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강남 소주 (12)
늦은 저녁.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등롱이 걸리고, 물길 좌우로 도열해 있는 누각들에 등불이 달렸다.
시커멓게 흐르는 강물은 거울이 되어 또 다른 등불을 물 위에 띄우는데, 여기저기 꽃등을 단 배들이 조용히 다리 아래를 흘러가고 사람들은 화려한 조명 아래를 웃으며 지나다니니, 가히 소주의 아경은 밤과 다른 아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간이 따로 나지 않아 이렇게 번잡한 곳에서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천호께서도 그 정도는 아량을 베풀어 주시겠지요?”
지금 백룡문의 내주, 한소군 도려진은 작은 주루의 이층 전체를 빌린 뒤 비단 보료를 등 뒤에 대고 앉아 운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예의 청의 무복을 입고 앉아있는 종리세리가 있었다.
능라비단으로 만든 여인의 화려한 의복은 가볍고 얇아 몸의 굴곡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는데, 능라비단의 위에 걸친 얇은 비갑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지는 않겠다는 표시 같았다.
밤이 깊자 한소군 도려진의 표정은 더욱 다양해지고 고혹적으로 변하였는데, 실로 등불 아래 흔들리는 그림자가 없었다면 사람의 혼을 빼앗으러 출현한 요얼(妖孼)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저를 이 야심한 밤에 보자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백룡문주께는 말씀드렸습니다만 내주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무엇이지요?”
종리세리는 백룡문주와의 대화 때와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게 즉답하였다.
“순천문주 당태세가 살아있습니다.”
순간,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도려진의 표정이 칼로 도려낸 듯 사라졌다. 마치 희로애락의 감정이 애초에 없는 듯한 한기(寒氣)도는 껍데기만이 남아있는 듯 보였다.
여인은 물끄러미 종리세리의 얼굴을 노려보다 정신이 든다는 듯,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과거지사에 대해서는 이미 백룡문주께 전해 들었습니다.”
여인은 애써 짓고 있던 미소가 무너지지 않게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요. 문주께서는 정직하고 담백하시니까요.”
“당태세는 원한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지금 소주까지 내려오며 네 개 문파의 문주들을 모두 살해했습니다.”
순간 도려진의 입술이 아래로 쳐지며 일순간 턱과 뺨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여인의 눈썹이 한데 모여 구부려지며 미간에도 깊은 고랑이 파였다.
순간 처절한 표정을 지은 여인의 얼굴엔 영락없는 세월의 풍상이 드러나 보였다.
“그를 알려주려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이리 뜸을 들이셨나요? 문주께 말씀을 전했다지만 제게도 말을 해주실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었을 텐데요.”
종리세리는 등불 아래 드리운 여인의 그늘진 얼굴을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하였다.
“첫 번째는 부군께 말을 들었을 것이라 생각들었고”
“저와 문주는 공적인 사안 외에는 말을 나누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지요.”
종리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문주께 진상을 듣고 개인적인 조사를 해 봤습니다.”
“조사?”
도려진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종리세리는 여인을 바라보다 슬쩍 눈을 돌려 누각아래 펼쳐진 화려한 소주의 아경을 쳐다보며 흘러가는 어투로 말하였다.
“순천문주 당태세에게 죽임을 당한 네 문주는 모두 자신의 지역에서 각종 치부를 드러내며 간악한 짓을 해 오던 이였습니다. 혹여 그런 일에 백룡문도 관련이 있는지. 혹시 비리나 범죄사실이 있다면 당태세가 청부를 받는 것이 아닌지 연관해서 조사를 하는 중이었지요.”
“그러셨습니까?”
도려진이 새빨간 입술을 뻐끔대며 보료에 기댔던 몸을 슬쩍 일으키는데 종리세리는 눈을 끔벅이고는 어깨를 들썩였다.
“백룡문은 전혀 해당이 없더군요. 전공(戰功)도 있을 뿐더러 명망도 높은데다 문주 두 분의 세평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 다행이네요.”
한소군 도려진의 얼굴은 어느새 고혹적인 용태의 미부로 돌아와 있었다.
여인의 은은한 미소는 여전히 보는 사람을 아찔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오히려 종리세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처음 그를 봤을 때보다 더욱 강렬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종리세리는 여인의 눈길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비무초친도 꽤나 인상 깊었습니다. 고수들도 꽤 보이더군요.”
“꽤 괜찮은 준재들이지요. 소주에 그런 이들이 많으니 앞으로도 외적의 침략에 방비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 황제폐하의 성덕이지요.”
“그래서 아드님도 내 보내신 겁니까?”
“나가도 된다고 판단했으니까요.”
“어차피 그게 목적이셨군요.”
종리세리의 말에 도려진은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이 되고 명망이 있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짝을 찾아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천호께서도 자식이 있다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여인은 이제 완연히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찻잔을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여인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하얀 치아가 불빛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그 아이는 내 모든 것이예요. 백룡문의 모든 것이자 미래지요.”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비무초친에 어느 정도 방향을 잡아 줬어요. 그냥 조금, 떳떳하지는 않지만 죄라고 불릴만한 과정은 아니에요. 이것도 천호께서는 불편하신가요?”
“그 정도는 눈감을 수 있습니다.”
여인은 만족한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짓더니 이내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여인은 종리세리를 보더니 고개를 들고 슬쩍 눈을 아래로 흘겨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싸늘하게 고압적인 목소리가 영롱한 꾀꼬리소리처럼 흘러나왔다.
“당태세라면 잡졸들을 붙여 드려봤자 통하지 않아요. 제 호법 셋을 보내드리죠. 그들이라면 천호님과 함께 당태세를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처리?”
“살인자는 참하는 것이 지엄한 국법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여인의 반짝이는 눈빛은 종리세리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인의 눈에 담긴 빛은 유혹이라기보다는 강권에 가까웠다.
작은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며 여인의 얼굴을 화사한 미녀와 시커먼 그림자로 번갈아 바꾸고 있었다.
“우리 호법 셋은 예전부터 순천문주 당태세를 알던 이들이예요. 투로(鬪路)와 초식도 알고 그의 버릇도 알지요. 게다가 적당하니 음습한 소주의 골목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때를 봐서 소리소문없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어요. 만약 필요하시다면 대낮에 참하실 수도 있고요.”
종리세리는 말없이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불빛은 점점 환해지고 운하 건너편의 기루에서는 청아하고 처량한 곡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기(歌妓)가 손님들을 불러 놓고 흥을 돋우러 부르는 노래인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종리세리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그 방법이 제일 합리적이군요. 내주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현명하신 판단이에요. 제가 다른 것을 도와드릴 것은 없나요?”
종리세리는 고개를 저으며 웃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과분합니다.”
“완벽한 게 낫지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한 가지 실수를 빼고 말입니다.”
“실수?”
“제가 아직 사람 보는 눈은 미숙하군요.”
한소군의 표정이 갑자기 얼음같이 굳었지만 종리세리는 여인의 변하는 표정을 보지 못하였다는 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목례를 하고 바깥으로 나섰다.
여인은 사라지는 종리세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슬쩍 하얀 이를 드러내었지만 다시 바깥의 풍경을 보며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여전히 도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의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여인 앞의 촛불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문제를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늘 찜찜한 일이 일어나.”
날 선 한마디를 뱉은 여인은 흔들리는 등불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꺼버렸다.
***
“어제는 웬일로 술까지 드시고 들어와서 주무신 겁니까? 이 소주가 좋긴 한가봅니다. 숙부님도 취하실 때가 있고 말이죠.”
아침 늦게 일어나 머리를 두들기고 있는 당태세를 보며 아룡이 웃자 당태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후경과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 피혁장 곽일지에게 돌아가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 말술이 되었던 것이다. 당태세는 아픈 머리를 흔들며 자신을 자책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살수(殺手)들이 대놓고 횡행하는 소주의 거리를 술 먹고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무척이나 술이 마시고 싶었던 날이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회한에 잠겨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술을 먹게 되니 한없이 먹게 되더구나. 옛 시절 생각도 나고 옛 친구 생각들도 나고 그랬던 모양이야.”
“숙부님은 좋은 추억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한때는 좋은 추억이었는데 지금은 좋게 남아있는 것이 없구나.”
노인의 웅얼댐은 아룡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독백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아룡은 기운 내라는 듯 당태세의 어깨를 슬쩍 주무르더니 껄껄 웃으며 당태세를 내려다보았다.
“숙부님, 늘 제가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얼마나 즐길 것이 많은 데 과거지사로 침울해 계십니까? 좋은 걸 보고, 좋은 걸 듣고! 내가 젊다고 믿으면 육신도 젊어지는 겁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머리는 왜 검게 물들이신 겁니까?”
“아…하하. 백발이 되는 게 한스러워서 먹물과 재로 잠깐 칠해봤는데….”
아룡은 괜찮다는 듯이 씩 웃으며 당태세 앞에 앉아 손뼉을 짝 치며 히죽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바로 그겁니다! 그렇게 하나씩 젊게 살겠다고 마음먹으시면 또 압니까? 다리가 다시 좋아지실지도 모르잖습니까?”
“오냐, 나도 기운을 내야겠다. 그래 어제 비무초친은 재미있었느냐?”
당태세가 이야기를 꺼내자 아룡은 씩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거 오랜만에 볼만한 구경거리였습니다. 비무에 나온 사람들의 격이 높더군요. 내일은 어제보다 더 검증된 사람들이 모여서 경기를 할 것이니 더 재미있을 겁니다. 숙부님도 같이 보시지요!”
당태세는 되었다는 듯이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웃음을 짓자 아룡은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거 참, 숙부님이 싫다니 강권을 하지 않습니다만 후회하실 겁니다. 이미 소주 전역은 모두가 비무초친 이야기만 나오는 상태라고요. 이미 참가자들에게 돈까지 걸어놓은 상태라니까요?”
“그래? 너도 조금 걸었느냐?”
아룡이 당태세의 말에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이래뵈도 촉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의 승자는 맨 처음 대결한 이(二)번이 마지막 삼십이번 백룡문 소문주와 붙게 될 겁니다.”
“그 둘이 가장 세단 말이렷다?”
“아무래도 가장 센 것은 이번이고 백룡문주는 최소 마지막 네 명까지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주최측인 백룡문인데 그 정도 혜택은 주겠지요.”
당태세는 아룡의 말을 들으면서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래 바닥에서 도박을 하는 놈들도 세상 돌아가는 판을 읽고 있구나. 백룡문의 이름을 걸고 그 정도까지는 올라갈 것이라 누구든 예측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장원할 가능성이 없더냐?”
“흠…십삼 번이 볼만했던 것 같고, 이십칠 번도 볼만했던 것 같습니다. 이십삼 번도 꽤 세어보이긴 하더군요. 하지만 이번이 제일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어? 뭔가 특이하다던가?”
“그 정도가 전부인데요?”
당태세는 뚱한 표정으로 아룡을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룡이 무슨 일이냐는 듯 당태세를 쳐다보자 당태세는 스읍하고 잇새로 공기를 들이마시더니 씩 웃으며 아룡을 바라보았다.
“승부라는 것이 어찌 보이는 대로만 가겠느냐. 개중에 위로 갈수록 돋보이는 실력도 있겠지.”
“하하, 숙부님도 경륜이 있지만 백타에 관해서는 제가 보는 능력이 더 낫단 말입니다. 나중에 보십시오. 제가 그래도 여행 경비 정도는 벌충할 만큼 두둑하게 따 올 테니 말입니다!”
아룡이 씩 하니 웃음을 지어보이며 방을 나섰다. 벌써 술자리 친구와 약속을 한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최소한 향락을 위해서라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는 아룡의 근면성을 보며 당태세도 슬슬 몸을 일으킬 시간이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바쁘겠구먼.”
당태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침상 아래 숨겨두었던 철제 의족을 끄집어내었다. 오늘 그는 소주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으러 갈 참이었다.
아무도 알 지 못하고
알고 있더라도 숨기고 있는 이야기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