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10화 (110/226)

110. 강남 소주(9)

“벌써 몇 년 전인가…한 오년 어름이 지났군요. 당시 백룡문 소문주 왕보휘는 갓 스물이 넘은 때였는데 그 용모와 재주가 그때부터 놀랍다고 소문이 났었지요. 관례(冠禮)도 올렸으니 조만간 여기저기서 매파(媒婆)가 들끓을 거라고 말이 많았어요.”

어느새 곽일지는 방 한구석에서 백주와 술잔을 가져와서 당태세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이 구변도 꽤 좋은 데다 말이 끊길 때마다 슬쩍슬쩍 술을 권하는 것이 은근히 정도 있어 뵈고 말을 풀어내는 재주도 있었다.

당태세는 곽일지가 권하는 대로 술을 받으며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백룡문에서도 꽤 괜찮아하는 혼처가 몇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희한하게 소문주가 혼례는 안 합디다. 그리고 스멀스멀 장터에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 거예요.”

“무슨 소문?”

“소문주가 따로 만나는 여식이 있다 이거지요.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장성한 청년이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하고 눈이 맞는다는데 그걸 누가 말릴 수 있나요?”

“그렇지.”

“그런데 그때 말입니다. 동문 밖의 염색장 부가호(傅家戶)의 딸이 갑자기 목을 매고 죽었다는 겁니다. 용모 단정했던 처녀가 갑자기 말도 없이 산에서 죽은 거죠. 말이 많았어요. 흉흉한 소문도 많았고…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더란 말입니다. 소문주가 좋아했던 사람이 부가호의 여식이라고.”

“저런.”

당태세가 술을 받고 혀를 차는데, 곽일지는 술을 자신에게로 가져가며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도 맘에 안 든다는 듯 찝찝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 이상한 말이 또 떠돌기 시작하더란 말이죠. 백룡문 소문주가 한참 동안 부소저를 데리고 놀다가 이제 싫증이 나니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어 사달이 났다 이러더라는 겁니다.”

“흠, 안타깝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게 전부가 아니니까 문제지요.”

“뭐라고?”

곽일지는 술 한 잔을 들이키고 숨을 불어 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더 끔찍한 소문이 그 뒤를 이어서 나왔지요……아, 그러니까 이 소문은 부가호에서 나온 소문인데……부가호 여식이 죽은 게 자진(自盡)한 것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뭐?”

“백룡문 소문주가 염색공 딸을 만나는 걸 싫어한 백룡문에서 사람을 시켜 그 딸을 없앴다 이겁니다. 그걸 주장하는 게 바로 그 죽은 딸의 오라비인 부후경 그 자인데…하여간 미치광이처럼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백룡문하고 일전을 불사한다고 어쩌고 하면서 아주 시끄러웠어요.”

당태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부대협이라는 자가 오라비였구먼! 허허, 그래서 아까 그렇게 소문주를 죽일 듯 노려보았구만!”

“아직도 소문주가 자기 동생을 해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부씨 집안은 어찌하여 복수를 안 하고 지금까지 버틴 것인가?

당태세의 말에 곽일지가 손가락을 들러 천장을 가리키더니 술 한 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하늘이 막았지요.”

“무슨 소리인가?”

“결국 부씨 집안이 성부에 이 일을 호소하여 재판까지 가기 직전이었는데, 이년 전에 정성공이 이곳으로 거병을 하면서 백룡문이 무명(武名)을 쌓았지요. 그 날 이후로는 유아무야 되었다고 봐야지요. 누가 전란의 공신을 건드린단 말입니까?”

당태세도 곽일지의 말을 들으며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고 언제 들어도 속이 찝찝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예전부터 알고 있는 이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욱 그러하였다.

그것이 친구이건 원수이건간에.

“왕양성의 후계자가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구먼. 하긴 견정문의 후계자가 그 정도일 줄 몰랐으니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인가.”

“백룡문주와는 절친하셨던 모양이군요.”

“한때는.”

곽일지와 당태세는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당태세가 멍하니 곽일지의 방을 쳐다보다가 이젠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맺었다.

“그 문제는 내일 부후경을 만나 다시 논해 보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럼 저는 뭘 더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쓸만한 야장(冶匠)을 알고 있나?”

“야장이오?”

당태세는 대답대신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보였다. 일전 이 집 마당에서 싸웠던 세 명의 도수, 그리고 조금 전 싸운 다섯 명의 도수는 지팡이 여러 곳에 흔적을 남긴 뒤였고, 개중 몇 개는 꽤나 깊이 도흔을 남겨놓고 있었다.

“이런 나뭇가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진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야장이 필요해. 내가 아끼던 무기가 장사 성부에서 박살이 났거든.”

곽일지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곤란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기를 만들어내는 야장은 따로 성부에서 관리를 합니다. 그리고 그곳은 팔기와 녹영군이 수시로 드나들지요. 일반인이 따로 병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엄격하게 관리합니다.”

“외지인이 무기를 만들어 달랠 수는 없겠군.”

“당연하지요. 바로 난리가 날 겁니다.”

당태세는 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나무지팡이를 보면서 혀를 찼다.

그나마 이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팡이는 여러 개를 사도 관계없으니 차라리 이런 것들을 사서 소모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곽일지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자기 허벅지를 짝하고 치고는 통증에 놀라 비명을 질러댔다. 당태세가 그를 빤히 지켜보자 곽일지는 고통스러운 중에도 히죽 웃음을 머금어 보였다.

“한 놈 있긴 합니다. 그런 거 따지지 않고 아무거나 만들어 줄 야장이.”

“한 놈?”

곽일지가 한쪽 입술을 슬쩍 들어 올리며 얄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기가 생각을 해 놓고 뭔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의 얼굴이었다.

“태호 북쪽에 어부들의 작살과 낚시바늘을 만들어주고 가끔 말편자까지 만드는 괴퍅한 야장이 하나 있습니다. 이국맹이라는 놈인데 아주 성질이 더럽지요. 하지만 돈이라면 맥을 못 추는 놈입니다.”

“이국맹?”

당태세가 슬쩍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곽일지는 그럴 법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당태세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아마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기억나실 겁니다. 그 놈도 이번 비무초친에 참가했거든요.”

***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아침이었다. 햇살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축축한 공기는 사방에서 사람들을 옥죄고 들었다.

잠을 설친 사내들은 일찍 일어나 낯을 씻고 시원한 그늘에 누워 다시 잠을 청하거나 아예 옷을 차려 입고 이른 아침 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은 객잔 싼 방에 묵었던 북경의 무인 역시 일찍부터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으리, 몸은 괜찮으십니까?”

방에서 나오는 종리세리를 보던 객잔주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기 손님을 쳐다보았다. 종리세리는 객잔 주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일 없소이다. 무슨 일이오?”

“다름 아니오라 어제 하루종일 객잔 안에만 계셔서 여쭤 본 것입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소이다.”

종리세리는 젖은 수건으로 목과 얼굴을 닦으며 말없이 객잔의 마당을 보고 있었다. 객잔주인은 이 말수 적은 관리에게 괜히 안부를 물었다는 후회를 하는 중이었다. 한참 동안 말할 거리를 찾던 주인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웃음을 띠고 종리세리를 바라보았다.

“백룡문을 찾으시더니 어째 비무조친도 안 보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고 보니 그것을 놓쳤구려. 주인은 보고 오셨소?

주인은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 그럼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무공의 무자도 모릅니다만 진짜 신명나고 무섭게 싸우더군요. 이 소주에 그렇게 무인 협사가 많은 줄을 몰랐지 뭡니까요.”

“혹시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었소?”

“가만있자…처음으로 나왔던 사내도 훌륭하고, 네 번째인가 싸웠던 사람도 대단하였죠. 발차기가 굉장했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가면 쓴 사내도 나왔고. 마지막엔 백룡문 소문주도 나왔지요. 한 번 가 보십시오! 손님은 무인이시니까 저보다 훨씬 재미있지 않으시겠습니까?”

“가면을 쓴 사내가 올라왔다고요?”

종리세리의 말에 객잔주인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환하게 웃었다.

“아! 잘 싸웠어요! 소주제일각 이추송하고 접전이었지요! 북경 무명수인가 뭐라던데…하여간 주먹도 빠르고! 무엇보다 가면을 쓰고 나오니까 뭔가 신비하지 않습니까? 아마 우리가 잘 아는 사람 중 하나 같기도하고…녹영군이나 팔기(八旗)의 사내일지도 모르지요!”

종리세리가 주인의 말에 슬쩍 콧수염을 어루만지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인을 돌아보았다.

“혹시 그 가면 쓴 사내가 다리를 절던가요?”

“네? 아이고, 아닙니다. 펄펄 날아다녔다고요!”

종리세리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객잔주인이 남긴 한 마디를 곱씹고 있었다.

“북경 무명수라.”

“내일은 한 번 가서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꽤나 재미있었거든요!”

객잔주인의 말에 종리세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당태세는 객잔을 나섰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아룡을 깨우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난 당태세는 곽일지의 집에 가서 옷과 가면을 뒤집어쓰고 타뢰대를 향하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곽일지는 먹과 기름을 가져와 당태세의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르기 시작했다.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합시다. 백발인 게 들통나면 아무래도 곤란합니다.”

당태세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곽일지가 생각외로 꼼꼼하게 세심한 면이 있음을 알고 감탄하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도 백발이 마음에 걸려 첫 번째 비무에서는 옷자락 속으로 넘기고 경기에 임했는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곽일지는 조금 뒤 당태세를 보더니 히죽 웃으며 다시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잘 되었습니다. 십 년, 아니 이십 년은 회춘하신 것 같군요. 수염까지 해 드릴까요?”

“수염은 사양하겠네. 그나저나 이 먹물이 흘러내리지는 않겠는가?”

“기름을 먹이고 끈적하게 발라놓았으니 흘러내리진 않을 겁니다. 머리카락이 다 젖을 정도로 진땀빼는 비무가 아닌 담에는 말입니다.”

“고맙네. 그럼 다녀오지.”

“아무쪼록 끝까지 승승장구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렴.”

당태세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곽일지의 집을 나섰다.

지팡이도 쥐지 않고 성큼성큼 소주의 운하 옆을 걸어가는 사내에게 사람들이 슬쩍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느새 한 번의 비무로 포증의 흑가면을 알아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만사 조심해야겠어.”

당태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람들에게 묵례를 표하며 부지런히 사자림 앞으로 움직였다.

이미 당태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모여 대회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벽에 붙어 있는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오늘 시작될 열여섯 명의 대진은 이미 붙어 있는지 오래였다.

“이(二)번과 사(四)번, 그리고 오(五)와 칠(七). 십(十)에 십이(十二), 십삼(十三)과 십육(十六)이라….”

첫 번째 조의 대진표를 보며 당태세는 붙어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비무에 지각을 했던지라 자신의 앞에서 무슨 무공이 오갔는지 당태세는 알지 못하였다. 지금부터 봐 두는 것이 앞으로의 승부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오번이 부후경이었지?”

당태세가 대진표에서 고개를 떼고 참가자들에게 고개를 돌리는데, 이미 부후경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이와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가만 보니 첫째 날 부후경과 말싸움을 하던 그 사내였다.

“이보게 부형, 아무리 날을 세워도 소용없네. 이번 비무가 마지막일 테니 마음 편히 먹고 옷이나 잘 차려 입으쇼.”

“허, 이형이야말로 나랑 붙은 뒤에 어서 집으로 돌아가 풀무나 부치시라고. 허리에 뜸이나 잔뜩 놓고 망치질을 해야 몸에 탈이 없을걸세.”

“하, 이 이국맹은 돈값은 하는 사람이야. 이미 돈을 받았으니 그 정도 일은 해 줘야지.”

이가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까닥 휘젓자 벌컥 화를 내며 이를 드러낸 것은 부후경이었다. 아무리 봐도 부후경은 급폭(急暴)한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는 위인 같았다.

“돈 받은 게 자랑이냐? 내 오늘 네가 받은 돈을 모두 토해내게 해줄테니 목 씻고 기다려라!”

부후경과 이국맹의 싸움을 바라보던 당태세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이국맹이라는 자를 노려보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체격으로 봐서는 대장장이가 제격인 사람이었으나 말하는 투나 사람 대하는 태도는 영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저 자가 이국맹이로군. 그나저나 저런 위인을 어찌 설득한단 말인가?’

당태세가 두 사내의 설전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데, 그 순간 타뢰대 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좌중을 향해 울려 퍼졌다.

“만장하신 소주 성민 여러분! 드디어 기대하시던 비무초친의 두 번째 대회가 시작되었소이다! 격렬한 사투를 뚫고 나온 열여섯 걸물들의 기묘하고 화려한 박투가 이제 다시 여러분 앞에 선 보일 터! 누가 최고의 무공으로 천하를 거머쥐고 소주제일미의 낙점을 받을 것인가!”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관중들의 소리가 타뢰대와 그 아래 땅을 진동시키자 무대 뒤쪽의 모든 사내들이 일시에 긴장하며 타뢰대를 바라보았다. 당태세 역시 자기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어쩌지 못하였다.

드디어 두 번째 비무초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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