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강남 소주 (11)
네 사람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순간에 어깨로 대문을 들이받고 허름한 관제묘 안에 동시에 뛰어들었다.
화려하고 사람많고 돈 많기로 유명한 소주에도 흉가와 빈집은 남아있는 법이었는데, 지금 당태세가 불문곡직 뛰어든 관제묘도 폐가에 가까웠다.
근처 사당에 제를 올릴 사람이라도 끊겼는지 관성대제의 상과 그 앞의 제단은 먼지가 하얗게 내려와 있었고 처마 위에는 큼지막한 거미줄까지 쳐진 상태였다.
세 사람은 반사적으로 몸을 붙이고 등을 돌린 채 삼면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당태세는 옷보따리를 꿰어 들고 온 지팡이를 빼들었고, 이국맹은 자신의 전대 안에서 긴 단도 두 개를 뽑아 들더니 한 자루를 부후경에게 전해주었다.
세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바깥에서 들려오던 발소리는 흔적도 없어졌는데, 무더운 여름 오후의 고즈넉한 사당은 적막감 사이로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침입자들은 모두 벽 뒤에 숨은 채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이국맹은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고, 부후경은 입을 꽉 다문 채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오직 당태세만이 여유롭게 사방을 관조하며 적들의 살기가 어느 쪽에서 어디로 흐르는 지를 감지하고 있었다.
“왜 안 치고 들어오는 거야. 이것들…….”
이국맹이 혀를 날름대며 중얼거리자 당태세는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사내들은 사당 뒤쪽에서 들어올 거요.”
“뭐라고?”
“기척이 모두 북쪽으로 옮겨갔소.”
이국맹과 부후경이 서로를 돌아보고 다시 북쪽을 연이어 바라보는 순간, 사당의 건물 양옆으로 일군의 무리들이 쏟아져 나오며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습격자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긴 박도와 유엽도를 들고 있었다.
이국맹과 부후경의 낯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장도를 상대로 단도를 든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목이 썰리기 전에 자진하는 것 외엔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두 사람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오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박도 두 자루를 세찬 바람과 함께 걷어 올리더니 번개처럼 검수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두 번의 격타음과 비명이 동시에 쏟아지며 박도가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지는데, 검은 바람은 이국맹과 부후경에게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어서 칼을 집고 싸우시오!”
다름아닌 흑가면 북경 무명수였다.
사내는 자신의 봇짐에서 빼낸 지팡이를 검처럼 휘두르며 쏟아져 들어오는 살수들의 가운데로 몸을 들이밀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흑가면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칼질을 아랑곳 않고 지팡이로 온몸을 가리며 감싸는데, 기이하게도 흑가면을 내리치는 모든 칼날이 지팡이와 부딪혀 튕겨나가는 중이었다.
흑가면의 검식은 완벽한 수비를 자랑하며 자신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의 칼을 희롱하듯 퉁기며 자세를 바꿔나갔다.
흑가면은 사방에서 번득이며 그의 목과 심장을 노리는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압도하며 전장을 종횡하였다.
그 모습은 실로 천군만마를 희롱하며 단기로 적장의 목을 따는 효장(梟將)의 강림이요, 멀리 홍문(紅門)에서 초패왕 항우의 진중을 압도한 한장 번쾌의 모습과 같을 지경이었다.
눈앞에서 파천황의 무공을 보고 있는 이국맹과 부후경의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그 와중에도 흑가면 무명수의 눈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뒤를 조심하게! 부대협!”
흑가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부후경이 박도를 들고 자신을 향해 들어오는 적의 칼날을 막아내고 예리하게 빗겨치자 사내의 얼굴이 피가 튀고 살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국맹도 자신의 앞에 있는 도수를 향해 칼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좁아터진 관제묘에서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각자 칼을 들고 적을 향해 유혈낭자한 검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중앙의 당태세가 검은 나무지팡이로 신들린 듯 사방상하를 내리치며 사람들의 손에서 칼을 떨어뜨리고 머리를 박살내는데, 그 양 옆에서는 무후경과 이국맹이 눈이 벌게진 채 그들을 습격하는 적들의 가슴팍에 칼을 꽂아넣는 중이었다.
세 사람이 펼치는 예상외의 분전에 오히려 기가 위축되고 있는 것은 습격자들이었다.
“조심하게!”
어느샌가 질풍처럼 다가온 당태세가 이국맹의 옆으로 들어오더니 이국맹의 옆구리를 노리던 검객의 목을 한 번에 찌르고 몸을 돌려 이국맹의 등을 찌르려던 사내의 목을 후려친 뒤 옆으로 빠져나갔다.
이국맹은 자신의 옆에서 두 사람이 그대로 눈을 뒤집고 넘어지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
그나마 솜씨가 좀 더 나은 부후경은 뒤에 담을 지고 자신의 앞에 있는 이와 접전을 하고 있었으니 최소한 자신의 몸뚱어리는 건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국맹은 자신의 앞으로 들어오는 도수의 목을 향해 칼을 날렸지만 이내, 덩치가 산만한 사내가 옆으로 밀고 들어오며 자신의 몸을 밀치자 속절없이 옆으로 밀리며 발이 헛갈렸다.
“제기랄!”
이국맹이 옆으로 넘어지며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지만 사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앞을 가로막은 시커먼 그림자와 번득이는 안령도가 전부였다.
이국맹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앞이 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국맹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쓰러진 거한과 바닥에 거꾸로 꽂힌 안령도가 전부였다.
“대체….”
이국맹이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그의 뒤에서 그를 노리며 달려들던 살수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손에서 칼을 떨구고 그대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사내의 머리에서는 피가 뿜어 나오는 중이었고 적을 해치운 검은 가면은 나머지 검수들을 소탕하기 위해 중앙으로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이국맹은 멍하니 칼을 늘어뜨리고 서서 채 다섯도 안 남은 살수들이 일방적으로 나무지팡이에 맞아죽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 옆으로 부후경이 얼빠진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와 친구와 함께 북경 무명수의 무공을 바라보았다.
“부형,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거야?”
“……내가 이형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저 자가 사람이오?”
“……내가 이형에게 물어보고 싶었다니까.”
마지막 남은 살수가 어울리지 않는 구슬픈 비명과 함께 관제묘의 바닥에 쓰러졌을 때, 좁은 사당의 정원은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부후경과 이국맹은 지팡이를 어루만지며 다가오는 검은 포증가면을 바라보았다.
공정한 판관 포증은 죽어서 염라대왕이 되었다던가.
이국맹과 부후경은 지금 자신들 앞으로 다가오는 검은 가면이 죄인들을 끌고 가기 위해 지옥에서 튀어나온 명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대협, 이제 대장간으로 갑시다. 가서 나머지 물건 흥정을 해야지요.”
피비린내가 등천하는 사당에서 흑가면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부후경은 질린다는 듯이 흑가면을 쳐다보았고 이국맹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갑시다! 가면서 이야기하는 건 좋은데 대충 견적은 나왔소이다!”
“얼마까지 해 줄 수 있소?”
“보아하니 기병(奇兵)을 만들어달라는 말씀아니오?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기일도 있으니 닷냥은 줘야하오.”
“그건 너무 심하지 않소?”
“원래 야장들은 자기 물건 헐값으로 안 넘기는 게 도리요.”
이국맹은 흑가면을 노려보다가 입맛을 다시고 하늘을 보더니 다시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시 당태세를 바라보는 눈에는 실 웃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대협이 네 목숨을 이 자리에서 네 번을 구해줬지요. 내 목숨 한번이 은화 한 냥이면 너무 헐하지. 좋소. 그냥 은화 한 냥만 주십시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관제묘의 부서진 문을 향하였다.
이국맹과 부후경은 앞장서 가는 당태세를 바라보며 약속이라도 한 듯 길게 한숨은 내쉬었다.
***
“물건은 닷새정도 밤을 새면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때가 되면 돈을 준비해 오시오. 언제든 준비해 놓을 테니.”
이국맹의 대답을 들은 당태세와 부후경이 대장간을 떠난 것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저녁참이 다 되어서였다.
이국맹은 자신의 연장을 챙겨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다른 작업장으로 떠나기로 한 뒤였고, 부후경의 거처인 부가호(傅家戶)까지 당태세가 부후경의 동행을 하기도 한 뒤였다.
이제 노랗게 변한 햇살이 바다처럼 넓은 태호에 반사되어 천하와 사람을 똑같이 노랑색으로 물들이는데, 그 황색의 정경을 뚫고 두 사내는 호숫가의 소로를 타고 갈대숲 사이를 걷는 중이었다.
“부대협의 이야기는 일전에 들은 바가 있소이다.”
“……이젠 무명수 대협이 무엇을 알던 놀랍지가 않군요. 그렇습니다. 제 누이의 억울한 죽음을 보수(報讐)하기 위해 이 비무초친에 나왔지요.”
부후경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고집불통 부사리 같은 성격은 보이지 않았다.
부씨 사내의 얼굴은 슬쩍 웃음도 아니고 찡그림도 아닌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눈을 깜박거리는 남자는 이미 갈대숲이 아닌 지난날의 추억을 되짚어 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어느 부호, 어느 귀족 공경의 영애와 견주어도 꿀릴 것이 없는 아이였소. 우리 가문의 자랑이자 보배였지요. 맨 처음 백룡문 소문주와 만난다하였을 때 내심 그 분별없음에 화도 났지만 배필을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고 속으로는 든든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부후경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지는 해를 바라보며 눈을 한참동안 깜박거렸다.
“그 아이가 실연당하고 뒷산의 회나무에 목을 달았다고 했을 때 나는 미친 듯이 죽은 누이에게 화를 냈지요. 하지만 나중에 시신을 거둘 때 그 가슴에 찍힌 자국을 보고 알았습니다.”
“무엇이 있었소?”
“세끼손톱보다 작은 도흔(刀痕)이었소. 피조차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더군요.”
당태세가 부후경 대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후경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흑가면을 바라보았다.
부후경의 눈에서는 어느새 두 줄기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미 입은 짐승처럼 벌어져 송곳니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하도 궁금하여 사방에 물어보고 다녔지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예전 백룡문의 문하에 있다가 추방당한 늙은 문도 하나를 만나게 되었지요.”
“백룡문의 액룡조(扼龍爪)였소?”
부후경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호수를 바라보더니 연신 고개를 젓더니만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장성한 사내 대장부는 울음을 멈출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누가 죽였는지도 아는데 미련하고 무력한 오라비는 원수의 목조차 끊지 못하고, 원수의 간을 뽑아다 제삿상에 놓지도 못하였소! 그저 생각해내었다는 게 오년 만에 원수가 차려준 밥상위에 올라가 광대짓을 벌이는 것뿐이지!”
“원한은 그대만이 있는 것이 아니오.”
당태세의 말에 부후경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내는 흑가면을 돌아보며 두 손을 깍지 낀 채 눈썹 위로 올리고 예를 취하였다.
“소생 부후경, 무명수 대협에게 구명의 은혜를 입었소이다. 그것도 평생 못 갚을 은공이거니와 제 보수행에 일모(一毛)의 힘이라도 더해주신다면 참으로 대대손손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그대에게 바라는 바요. 내 포한도 그대 못지않게 크니까.”
“그렇습니까?”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된 것처럼 보이는 부후경을 보며 짧게 말했다.
“그 늙은 문도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준 것은 아니구려.”
“네?”
부후경을 바라보는 검은 가면의 눈이 번득였다.
“액룡조는 남자들에게 전해지는 무공이 아니오.”
순간, 부후경의 젖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이 벌어졌다.
사내의 눈이 껌벅이며 흑가면을 쳐다보다 다시 땅을 보며 뭔가를 한참동안 생각하더니만 다시 흑가면을 바라보며 더듬대는 입을 열었다.
“그…그렇다면 그…소문주가 아니라…….”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손속이 차갑고 잔혹했지. 오늘 비무에서 본 소문주의 품성으로는…….”
“맙소사.”
부후경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데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당태세는 너른 호수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있었다.
결국 이 비무초친이라는 것도 여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안배한 것이고, 부씨집안의 참변도 아들을 위해서 벌인 일일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정확한 증거와 본인의 자백이 있어야하는 것이겠지만 당태세는 결코 부씨가문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십칠 년 전 그 때, 그 부부는 개구쟁이 아이를 데리고 있었지. 남편의 기개는 남달랐지만 부인의 근심어린 얼굴은 여전히 내 눈에 생생히 남아 있소. 난 그들의 기개와 협기를 믿었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것이 사람에게는 있었던 게지.”
당태세는 혼잣말을 그치고 부후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러 사람에게 최악으로 남는구먼.”
“무명수 대협.”
“왜 그러시오?”
부후경은 뭔가 생각난다는 듯 당태세를 보며 말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 뿐 아니라 다른 소문도 몇 가지 전해지곤 합니다.”
“뭐요?”
“제 누이가 죽기 전과, 제 누이가 죽은 뒤, 각각 한 집안이 멸문당하고, 한 집안이 고향을 등지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지요. 모두 과년한 딸이 있는 집안이었고요.”
흑가면 안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