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강남 소주(8)
포증(포청천)의 가면을 쓴 사내가 한 손에 기다란 지팡이를 손에 쥐자 다섯 명의 검수들은 일제히 긴장하며 그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맴을 돌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비무대회에서 대단한 무위를 보여준 흑가면이었다. 아무리 칼을 빼들었더라도 상대에 대한 경계를 방심할 수는 없었다. 가면의 사내, 당태세는 사내들이 자신을 보며 쉽사리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함부로 쳐 들어온 주제에 하염없이 시간만 끄는구나. 예의없는 것들이로세.”
당태세는 말을 마치자 슬쩍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자신의 앞에 있는 도수를 향해 움직였다.
당태세의 움직임이 시작되자 그에 맞춰 다섯 도수가 한꺼번에 자리를 좁히며 칼날을 위로 움직였다. 당태세의 지팡이가 먼저 앞으로 움직이자 앞에서 그에 맞서던 도수가 칼날을 눕혀 당태세의 지팡이를 누르더니 그대로 목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오문의 되는대로 부리는 칼질이 아닌 격과 자세를 갖춘 공격이었다.
당태세는 지팡이를 아래로 빼며 상체를 돌려 들어오는 칼을 피하였다. 그와 함께 아래에 있던 지팡이가 바로 위로 올라오며 칼 든 사내의 손목을 가볍게 후려치자 칼이 손목에서 빠지며 하늘로 튕겨 올라갔다.
순간 칼을 놓친 사내의 눈이 휘둥그래지는데, 어느새 놓친 칼은 당태세의 오른손에 붙들려 있었다.
가면쓴 사내의 몸이 회축을 그리며 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 그와 함께 오른손의 박도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빛살을 원으로 두르며 당태세의 몸을 따라 한 바퀴를 도는 순간, 사방의 사내들이 동시에 짧은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목을 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칼을 빼앗긴 사내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채 동료 넷이 그대로 고꾸라지는 것을 손도 못 쓰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포증가면의 사내는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며 칼을 들고 있었다.
“백룡문의 운룡도(雲龍刀)렷다. 네 동무들도 같은 자리에 칼을 맞고 죽은 걸 보니 모두 동일한 초식을 쓰려 하였구나.”
“어…어떻게…….”
“첫 초식의 자격(刺擊)이 빠르지 못하면 손목을 공격당해 칼을 놓치기 쉬운 것이 운룡도의 문제니라. 쾌도가 아니면 봉인할 도법을 누가 너희에게 쓰라 하였느냐?”
“다…당신은 누구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이다.”
흑가면의 사내는 어느새 칼을 목에 겨누고 사내를 강제로 꿇어 앉혔다.
가면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살기가 충천하여 쉽사리 마주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검은 포증의 얼굴이 슬쩍 아래로 움직이며 습격자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백룡문의 칼을 쓰는 것을 보니 백룡문도구나. 누가 보냈느냐? 왕양성이냐 도려진이냐?”
“대체…귀공은…누구….”
“말하라.”
칼날에 힘이 들어가고 사내의 목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백룡문도는 눈이 뒤집히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호법, 호법께서 저희들을 불렀습니다. 저희에게 대협을 제거하라는 명을….”
“백룡삼교가? 허, 예나 지금이나 쓰레기 치우는 일은 그 늙은이들의 몫이냐?”
백룡삼교라는 별호까지 흑가면의 입에서 나오자 이제 습격자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싶었다.
“백룡삼교께서 내주의 명을 받아 비무대회에 필요할 때가 있으니 모두 단련을 게을리하지 말라 명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이 처음으로 명을 받은 날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대협.”
“내 그 말은 믿어주마. 운룡도가 형편없더구나.”
당태세의 말에 습격자의 입술에 슬쩍 미소가 올라왔다. 하지만 연이어 들려온 말에 습격자의 미소는 곧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은 선택 하나에 생사가 명멸하는 법이니.”
“대협!”
습격자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번개처럼 사내의 목을 그어버린 당태세는 보지도 않고 박도를 땅에 내팽개치고는 바람처럼 자리를 벗어났다. 무릎 꿇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모로 눕히는데 당태세는 쓰러지는 사내를 보지도 않고 걸어나가며 한 마디를 더 던졌다.
“후회는 죽음으로 갚는 법이다.”
노인은 걸어가며 천천히 가면을 벗어 자신의 품 안으로 넣었다.
***
조용히 세간을 정리하고 무너진 선반을 공사하고 있던 피혁장 곽일지는 힐끗 마당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조용히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내는 목발을 짚고 절뚝대며 몸을 움직여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문을 쉽게 열지는 않았다. 곽일지는 슬쩍 옆으로 몸을 피한 채 오른손에 단도를 집어 들었다. 사내는 문을 바라보다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누구요?”
“날세, 당태세! 곽대협, 문을 열어주게!”
곽일지는 한숨을 파아 내쉬며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는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서더니 주위를 확인하고 다시 문을 걸어 잠궜다.
곽일지는 눈을 껌벅이며 옷보따리를 한 손에 들고 온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게 뭡니까?”
“옷 좀 여기서 갈아입어도 되겠나? 며칠 정도?”
“며칠 정도 옷을 갈아입는다고요?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에게 보여선 곤란한 옷이네. 조금 실례해도 되겠나?
“옷이야 갈아입으셔도 되긴 하는데…….”
곽일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당태세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노인이 옷꾸러미를 풀고 그 안에 있는 평상복을 갈아입는 것을 보던 곽일지는 책상위에 놓인 포증의 가면을 보고는 이게 무엇이냐는 듯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당태세는 옷을 갈아입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타뢰대에 올라갈 때 썼던 가면이네.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되니까.”
“네? 타뢰대에 올라가요? 노대협이 직접 비무초친에 참가했단 말입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이…무슨…세상에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당태세가 깜짝 놀라 곽일지를 바라보는데 곽일지는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당태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자네 왜 그러나? 자네 대신 누군가 올라가서 비무에 참가하기로 한 거 아닌가. 내가 그 일을 하기로 자임한 것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지금 노사께서 색(色)을 탐하실 나이입니까? 호걸이 미인을 좋아한다는 게 폄하될 일은 아니지만 위소저는 거의 손녀 뻘 되는 나이 아닙니까!”
당태세는 멍하니 곽일지를 보다가 그제야 곽일지가 왜 화내는지 알게 되었다.
“잠깐……잠깐! 그건 오해일세! 내가 왜 위소저에게 장가를 가는가? 나는 그냥 진상을 알고 싶어서…….”
“그걸 믿으란 말인가!”
“허, 세상에…….”
“이런 늙은 색마 같으니! 나를 이용해서 자신의 음욕을 채우려고 이런 짓을 꾸민단…….”
“나는 관심 없다니까!”
“거짓말 마시오! 그러면 왜 비무초친에 참가한 겁니까! 누구 때문에?”
“한소군 도려진.”
“뭐요?”
당태세가 곽일지를 바라보며 진정하라는 듯 손을 뻗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비무초친에 참가한 사내들을 해하는 사람은 백룡문의 호법 셋. 백룡삼교와 그 위에 있는 내주, 한소군 도려진의 지시에 의한 것이네.”
내공이 실려 묵직하게 아래로 깔려 들어가는 당태세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붙들어 매는 힘이 있었고, 흥분한 채 당태세를 노려보던 곽일지의 표정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곽일지는 말문이 막힌 듯 눈만 한참 동안 깜박이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도리질 쳤다.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이미 자네도 당하지 않았나. 내가 일합에서 이기고 나니 바로 돈을 주겠다는 제의가 오더구먼. 그리고 승자의 반은 이미 매수당한 듯 싶었네. 이렇게 대놓고 참가자 전원에게 돈을 댈 만한 인물이 누가 있겠는가?”
곽일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무리 괄괄한 무인이라도 명색이 물건을 만들어 파는 장사꾼인데 세상 돌아가는 깜냥은 모를 리가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좀 흥분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당태세를 바라보는 눈초리에 미안함이 깃들었다.
“제가 좀 흥분한 모양입니다.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아닐세. 하긴 내가 자네라도 비슷한 소리를 하였겠지.”
“노대협께서는 그렇다면 왜 이 일에 그리 관심을 가지시며, 이곳까지 걸음을 옮기신 겁니까? 필경 소주에 우연히 들리신 것은 아닌 듯 보이십니다만….”
당태세는 물끄러미 쌍웅권 곽일지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곽일지 역시 조용히 당태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당태세는 한참동안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다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고 곽일지를 바라보았다.
“곽대협,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비밀을 지켜줄 수 있겠나?”
“예?”
“나는 이야기가 발설되는 것을 원치 않거니와,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자네의 성정과 맞지 않을 수 있음이네. 자네 생각에는 내가 하는 일이 맘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어쩌면 역적이라 부를 수도 있는 내용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네에게 이 말을 하려는 이유는,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받고자 함이네. 어떤가? 자네는 내 사연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태세의 눈빛은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버금갈 정도로 한기가 감돌고 있었고, 어느새 곽일지는 연신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있었다. 긴장한 것이 역력해보였다.
하지만 사내는 당태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으니, 그 눈빛에는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겠다는 결의가 보이고 있었다. 젊은 피혁장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는 그의 표정을 보고 긴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네도 앉아서 이야기를 듣게나. 꽤나 오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니.”
늙은 무인이 덤덤하게 털어놓는 옛 이야기를 듣던 젊은 무인의 표정은 천변만화하고 있었다.
맨 처음에는 경악으로 시작하여 분노에 휩싸였고 나중에는 연민에 가득한 표정이 되더니만 종당에는 세 가지 감정이 모두 뒤섞인 말로 형연못할 표정이 되어 버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당태세가 말을 마치고 지친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자 곽일지도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사람의 천명과 악연이라는 것이!”
당태세는 물끄러미 곽일지를 쳐다보았다. 곽일지는 이를 악물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소생 곽일지, 모든 말을 이해하였고 당문주의 처지를 알겠습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당태세가 곽일지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하였다. 말의 여하에 따라 어쩌면 멸구(滅口)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저는 당문주께 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소인배는 될 수 없습니다.”
“그건 고맙구먼.”
“또한 이것은 청과 명의 문제 이전에 사람의 도리에 대한 문제 아닙니까? 저는 학문이 짧아 글은 잘 모르고 병서도 잘 모릅니다. 그저 기연을 만나 무공을 조금 알 뿐입니다만 스승과 제자의 도리 같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있고 장사를 하고 있으니 의리와 상도도 조금은 알지요.”
곽일지는 당태세를 쳐다보며 또렷하게 말하였다.
“지금 당문주는 도리도 없고 의리도 없는 이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신용없는 장사꾼과는 당연히 청산(淸算)을 해야하는 겁니다.”
곽일지는 장사꾼 다운 말로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초면인 사람이 지금 당태세를 응원해 주는 것이다. 평생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복수행을 완료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스산하던 마음을 가눌 길은 없었는데 오늘 당태세는 소주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이를 처음 만난 것이었다.
“자네는 백룡문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건 당문주의 말을 듣기 전입니다. 사람은 알고서 거래하는 것이 다르고 모르고 거래하는 것이 다른 법입니다.”
“자넨 상인이라기보다는 지사(志士)에 가깝구먼.”
“예?”
당태세는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심호흡을 한 뒤에 곽일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소주에서 조력자와 숨을 곳을 얻었으니 조금씩 자신의 할 일에 자신이 붙고 있었다.
“내가 곽대협 자네의 집에서 북경 무명수로 분하고 비무초친을 해야 하겠네. 그것은 괜찮겠는가?”
“염려 마십시오. 어차피 이 길은 주택가의 뒷골목이라 드나드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내게 말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네?”
당태세가 슬쩍 이마를 문지르더니 생각났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곽일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번 승부에서 만난 사람 중에 부후경이라는 권사가 있었네. 그가 나와 이야기하다 갑자기 백룡문 소문주를 보면서 자신은 포한(抱恨)때문에 이 비무에 참가하였다고 하더군.”
“아…부후경….”
곽일지는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당태세가 곽일지를 쳐다보자 곽일지는 슬쩍 턱수염을 쓰다듬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 부가의 말은 맥락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하였는데……지금 문주님의 말을 들어보니 뭔가 아귀가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그려.”
당태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실은 굉장히 꺼림칙한 소문입니다만…소문주가 안 좋은 추문에 휩싸여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말에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