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타뢰대 (3)
청(淸)의 치세에 변발을 문제 삼지 않는다.
청(淸)의 치세에 소매길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도사(道士)는 북막의 만주족이 남으로 내려와 천하를 거머쥐고 한족의 머리와 소매길이를 멋대로 재단하며 반항하는 자를 죽음으로 몰고 갈 때에도 아무런 재제를 받지 않은 유일한 직업이었다.
대대로 만주족은 음양의 이치를 풀이하고 천하의 도를 연구하는 도관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고, 이는 만주족이 청(淸)을 세운 뒤에도 그대로 전통이 이어졌다.
지금 타뢰대에 등장한 광탄사 무삼군 역시 도복을 입고 치렁치렁 속발을 늘어뜨린 도사의 모습이었다.
사내의 소매는 길고 넓어 마치 날개처럼 보였으며 터럭하나 없는 사내의 매끈한 얼굴과 콧날은 여인과도 같았는데 그 서늘한 눈매에서는 요염한 색기까지 보일 정도였다.
모여있던 관중들이 광탄사 무삼군을 보며 환호하여 소리를 지르는데 그 모습을 보던 상대방 금학거사 서춘엽 역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
“소주제일미를 원하여 나왔는데 어찌하여 비무대에 더 아리따운 해어화(解語花)가 나와있는고? 내가 오늘 비무에서 이겨 소주제일미를 차지하여도 좋고, 아리따운 섬섬옥수에 무너져 타뢰대에 눕는다 한들 바랄 것이 없겠구나!”
상대의 희롱을 들은 광탄사 무삼군은 슬쩍 눈을 흘기더니 새빨간 입술 사이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보였다. 실로 여인이라 불려도 어색하지 않은 정도의 아찔한 미모였다.
“그대가 선택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내가 후자를 골라드리겠소. 대신 일어나는 것은 힘들 것이네.”
“거 좋구나! 하지만 나는 사내보다는 여인이 좋은 걸 어찌할까?”
금학거사 서춘엽이 자세를 낮추고 두 팔을 가슴 앞으로 모으는데, 그 모습을 보던 광탄사 무삼군은 슬쩍 긴 소매를 늘어뜨리고 서춘엽을 바라보았다. 무삼군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사내는 질색이라 말이오.”
순간, 무삼군이 말을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금학거사에게 달려들었다.
무대를 둘러싼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지며 비명에 가까운 경탄이 새어나왔다. 무대뒤에서 두 사람의 비무를 관전하고 있던 당태세 역시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탄을 발하였다.
“놀라운 금나수(擒拿手)로다!”
무삼군의 소매가 날개처럼 금학거사의 옷에 닿는 순간 금학거사의 몸이 허공에 뜨더니만 그대로 무대 바닥에 등부터 떨어진 것이다.
대체 무슨 술기가 나왔는지 평범한 사람은 볼 수도 없을 정도의 빠르기였고, 당태세조차 겨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금학거사는 잠시 눈을 껌벅이더니만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고는 숨을 가다듬고 무삼군을 향해 몸을 날리며 강맹한 충권(衝拳)을 날렸다.
그 순간, 관중들이 입이 모두 벌어지더니 비명과 함께 환호성이 같이 울려 퍼졌다.
무삼군의 소매가 펼쳐졌다가 금학거사의 충권에 빨려들 듯 한곳에 모이더니 이내 금학거사의 몸이 다시 허공에 뜬 채로 바닥에 태질당하는 것이 아닌가. 당태세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문의 공부가 저리도 발전했는가.”
당태세는 입이 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사실, 금나수라는 기술은 병장기를 지니고 싸울 때는 병장기의 허점을 보조하거나 사각(死角)을 만들 때 이용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광탄사의 무공은 금나수를 극한까지 갈고 닦은 듯 보였다. 게다가 상대방을 허공에서 메치는 기술은 금나가 아닌 또 다른 수법이었다. 당태세는 구삼군의 기법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신음을 흘렸다.
“금나수와 솔각(摔角)을 같이 섞어 쓰는구나. 땅에 떨어지면 모든 게 끝인게지.”
당태세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첩첩산중이군.”
역시나 금학거사는 눈이 풀린 채 무대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광탄사 무삼군은 자신을 보고 있는 관중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두 팔을 학의 날개처럼 펼쳐 보였다.
그 고아한 선과 우아한 동작을 보던 사람들은 이제 광탄사를 연호하며 모두 흥분에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분! 이제 비무초친 둘째 날의 전반부가 끝났습니다. 잠시 반 다경 정도 휴식을 취하였다가 후반조의 경기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자리를 뜨지 마십시오!”
잠시의 휴식시간이 돌아오자 관중들은 도시락을 먹거나 근처의 가게로 돌아다니기 시작 했다.부산스러운 소음이 타뢰대를 둘러쌌다.
당태세는 슬쩍 단상 위를 쳐다보았다.
단상 역시 다른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자리를 비운 채 용무를 보러 가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는데, 오직 한소군 도려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때 관중들의 사이를 헤치고 들어와 여인의 옆으로 나이 지긋한 사내 셋이 다가가서 뭔가를 말하자 한소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 아래쪽을 향해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백룡문의 호법, 백룡삼교(白龍三蛟).”
당태세는 혼잣말을 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백룡문의 호법으로 문주를 모시는 그들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내주인 한소군의 명을 받는 게 더 익숙해 보이는 이들이었다.
“십칠 년 전부터도 저 노인네들은 저 모양이었어. 배알도 없는 것들.”
당태세는 투덜대며 한소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자리를 배정받은 사내가 털썩 단상에 몸을 싣는데, 허름한 관복에 관모, 그리고 날카로운 콧수염과 눈매는 당태세가 익히 알던 사내였다.
“맙소사. 북경의 천호 아닌가?”
이제 조금 뒤면 후반조의 선봉으로 십칠번인 당태세가 올라가 개전을 할 터였다.
비무가 시작되는 당태세는 한소군 도려진의 매서운 눈매뿐 아니라 가뜩이나 예리한 종리세리의 눈썰미까지 감당할 처지였다.
자신의 가면 뒤에 놓인 본 모습이 탄로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내가 묻힐 땅을 스스로 파 놓았군.”
“뭐라고 구시렁대고 있나. 광대놈아.”
도발적인 언사가 지독한 살기와 함께 당태세의 뒤에서 흘러나왔다.
당태세의 뒤에는 어느새 이십(二十)의 표를 가지고 있던 속칭 철염라, 손고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네가 위에서 주는 돈을 마다하고 나와 싸움을 붙겠다고 했단 말이지?”
“비무에 돈이 오가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일 아닌가?”
손고해는 피식 웃음을 짓더니 당태세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철염라는 당태세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는데 팽팽한 몸의 근육은 사내가 입고 있는 장포를 언제든지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애송아, 이곳은 잡극판이 아니다. 광대짓은 이걸로 끝내고 꺼져라.”
철염라의 솥뚜껑 같은 손이 잽싸게 튀어나와 당태세의 가면을 낚아채려는 순간, 당태세의 우수가 그림자처럼 뻗어 올라 철염라의 손목을 잡고 위로 퉁겨 올렸다.
가면속의 눈과 가면 밖의 시선이 서로를 노려보며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무대 위의 광대는 네 놈이 될 것이다.”
“허, 가면쟁이. 여기서 죽여주랴?”
두 사람의 실랑이가 심해지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달려와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어느새 부후경과 이국맹은 당태세의 편에서 사람들을 떼어놓았는데 철염라를 슬슬 말리는 이들을 보니 예봉취와 광탄사를 비롯한 몇 명이었다.
그렇구만.
당태세는 모여있는 상대편을 바라보며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모두가 이어져 있다.
열여섯 명 가운데 고르게 퍼져서 올라갈 사람을 솎아내는 역할.
이유는 조만간 밝혀질 것이겠지만 당태세 세울 가설은 결국 하나로 엮이게 될 것이었다.
백룡문의 소문주.
결국 이 모든 일의 혜택을 받게 될 것은 그 자가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태세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불쾌하기 그지없는 기분이었다.
“자! 자! 여기서 싸우지 마시고 올라가서 싸우십시오! 이제 바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아이고, 두 분 아주 호승심이 대단하시구먼! 재미있겠네!”
어느새 뒤로 돌아온 백룡문도가 당태세의 손을 잡고 타뢰대 위로 끌고 올라가고, 그 모습을 보고 철염라는 피식 웃음을 짓더니 백룡문도의 뒤를 따라 밖으로 올라왔다.
휘장을 벗어나 타뢰대 위로 올라온 당태세의 눈앞에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관중들의 머리가 해변의 모래알처럼 펼쳐져 있었다.
관중들은 검은 가면의 사내가 단상에 올라오자 모두 손을 들며 환호했고 그 뒤를 이어 철염라 손고해가 올라오자 환호성은 땅에서 솟아나는 천둥이 되어 하늘을 흔들었다.
“소주 사자림에 협객 판관이 강림하였도다! 나는 얼굴이 없노라! 하지만 패배 또한 없노라! 쾌권무적의 고수. 북경 무명수!”
온몸을 간지럽게 만드는 소개를 듣고 있던 당태세는 주먹을 불끈 위로 쳐들어 보였다.
순간 관중의 환호가 터진 둑 사이로 쏟아지는 강물처럼 타뢰대를 휩쓰는데 당태세는 자칫 잘못했으면 고함을 지르고 그들에게 화답할 뻔하였다.
대중의 우뢰와 같은 갈채는 기묘하게 사람의 마음속을 휘잡으며 없는 호승심도 만들어내는 모양이었다. 당태세의 모습을 보던 백룡문도가 이번에는 맞은편에 있는 거한을 바라보며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양웅(兩雄)은 불립(不立)이라! 누구도 나와 함께 타뢰대에 설 수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지고의 일격에 모두가 쓰러지니 그 이름하여 철염라 손고해!”
시뻘건 장포와 바지를 입은 거한이 몸을 드러내자 사람들 역시 함성을 지르며 사내의 등장에 환호를 보냈다.
철염라 손고해는 사람들의 환호성에도 아랑곳없이 오롯이 자신의 시선을 당태세에 보내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 자욱하게 어린 살기는 말로 형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태세는 천천히 앞으로 나와 무릎을 굽히고 좌우 양수를 턱 앞으로 보내고 철염라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철염라는 별다른 기수식을 취하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당태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참으로 오만하기 그지 없는 태도였다.
“나를 격동시키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만큼 자신의 공부에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당태세가 혼자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중얼거리는데, 백룡문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손을 위로 향하더니 번개처럼 아래로 내리며 큰 소리로 시합의 개시를 알렸다.
“비무 개전!”
사람들의 함성이 타뢰대를 흔들기 시작하자 철염라 손고해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사내는 성큼성큼 아무렇게나 걸어오며 당태세와의 거리를 좁히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작살처럼 당태세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무작정 힘으로 밀어부치겠다는 심보 같았다.
주먹이 당태세의 가면을 부숴버릴 듯한 순간, 당태세가 슬쩍 자세를 바꾸면서 한 반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바람을 뚫고 들어오던 손고해의 정권이 우뚝 멈춘 채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손고해는 힐끗 당태세를 보더니 다시 거침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만 아까와 같은 주먹을 날렸다.
당태세가 다시 슬쩍 한 걸음을 뒤로 빼는 순간, 당태세는 눈을 의심했다.
순식간에 발로 타뢰대를 박찬 손고해의 몸이 둥실 하늘로 떠오르더니만 이내 몸을 뒤집으며 한쪽 발로 당태세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당태세의 몸이 왼쪽으로 회전하며 손고해의 뒤를 잡자 손고해는 땅에 내리자마자 발을 허공에 띄우며 말이 뒷발질을 하듯 당태세의 명치를 향해 퇴각을 날렸다.
당태세는 들어오는 퇴각을 슬쩍 옆으로 빗겨내며 땅을 박찼다. 순간 당태세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뻗으며 왼손이 창처럼 가슴에서 뻗어 손고해의 명치를 향해 매섭게 질러 들어갔다.
순간 손고해의 무릎이 위로 붙으며 들어오는 당태세의 권을 옆으로 막고 바로 옆차기를 날리는데, 두 손을 열십자로 가로막은 당태세의 몸이 오히려 주르륵 뒤로 이삼 보를 밀려나갔다.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도, 이 광경을 목격한 관중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발하였다.
“이거, 생각보다 꽤 아프구먼.”
당태세는 들어오는 옆차기를 막았던 두 팔을 슬쩍 어루만지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손고해 역시 아까와는 반대로 거리를 유지하며 당태세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염라 손고해의 각법은 위협적이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이번에는 잘 피했구나. 두 번은 요행수가 없을게다.”
철염라가 당태세를 보며 씩 비웃는 표정을 짓자 당태세는 잠시 철염라의 모습을 살피더니 천천히 두 손목의 소매를 걷어부치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함성은 점점 커져만 갔다.
당태세는 자신 앞에 있는 각법의 고수를 보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새까만 포증의 가면 속에서 싸늘한 말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놀아보자. 광대야. 관객들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