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강남 소주 (10)
사방의 환호와 경탄속에 뒤로 돌아온 흑가면 당태세 앞에 부후경과 이국맹이 다가와 잘싸웠다는 듯 어깨를 두들기며 친근함을 나타냈다.
어느새 세 사람은 같이 몰려다니는 형국이 되었는데, 당태세에게 당한 철염라 손고해는 아예 그 길로 나가버렸는지 자취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노형 대단하군. 그 철염라를 이길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이국맹이 거기까지 말하고는 슬쩍 주위를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왜 아까 이 부형하고 나하고 같이 나가라고 말한거야? 뭔가 알고 있소?”
부후경도 옆에 서서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가쁜 숨을 갈무리하며 다른 곳을 보는 척 딴청을 피며 낮은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돈을 받은 사람이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이기게 되면 꼭 누군가가 찾아오는 것 같더군.”
부후경의 낯색이 바뀌며 이국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국맹은 하지만 아직 그게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부대협이야 눈에 거슬리니 당연히 찾아갈 것이고, 돈을 받은 사람이 졌으면 당연히 토해내라고 찾아가지 않겠소?”
이국맹은 그제야 당태세의 말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후경을 쳐다보았다.
“아, 나더러 돈을 내놓으라 이거구먼. 그거 곤란한데?”
“왜, 다 썼소?”
“당연히 받은 날 다 썼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다가 대장간 저당잡히는 날 분명히 온다. 내가 장담하지.”
“허, 부형, 네 염색도가가 먼저 망할거다. 어디서 악담이냐?”
부후경과 이국맹이 티격태격하던 모습을 보던 당태세가 슬쩍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당태세는 이국맹을 보면서 말했다.
“부대협에게 받은 돈도 다 쓴거요?”
이국맹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당태세는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팔짱을 끼고 주변에 다른 이들이 있나 쳐다본 뒤에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비무를 그렇게 짜고 치는 티가 나게 하면 모두가 알아볼 수밖에 없지. 두 사람 중에 더 조심해야 할 사람은 이대협일거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 친구. 자기가 꼭 비무 결승에 올라가고 싶다는 데 어떻게 하겠어? 받은 돈은 그냥 성의표시라고.”
“언제부터 둘이 친구였소?”
“친구는 아니오. 그냥 뭐…좀…긴히 알고 있는 사이지.”
당태세는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부후경이 이국맹을 꺾고 다음 비무에 올라간 팔인(八人)중 하나가 되었으니, 그 다음 상대는 다름아닌 사형문의 예봉취 백심주가 될 터였다.
그리고 당태세가 판단하기에 부후경은 백심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중 백룡문이 습격할 확률이 높은 사람은 이국맹이었다.
‘아무래도 나도 같이 동행해야겠군. 겨우 찾은 야장이 죽어서야….’
그 때, 다시 한번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승자는 동문 일번각의 견대모(堅玳瑁) 등순!”
이십삼(二十三)번 권사가 이십이(二十二)번을 꺾고 팔인에 합류한 것이었다.
당태세의 다음 상대는 이십삼번의 권사가 될 터였다. 짧고 정확하면서 두터운 방어를 구사하는 권사였는데, 당태세가 보기에 저 자는 백룡문의 입김이 들어간 사내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확신은 금물이었다. 당태세가 보기에 이 비무초친은 제대로 된 대회가 아니었다.
“어차피 백룡문이 짜 놓은 판이니…….”
당태세는 새삼스레 자신의 처지도 생각해 보았다. 분명 청부를 받은 게 틀림없었던 철염라 손고해를 자신이 꺾었으니, 당태세 자신도 이국맹이나 부후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최종 승자 팔인(八人)이 확정된 다음에는 분명 다음 대회전에 습격이 들어올 터였다. 지금까지의 과정으로 봤을 때 그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어.”
어찌한다.
당태세는 비무가 끝난 뒤의 동선을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때 타뢰대에서 다시 백룡문도의 함성이 울렸다. 세 번째 비무가 삽시간에 끝나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백룡문도가 호명한 이름에 당태세는 저절로 귀가 쫑긋 서고 말았다.
“승자는 호둔조(虎鈍爪) 하운병!”
순간, 당태세의 눈이 번쩍 뜨이며 타뢰대를 바라보았다. 둔(鈍)자 별호를 쓰는 사내. 이번에도 사형문의 제자인가? 지난 번 정신없던 싸움 와중에는 새겨듣지 않았던 별호였다.
비무를 마치고 휘장 안 대기소로 들어오는 하운병을 바라보았을 때, 당태세는 그의 정체를 반신반의 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니 투실하게 생긴 사내였고 괘 맷집이 좋게 생기긴 하였지만 그의 보법이나 움직임에서 딱히 사형문을 연상할만한 것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가 별호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면 아마 의심이라고는 할 일이 없는 사내였다.
“별호에 둔(鈍)자 들어간다고 모두 사형문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사형문이 아니라는 것을 십분 확신할 수도 없었다.
만약 호둔조 하운병이라는 사내마저 사형문에서 보낸 것이라면 백룡문은 철염라를 비롯해서 네 명 이상의 고용인을 비무초친에 뿌려 넣었다는 것이 되었다. 이정도 숫자에 그 정도 고수들이라면 충분히 승부는 조작할 수 있어 보였다.
“분명 다른 이들도 매수하였을 것이고.”
그 때, 백룡문도의 소개가 타뢰대를 울리며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여느 때보다 백룡문도의 목소리는 힘이 실려 있었고, 소개하는 문구도 다른 때와는 격이 달랐다.
“여러분! 드디어 열여섯 강자 중 하나로 이 사람이 올라왔습니다. 무공은 물론이요 시, 서, 화를 갖추고 용모까지 수려하니 가히 소주일공자(蘇州一公子)! 과연 소주 제일의 미인을 얻는 여정의 끝까지 이 공자가 갈 수 있을 것인가! 모두가 알고 있다! 백룡문의 호남아! 그 이름, 청운룡(靑雲龍) 왕보휘!”
예의 청포를 입은 준수한 청년이 가늘게 길게 땋은 변발을 청포 뒤에 늘어뜨리고 타뢰대에 올라가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나 타뢰대 앞에 자리잡은 아녀자들은 모두가 손을 흔들고 어디서 따 왔는지 모를 꽃잎을 단상 위에 뿌리는데 실로 상승장군의 개선식이 부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왕보휘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자신의 적수를 향해 예를 차린 뒤 바로 백룡문의 기수식을 펼쳤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성품은 나쁜 놈 같지 않은데…….”
그와 싸우는 이십구(二十九)번의 권사 역시 왕보휘에게 예를 갖추고 자신의 권을 준비하였다.
백룡문도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앞으로 향해서 서로를 향해 권을 날리자 군중들은 모두 함성을 지르며 자신이 응원하는 사람을 위해 소리를 지르는데, 청운룡 왕보휘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가면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왕보휘의 무공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탄식과 함께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화권수퇴(花拳秀腿)….”
당태세의 말마따나 왕보휘의 권이 꽃 같고 예쁘기만 하여 효과가 없는 권법만은 아니었다.
소문주의 산룡보(散龍步)는 깔끔하게 방위를 밟으며 몸을 제대로 움직였고, 연이어 상대를 향해 쏘아붙이는 주천미룡권(周天微龍拳)은 정확하게 짧은 단타가 들어갔다.
그리고 번신화룡각(飜身火龍脚)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각법과 퇴법은 예리하게 상대방의 명치를 걷어차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왕보휘가 이긴 것이다.
그렇지만 당태세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권법에 좋은 움직임이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승부에 대한 집착이나 투쟁심 같은 것은 아예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대련도 아닌 연무(演武)에 가까운 동작들이었다.
사형권사들 중 하나와 붙었으면 생사를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요. 하다못해 부후경하고 붙었더라도 악착같은 싸움이 벌어졌을 터였다.
“근기(根氣)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공부를 왜 선보인 건가?”
당태세는 힐끗 단상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 앉아서 끝까지 비무를 보고 있던 종리세리 역시 눈살을 찌푸리고 백룡문 소문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태세는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종리세리를 보며 피식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 이거야 원.”
당태세는 탈의 이마부분을 꾹꾹 누르다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거나 이로써 두 번째 날의 비무초친도 막을 내린 것이었다.
백룡문도의 소개와 함께 마지막까지 남게 된 여덟명의 권사가 타뢰대로 올라가니, 그들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손뼉과 탄성을 지르고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소주의 성민 제중이시여! 이 꽃 같고 범 같은 여덟 명의 걸물을 보시오! 이들이 다시 이틀 뒤에 이곳에서 네 명만을 남기는 비무를 벌일 것이오! 실로 일생에 한 번 밖에 없을 장관을 놓치지 마시오! 누가 소주무장원이 되어 소주제일미를 얻을 것인가!”
당태세는 그와 함께 서 있는 다른 일곱 사람을 훑어보았다.
사형문의 예봉취와 광탄사, 그리고 호둔조가 있었고, 그 옆에는 부후경과 무량촌의 소감녕, 당태세 자신과 이십삼번 견대모, 그리고 마지막에 백룡문의 소문주 왕보휘가 서 있었다. 당태세는 이들 중 마지막까지 올라갈 자는 누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왕보휘는 내 덕에 결선까지는 못 가겠군.’
당태세는 그와 더불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단상의 한소군 도려진과 그 아래 무표정하게 타뢰대를 보고 있는 종리세리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나는 몇 번 더 불청객을 맞이하겠지. 언제쯤 백룡문주 왕양성이 모습을 나타낼 것인가?’
최소한 자신의 아들이 결선에 가기 전에 손을 쓰는 것이 어렵다면 대어(大漁)가 나타나 자신을 노릴 것이었다. 당태세는 지금 그 순간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
“뭐요? 진짜 우리와 같이 길을 가겠다는 거요?”
비무가 파장하고 관중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로 가는 것을 본 뒤 남아있던 부후경과 이국맹은 자신들을 따라오는 당태세를 보며 한 번 더 의중을 물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셋이 모이면 살 확률이 더 높겠지. 이 야장(冶匠)에게 주문도 넣어야 하고.”
이국맹이 당태세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돈만 두둑하게 주시오. 그럼 간장막야(干將莫耶)라도 어떻게든 만들어 드릴 테니.”
“물론, 돈은 드리겠소. 하지만 어느 정도는 내 품삯으로 제해주시오.”
“품삯이라니?”
그 때, 조용히 그들과 같이 동행하던 부후경이 낮은 목소리로 이국맹과 당태세에게 말을 걸었다.
“조용, 누군가 우리 뒤를 밟기 시작했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과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일순간 긴장하는 빛을 띠는 이국맹을 보며 당태세가 다시 말했다.
“두(頭)당 오십전씩은 깎읍시다.”
이국맹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슬쩍 뒤에 있는 부후경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부형, 지금 몇 명 정도 되는가?”
“최소 다섯, 아니 좀 더 많을 것 같군.”
“나 혼자 있을 때 나를 습격한 게 다섯이오. 최소 열다섯은 있겠지.”
당태세의 말에 이국맹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많이 깎아줄 순 없소. 차라리 맞아 죽는 게 낫지.”
세 사람은 저벅저벅 큰 걸음을 걸으며 운하 위의 구름다리를 건너 서쪽의 태호 근처로 방향을 잡았다. 이국맹의 야철장은 거대한 호수 태호의 북쪽 포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간 당태세의 눈빛이 번득였다.
남쪽에서도 일단의 사내들이 그들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못해도 대여섯은 되어보였다. 족히 그들을 쫓아오는 사람들은 스무 명 정도였다. 당태세가 이국맹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만들려는 물건은 넉자 길이의 전당괴요. 재질은 나무가 무난하나 한손으로 휘두르고 칠 수 있을 만큼의 중량 안에서 쇠가 들어가면 더 좋겠소이다.”
“뭐야? 이 상황에서 주문이오? 넉자 전당괴?”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국맹을 쳐다보았다. 뒤를 따라보던 부후경이 다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사내들이 합쳤네. 지금 우리 뒤에 조금 떨어져 있지만 한 스무 명은 되는 것 같네.”
“이런 젠장, 오늘 여기서 맞아죽는 건가?”
이국맹의 한탄에서 아랑곳없이 당태세는 이국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전당괴 안에 날붙이를 넣어줄 수 있겠소?”
“뭐요?”
“주 용도는 걸을 때 목발 대용이지만 필요할 때는 호신병기가 될 것이오만.”
“대체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세 사람은 빠르게 걸음을 걸으며 시가를 빠져나왔다.
어느새 넓은 도로와 담벽의 모임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세 사람의 앞에는 낮은 언덕배기와 그 옆으로 펼쳐진 그림 같은 호수의 정경이 펼쳐지는데, 세 사람은 보폭을 줄이지 않고 반은 걷고 반은 뛰는 듯한 모양새로 부지런히 발을 놀리고 있었다.
그 때, 부후경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뛰어오네!”
“우리도 뜁시다! 어서!”
당태세의 말과 함께 세 사람이 동시에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하는데, 언덕배기 위로 올라가 호숫가로 내려가기 직전, 당태세의 눈에 사방이 담에 둘러진 관제묘(關帝廟)가 왼쪽 비탈길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태세가 나머지 둘을 바라보며 외쳤다.
“관제묘로 갑시다! 저곳에서 승부를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