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타뢰대 (4)
“이 몸이 천한 광대라고?”
손고해가 흑가면 당태세의 말을 듣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사내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번쩍거리는데 실로 어지간히 담대한 자가 아니라면 한 발 뒤로 물러설 정도의 강렬한 투기가 몸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세를 잡고 조심스레 방위를 밟으면서 입을 열었다.
“네놈의 무공은 스승이 누구냐?”
“하! 왜? 내가 수련한 공부가 탐나느냐? 그렇다면 나를 스승으로 모셔라!”
“네가 만들어 낸 무공이냐?”
철염라의 사나운 얼굴에 슬쩍 이가 드러나는데 마치 호랑이가 웃음을 짓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더 이상 말을 물어볼 것도 없었다. 당태세는 자세를 바로 갖추고 철염라의 공격을 기다렸다.
철염라의 몸이 땅을 박차고 일직선으로 뛰어나오며 충권을 뻗고 그 뒤를 이어 매서운 옆차기가 들어왔다.
당태세의 두 손이 엇갈리며 권을 막아낸 뒤 들어오는 옆차기를 슬쩍 다리를 들어 흘려내자 손고해는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권을 연달아 출수하며 당태세의 몸을 뒤로 밀어내었다.
빠르게 찔러 들어오는 권의 파괴력은 생각외로 강하였고, 그를 막아내는 당태세의 손과 어깨까지 진동이 밀려올 정도였다. 철염라의 눈이 번득이더니 순간 뒤에 빠져 있던 오른발이 도끼처럼 휘어지며 당태세의 태양혈을 그대로 걷어찼다.
준비자세가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암기처럼 찔러드는 교묘한 각법이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왼손으로 상대방의 다리를 막으며 어깨를 이용해 상대의 힘을 위로 퉁겨내었다.
그와 동시에 당태세의 발이 전진하며 쌍장을 앞으로 뻗어내니 철염라는 자신의 팔을 이용하여 당태세의 쌍장을 막았다. 하지만 당태세 역시 장에 내공을 실어 타격한지라 철염라의 몸 역시 슬쩍 뒤로 밀려나며 다시 자세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손고해의 표정에서 살기가 사라진 대신 진지한 표정이 되었고 당태세 역시 지금까지 본 손고해의 무공을 머릿속으로 복기하기 시작했다.
철염라 손고해의 무공은 사형문의 무공과는 거리가 있었고 여타 다른 문파들의 무공과도 접점이 없어 보였다.
강권붕각(强拳崩脚)의 권법이야 천하에 널리고 널린 것이겠지만 당태세는 아직 손고해가 쓰는 무공과 같은 부류를 강호에서 만나본 적은 없었다.
“스스로 창안하고 스스로 발전시키는 무공이라.”
아류(我流)를 만들어서 그것을 보완하고 대성시킬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태세의 앞에 있는 철염라 손고해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일종의 사조(師祖)가 아닌가!
싸우는 모습을 보던 관중들 역시 숨을 죽이고 두 사람에게서 펼쳐지는 무공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철염라가 두 번째 시합에서는 신중하군요.”
턱수염을 만지며 중년 사내가 미소를 짓자 옆에 앉아있던 한소군 도려진은 전에 없이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보이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첫 시합보다는 안 풀리는 게 정상이겠지요. 상대편 가면권사도 그만큼 강하다는 말이니까요.”
여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은방울이 구르는 것 같이 청아하였지만 미묘하게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주는 음성이었다.
한편 한소군의 아래 왼쪽 멀리 앉아 권사들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던 종리세리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이 철염라와 북경 무명수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사내는 손고해보다는 북경 무명수의 움직임에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보는 시선이 많으니 쉽사리 움직이지도 못하겠군.’
당태세는 자신의 앞에서 언제라도 권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는 철염라와 단상의 눈빛을 같이 느끼면서 신중하게 보법을 밟고 있었다. 분명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둘은 되어 보였고, 최소 그 중 하나는 과거 자신의 공부를 보거나 알고 있는 이였다.
‘순천문의 무공은 쓰지 않는다.’
틈을 보고 있던 철염라 손고해가 먼저 선공을 펼쳤다.
사내의 몸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좌우의 쌍권과 양발을 휘두르며 당태세의 사방 요혈을 격타하기 시작했다.
당태세 역시 손을 움직이며 들어오는 권을 막고 발을 빼며 몸을 젖혀 매섭게 치고 오는 손고해의 팔과 권을 막아내었다.
손고해의 악문 잇새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쏟아지며 하늘을 쪼개듯 오른 주먹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손고해의 권에는 장(掌)도 없었고 지(指)도 없었다. 수법(手法)또한 없었으니 오직 정권 하나로 모든 것을 박살내려 들었다. 투박하지만 힘이 실려 있으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각법 또한 절묘한 각도에서 사람을 올려치고 내리깎는 묘용이 있었지만 그 속도와 힘에 의한 타격에 모든 것이 맞춰져 있었다.
당태세는 들어오는 권각을 슬쩍 빗겨맞고 피하며 정타를 흘려버리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손고해에게 흑가면이 두들겨 맞는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맷집은 좋아 뵈는데 영 공격이 형편 없구먼.”
“어쩐지 얼굴 가릴 때부터 알아봤네.”
구경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공격일변도의 철염라를 응원하기 시작했고 수세에 몰린 당태세를 야유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함성에 야유가 섞이고 철염라를 환호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철염라는 경황이 없는 비무중에도 히죽 이를 드러내었다.
“이놈!”
사내의 발이 무릎 위까지 올라와 당태세를 한 번에 밀어내듯 발을 내질렀다.
당태세는 발을 가볍게 막아내며 뒤로 주르륵 밀려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관객들의 탄성과 야유가 같이 쏟아졌다.
철염라 손고해가 몸을 뻣뻣이 세우고 손가락으로 흑가면을 가리키며 하늘이 무너지라 고함을 질러대었다.
“그 실력으로 어디 무대 위에 올라왔느냐! 사내답게 덤비든지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여라!”
“……돈 받고 올라온 놈이 말이 많구먼.”
“뭐가 어째?”
흑가면은 취했던 자세를 풀었다. 포증의 가면이 슬쩍 타뢰대 사방을 둘러보더니만 고개를 옆으로 까닥거리며 손깍지를 끼고는 우두둑 손목과 어깨를 풀었다.
사람들이 모두 흑가면을 주시하는 가운데 흑가면이 조용히 손을 뻗어 철염라를 가리키며 낮게 한마디를 던졌다.
“광대가 힘만 있지 마당을 구르는 재주가 없구나. 이쯤에서 판을 접는게 낫겠다.”
“허, 입만 살았구나! 죽겠다 이거지?”
“네놈 수준에 맞춰서 놀아줄 테니 한 번 어울려보자!”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당태세의 몸이 타뢰대를 박차고 철염라에게 뛰어들었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철염라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는데, 순간 두 발로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당태세의 양발이 철염라의 몸통을 걷어차고 뒤로 공중제비를 하며 착지했다.
순간 관중들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오고 다시 요란스러운 환호가 시작되는데, 두 손으로 당태세의 공격을 막아낸 철염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죽인다!”
철염라 손고해의 몸이 짐승처럼 튀어나오더니 온몸의 힘을 실을 주먹을 흑가면에게 날렸다. 하지만 흑가면의 사내는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사내의 정권을 가볍게 밀어내더니 자신도 정권을 쥐고 손고해의 가슴팍을 찍어 눌렀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손고해의 몸이 들썩거렸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내밀어 손고해가 흑가면의 권을 방해하였지만 강맹한 일격을 손고해의 몸을 강타하고 타뢰대까지 울릴 지경이었다. 손고해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흑가면을 바라보더니 다시 보이지 않는 속도로 권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흑가면의 권이 들어오는 손고해의 권을 맞받아 올려치며 어깨를 앞으로 내밀고 손고해의 몸통에 부딪혔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손고해의 몸이 옆으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흑가면의 왼발이 불쑥 위로 올라오며 손고해의 머리를 노리는데 가까스로 손을 들어 들어오는 왼발을 막은 손고해의 몸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튀었다.
바야흐로 강권과 강권의 격돌이었다.
“잘한다 무명수!”
순식간에 관중들의 호응도가 역전되었다.
사람들은 철염라와 북경 무명수를 동시에 환호하기 시작했는데, 철염라 손고해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땀을 흘리며 무명수에게 권을 무작정 휘두르기 시작했다.
반면 북경 무명수는 들어오는 권을 하나하나 어깨와 손으로 받아내며 허리와 어깨를 이용해 무지막지한 강권을 하나씩 손고해의 몸에 꽂아 넣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싸우는데 나무끼리 맞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이도 종리세리는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한소군 도려진은 북경 무명수의 무공을 살펴보다가 있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젓고 있었다.
“영우문의 출상타(出喪打)? 대체…….”
그 때, 철염라 손고해가 뱃속부터 끌어내는 기합을 내지르며 지금보다 갑절은 빠른 속도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미 각법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오직 혼신의 일격 한 방으로 가면사내를 때려눕히겠다는 일념만 남은 것 같았다.
당태세는 숨을 골랐다. 이미 상대방이 평정심을 잃었다면 승부는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맨 처음 손고해의 권을 마주하였을 때부터 승부는 난 상태였다.
당태세의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이길까가 아니라 언제쯤 비무를 맺는게 합리적인가를 계산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홀로 권법을 만들고 익혀 저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면…….’
당태세의 손이 권에서 장으로 변하였지만 눈이 뒤집힌 손고해의 눈에는 그런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당태세는 슬쩍 머리 옆으로 쏟아지는 손고해의 권을 피하며 발을 뻗어 방위를 바꾸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대접은 해 줘야겠구먼.’
당태세의 앞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주먹은 시각보다 먼저 목표한 곳에 도착해 있었고 바람을 신하처럼 거느리며 홀로 앞으로 육박했다.
하지만 손고해의 주먹 앞에서 당태세의 손바닥은 비단처럼 부드럽게 난폭한 기세를 감싸 올렸고, 이어 움직이던 팔꿈치는 주먹과 팔이 흘러나간 궤적을 타고 들어가 주먹과 팔과 어깨의 주인인 손고해의 옆머리를 가볍게 위로 올려쳤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고 힘이 내공이 되어 상대방의 몸으로 파고들었지만 소리 하나 나지 않았고 기척조차 잡히지 않았다.
북경 무명수가 들어오는 철염라의 권을 피하며 몸을 빙글 돌려 다시 자세를 취할 때, 철염라 손고해의 눈은 이미 뒤집어진 뒤였다.
강권의 거한은 비틀대며 관중석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이내 취한 듯 하늘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도끼에 찍힌 나무처럼 옆으로 풀썩 쓰러져버렸다.
잠시 타뢰대를 메웠던 사람들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가 멍하니 타뢰대 위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뒤를 돌아보고 백령문도에게 뭘 하냐는 듯 턱짓을 하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룡문도가 무대 위로 튀어나와 쓰러진 손고해를 가만히 살피더니만 손을 번쩍 들고 관중들을 향해 외쳤다.
“하늘도 모르고 귀신도 모르는 수법! 실로 엄청난 공부를 목격하셨소! 승자는 북경 무명수!”
순간 조용히 타뢰대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환성이 터져나오며 서 있는 흑가면을 향해 찬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단하다 무명수!”
“북경 무명수!”
“놀라운 공부로다!”
아직까지도 멍한 표정으로 흑가면을 보고 있던 백룡문도 역시 그제야 입에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번쩍 들고 사람들의 환성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천둥같고 해일 같은 사람들의 호응을 보고 있던 흑가면의 사내는 천천히, 하지만 힘 있게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실로 장쾌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단상에서 이를 보고 있던 한소군 도려진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슬쩍 손가락을 뻗으며 자신의 위아래에 서 있던 세 명의 노인을 옆으로 불러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