속의 눈동자는 죽은 누이를 잊지 못하는 오라비의 눈을 같이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끝까지 보고 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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