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타뢰대 (2)
대회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비무자들이 타뢰대에 올라가자 어제보다 더 웅장한 사람들의 환호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당태세는 힐끗 포장 뒤로 모여있는 사람들과 단상 위의 사내들을 빠른 시간에 훑어보았다. 지난번 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타뢰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성미급한 몇몇과 아이들은 근처의 나무위에 올라가 전망 좋은 곳에서 비무초친을 보는 중이었다.
분명 아룡도 술자리에서 사귄 벗들과 함께 저 근처 어디에서 이 시합을 구경하고 있을 터였다.
당태세는 단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도 지난 번과 같이 한소군 도려진과 그 옆의 무골로 보이는 사내 둘이 가운데 앉아 있고 그 옆으로는 소주의 관원들과 각양각색의 화려한 복색을 한 이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앉아 있었다. 분명 이 소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인들이 분명해 보였다.
특히 한소군 도려진의 옆에 앉아 비무를 보고 있는 사람은 분명 그 위소저의 부친이거나 그에 준하는 친족일 터였다.
“꽤나 떠들썩하니 회자될 일에 끼어들었어.”
당태세는 주변의 떠들썩한 광경에서 시선을 떼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부후경과 싸우는 이국맹이라는 대장장이에게 관심을 끄는 일이었다.
당태세는 그의 뒤에서 다음 시합을 기다리는 이국맹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몸을 풀고 있던 이국맹이 다가오는 흑가면을 보더니 눈을 흘기며 히죽 이를 드러내 보였다.
“뭔가 포판관? 나는 하늘에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그대가 태호에서 야장노릇 하는 이국맹이오?”
순간 이국맹과 부후경이 당태세를 같이 쳐다보았다. 이국맹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포증의 흑가면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그래, 내가 야장일 하는 이국맹이다. 그걸 묻는 너는 누구냐?”
그 순간이었다. 천둥 같은 함성과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사방의 땅이 진동하였다. 그와 함께 사회를 보는 백룡문도의 음성이 좌중을 진정시켰다.
“이것이야 말로 삽답여유성(颯沓如流星)! 전광석화! 승자는 사형문의 예봉취(銳鋒鷲) 백심주!”
“사형문?”
순간 당태세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서 타뢰대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이미 바닥에 널브러진 채 의식을 잃은 사내와 그를 내려다보며 오연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꺽다리 사내가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나직하게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각 한 방에 날아가는구먼.”
당태세는 바싹 입이 말랐다. 지금 이 곳에 사형문이 들어와 있단 말인가? 사형문이 비무초친에 왜 들어와 있는가? 백룡문의 누가 저들을 부른 것인가? 저 자 혼자인가?
갑자기 당태세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더니 지금까지 대비해온 모든 변수들이 머릿속에서 헝클어졌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 당태세를 쳐다보던 이국맹이 부후경과 얼굴을 마주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타뢰대를 향하였다.
“별 싱거운 종자 다 보겠네. 난 또 한바탕 하자는 줄 알았더니.”
두 사람이 타뢰대로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예봉취 백심주라 불린 사내가 천천히 타뢰대를 벗어나 참가자 대기소로 걸어 들어왔다.
당태세는 가면속의 눈으로 백심주의 보법과 자세를 자세히 눈여겨보았다. 의심할 것도 없는 사형문의 공부가 사내의 몸에 묻어나고 있었다.
‘네가 저 자를 못 봤던 것이 한이구나. 사형문이라니.’
사내의 별호 역시 사형문의 사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별호 역시 사형문의 충실한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대대로 사형문은 광.영.예.둔(光.影.銳.鈍)의 네 가지 형태로 무공을 체질에 맞게 전수하는 문파였다. 예봉취(銳鋒鷲)라는 별호는 이 자의 무공이 속도에 특화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일전 무창에서 싸왔던 초영검(焦影劍) 성낙신이나 무영쌍륜(無影雙輪) 은곽 같은 경우는 은밀히 적을 살상하는 살초 위주의 무공이었다.
“어쩌면 내가 가장 조심해야 할 이는 백룡문이 아니겠군.”
당태세는 백심주의 눈을 피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타뢰대 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지금 타뢰대 위의 부후경과 이국맹은 이미 예를 취하고 서로를 향해 권을 마주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눈이 달랑 두 개인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예전 전설의 나타태자처럼 머리가 셋이라면 타뢰대와 관중석과 예봉취 백심주를 모두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되지 않는 것이 한스러웠다.
“비무 개전!”
백룡문도의 목소리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부후경과 이국맹이 동시에 앞으로 뻗어나가며 주먹과 발길질로 상대방을 타격했다. 당태세는 눈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권각은 투로와 법도에 따라 내뻗고 거두는 형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상대에게 뻗는 발과 주먹은 흐트러져 있었다. 냉정한 승부욕이 아니라 그저 감정이 격해져서 치고받는 막싸움을 교묘하게 포장한 백타였다.
“뭐하자는 거야?”
당태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의 싸움은 치고받고 물어뜯는 수준까지 떨어지진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맨주먹 대신 날붙이를 바라는 형상이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의 위 가면을 꾹꾹 눌렀다.
“쌓여있는 원한인가.”
그나마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수법은 조금씩 정교해졌다.
야장 이국맹은 권보다는 각을 중심으로 상대방의 중심을 흩어버린 뒤 맹렬한 고법으로 한 번에 적을 무너트리는 수법을 쓰고 있었고, 부후경은 짧고 강한 연격을 집어넣어 상대편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수법의 권이었다.
와권(囮拳)의 역사는 오래 되어 그 연혁을 따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부후경은 선대의 공부를 착실하게 계승한 듯 보였다.
당태세는 두 사람의 비무를 보고 있다가 슬슬 부후경의 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성격이 광폭해보이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쌓여있는 무공의 체득과 깊이에 있어서는 체격이 앞서는 이국맹이 부후경을 따라가기 힘들어 보였다.
아닌게아니라 짧은 부후경의 연타가 연달아 가슴팍에 얹힌 이국맹은 인상을 찡그리며 주춤주춤 뒤로 밀리고 있었다.
“두 합 안으로 끝나겠구먼.”
그때였다. 당태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국맹의 몸이 벌러덩 타뢰대 위에 누워버렸다. 관중들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는지 함성보다는 야유를 많이 섞어 보내고 있었다.
당태세가 봤을 때 이국맹이 맞은 타격은 충격은 있어도 드러누울 정도는 아니었고, 부후경 역시 전력을 다한 공격이 아닌 듯 보였다. 당태세는 한참동안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만 혀를 차며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악우(惡友)라도 되는 사이인가.”
이국맹은 드러누운 뒤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부후경도 더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백룡문도 올라와 부후경의 승리를 선언하자 모여있던 관중들은 야유를 보내며 승자와 패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직 지난 비무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승자는 와권의 부후경!”
사내 둘은 도망치듯 타뢰대를 건너와 참가자들의 대기소로 내려왔다. 모여있던 이들이 모두 그들을 보며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눈이 썩을 지경이군.”
“그게 무공인가, 길거리 싸움이지?”
부후경과 이국맹은 별 다른 소리 없이 고개를 흔들어댈 뿐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비무 전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둘 다 지칠대로 지쳤다는 시늉이었다.
모든 이들이 그들을 보며 여전히 비웃음을 보내는 반면 한 사람, 예봉취 백심주만이 부후경과 이국맹을 형형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당태세는 백심주를 힐끗 쳐다보고는 그들을 향해 다가가 앉아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분 다 괜찮으신가.”
“아, 또 당신이오? 대체 무슨 일이오?”
이국맹이 고개를 들고 당태세를 바라보자, 당태세는 이국맹을 보며 말했다.
“뭐든지 만들어주는 야장이라 들었소. 솜씨도 좋다고 하더군.”
“허, 이 와중에 나에게 주문을 넣는 거요?”
이국맹이 피식 웃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오른손을 턱 하니 흑가면에게 내밀었다.
“돈만 주시오. 돈만 주면 뭐든지 다 해준다니까. 안 그래? 부형?”
부후경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었다. 당태세는 두 사람을 보다가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된 거였구먼.”
그 순간, 다시 관중석에서는 왁 하는 함성이 피어올랐다. 아까와는 반대로 꽤나 호쾌한 싸움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모여있던 참가자들이 하나둘 일어나 타뢰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당태세는 앉아있는 부후경과 이국맹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이대협은 시합이 끝난 뒤 부대협과 같이 길을 가시구려.”
이국맹이 이제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표정으로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뜬금없이 두 사람 앞에서 뜻 모를 말을 지껄이는 가면사내가 당연히 성가실 수밖에 없었다.
“대체 당신은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백룡문이 가만히 둘 것 같소?”
순간 부후경과 이국맹의 표정이 같이 변하더니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다시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피곤에 지쳐있던 표정은 어느새 진중하니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부후경이 당태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뭘 알고 있는 거지?”
“이 비무초친에 관련된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오만.”
“당신은 이 비무에 다른 동료가 있소?”
당태세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요.”
다시 관중들의 함성과 함께 고함과 환성이 용솟음쳤다. 승부를 주재하던 백룡문도의 큰 목소리가 타뢰대 밖으로 울려 퍼졌다.
“승자는 십(十)번! 무량촌의 소감녕 양청!”
타뢰대를 구경하던 이들이 다시 하나둘 제자리로 들어왔다. 당태세와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벌써 세 경기가 끝나고 이제 네 번째 전반조의 마지막의 경기가 시작되려 하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후반조의 첫 번째 비무였다. 슬쩍 당태세는 자신과 싸워야 할 사내를 살펴보았다.
철염라 손고해라 불린 위인은 묵묵히 팔짱을 낀 채 타뢰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철염라의 별호를 봤을 때 사형문에서 나온 위인은 아니었지만 당태세가 보기에 철염라라는 인물도 어딘가 수상쩍은 기색이 있었다.
“굳이 저 사람과 싸우지 말라고 백룡문에서 돈을 준다는 것 자체가 수상하지.”
백룡문이 사형문을 고용했다면, 사형문 외에 다른 실력자들을 고용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때였다. 타뢰대 위의 백룡문도가 큰 소리로 관중들을 향해 타뢰대로 올라온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 시합! 이번에야 말로 진정한 실력자들의 경기입니다! 오직 자신의 무공을 증명하기 위해 멀리 악양에서 건너온 협객! 춤이냐 무공이냐! 광탄사(光綻娑) 무삼군! 그에 맞서는 소주 제일의 풍류남아! 시와 여인과 술을 사랑하는 무적의 권사! 금학거사(金鶴居士) 서춘엽!”
“광탄사(光綻娑)?”
순간 당태세의 눈이 번득이며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긴 소매를 나풀거리며 타뢰대로 올라가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이는데, 호리호리한 몸에 긴 도복을 입고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뒤로 넘긴 것이 얼핏 보면 여인으로 착각할 만한 도사차림의 사내였다.
하지만 당태세는 그의 걷는 모습과 천천히 타뢰대 위에서 보법을 밟은 모습을 지켜보고는 가면 속에서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대체 사형문이 이 비무에 몇 명이나 들어온 것이냐?”
광(光)자 별호를 쓰는 위인도 비무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이 비무는 소주 제일의 호걸을 뽑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소주의 협객들과는 관계없는 청부사들이 만연하는 복마전이나 다름없었다.
“한소군 도려진,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가.”
그 순간, 백룡문도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관중들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전반조의 마지막 시합이 지금 열리는 순간이었다.
“비무 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