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강남 소주(7)
이추송이 부축을 받으며 퇴장하는 것을 지켜본 북경 무명수, 아니 당태세는 천천히 타뢰대를 내려와 선수들이 있는 곳을 몸을 옮겼다. 그곳에서 작은 골목을 통해 돌아가려는 당태세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보시오. 북경 무명수, 어딜 가시오?”
“끝났으면 돌아가야지.”
“허허, 성미가 급하시구먼. 이번 비무에서 이긴 열여섯 명은 시합이 끝난 뒤 다 무대에 올라가서 관중들에게 인사를 할 것이오. 그리고 그때 다음 시합이 언제 열리는 지도 말해준단 말이외다.”
이번 비무 진행을 책임지고 있는 듯한 장년의 백룡문도가 다시 선수들이 있는 곳으로 북경 무명수의 발걸음을 안내하였다. 북경 무명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선수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대 뒤편, 단상의 뒤쪽에 마련된 공간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미 비무에서 진 사람들은 일찌감치 퇴장한 뒤였고, 승자들만이 앉아서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들어오는 북경 무명수를 맞이하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공부였소.”
“소주제일각을 이길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대단한 공부로군.”
기묘한 분위기였다.
그에게 말을 걸며 격려를 해주는 사람이 넷이고, 뒤에 앉아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이 넷이었다. 게다가 뒤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사내 중의 둘은 대놓고 당태세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놓고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지만 환영받기 껄끄러운 분위기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때, 백포를 입고 검은 두건을 눌러쓴 사내 하나가 슬쩍 당태세의 손을 잡더니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하였다.
“무명수, 잠깐 시간이 되시오? 저랑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요.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소만.”
“다음 시합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백포사내가 당태세 옆으로 다가가자 순간 그의 옆으로 다가왔던 네 명의 승자가 슬쩍 뒤로 물러섰다. 당태세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멀뚱히 서 있는데 백포사내는 친근하게 당태세의 옆으로 붙더니만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이번 비무초친에서 끝까지 올라가실 심산이십니까?”
“사내가 경쟁에 참여했으면 당연히 장원을 바라는 것 아니오.”
백포사내가 싱긋 웃으며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연달아 끄덕였다.
“좋은 호연지기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더 여쭤보겠습니다. 만약 지금 제가 일금(一金)을 들인다면 무명수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무슨 소리요. 나를 돈으로 사겠다는 이야기인가?”
그때, 바깥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탄성이라기보다는 놀라서 외치는 경악에 가까운 소리였다.
당태세가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밖으로 쳐다보니 한 사내가 타뢰대 위에 모로 넘어가 있는데 코와 입에서 피를 쏟으며 혼절해 있었다.
누워있는 사내의 뒤에는 희생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사내가 있었는데 승자인 사내의 눈빛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무명수 그대와 붙게 될 철염라(鐵閻羅) 손고해요. 저 자와 맞서 싸우느니 내가 제시한 금액을 받고 몸을 보전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대의 공부도 훌륭하지만 저 자는 격이 다르오.”
백포사내가 읊조리는 귓속말은 조용한 협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당태세는 슬쩍 뒤를 쳐다보더니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포사내의 붉은 입술이 옆으로 벌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렇다면 일금 은 1냥에……….”
“은원보 열냥.”
“뭐요?”
순간 백포사내의 웃던 입술이 삽시간에 일그러지는데 그를 빤히 쳐다보던 흑가면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백포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내 가치가 은원보 열냥만 못하다고 생각하면 조용히 사라지시오.”
“이보시게, 무명수.”
“그렇지 않으면 철염라인지 토염라인지 저 인간 아래 누워있는 사람 꼴로 만들어줄 테니까.”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백포사내는 감정을 통제 못하겠다는 듯 주먹을 부르르 쥐고 떨더니만 고개를 휙 돌리고 재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내 중 몇이 손뼉을 치더니 껄껄 웃었다.
“거 시원하구먼! 무공도 좋고 말주변도 훌륭하오, 무명수!”
변발에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는 껄껄대면서 자신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사내들을 바라보더니 이를 드러내었다.
“세상 많은 사람이 돈과 명리를 바라보지만 모두가 그곳에 목을 매는 것은 아니라네.”
그러자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사내 하나가 그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잘난 척 하지마라. 부후경, 어차피 네놈은 다음 비무때 나에게 쓰러질 것을.”
“우습구나 이국맹. 네 공부로는 나를 이기지 못해. 돈이라도 받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두 사내는 말을 마치자 서로 껄껄대며 웃는데, 보아하니 서로 예전부터 아는 사이 같기도 하였고, 돈을 받고 안 받고의 차이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하였다.
당태세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자 부후경이라 불린 사내가 가면을 쓴 당태세를 보며 히죽 이를 드러내보였다.
“이런, 그러고보니 내 소개가 늦었소. 내 이름은 부후경이고 와권(囮拳)을 쓰고 있소. 오(五)번을 받아서 초장에 시합을 끝내고 기다리는 중이라오.”
“북경 무명수요.”
“허, 별호로 말을 이어가실 요량이오? 본명과 무공이 어딘지도 말 못하고?”
당태세가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부후경은 재미있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비무초친에 꽤나 공들여 준비를 하신 듯 보이오이다. 그게 아니면 숨길 일이라도 있으신가?”
“말할 수 없소이다.”
북경 무명수, 당태세가 소리죽여 말하자 부후경은 씩하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좋구먼. 그 각오라면 마지막 결승까지 노리고 있다는 거겠지? 아까보니 공부가 상당하던데.”
당태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부후경와 주위에 있던 이들이 모두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후경이 주위를 돌아보며 두 손을 활짝 펴 보이는데, 그 동작은 아무래도 당태세가 아니라 뒤에 팔짱을 끼고 있는 네 명을 보면서 하는 도발 같았다. 그제야 당태세는 따로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네 명이 돈을 받은 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잘 보게! 돈을 받은 이들과는 각오가 다르지 않는가! 어차피 나도 이 비무초친은 끝까지 올라갈 생각이오. 위소저도 위소저지만 나 역시 결승까지 올라 끝을 볼 것이거든!”
“위소저가 목표가 아니면 왜 이곳에 참가하였소?”
당태세의 말에 부후경은 슬쩍 손가락을 뻗어 타뢰대를 가리켰다. 그 순간 장내에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다시 터지기 시작했다.
청색 장포에 검은 바지를 입고 나온 관옥 같은 미모의 청년이 타뢰대를 밟자 구경나온 여인들의 비명과 함성이 마치 시장터를 방불케 하였다. 다름아닌 백룡문 소문주의 등장이었다.
“포한(抱恨)이지.”
그때, 부후경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당태세의 뒷목에서 서늘하게 울렸다.
백룡문도의 비무개전이라는 소리가 짧게 무대 위에서 울려 퍼졌다. 백룡문의 소문주는 몸을 날려 적에게 쾌권을 퍼붓기 시작했다. 짧고 맹렬한 권각을 발하는 소문주의 공력을 바라보며 당태세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
“다음 열여섯 명의 승부는 이틀이 지난 뒤 사시(巳時)부터 시작이오! 모두들 늦지 말고 왕림하여 더욱 흥미진진한 비무를 감상하시기를 바라겠소! 누가 소주 제일의 무인이 되어 소주 제일의 귀인을 얻을 것인가! 모두 기대하시오!”
잡극의 소개와 같은 인사가 끝나자 서른두 명이 참가한 비무초친의 서장이 막을 내렸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썰물이 빠져나가듯 사자림 앞에서 사방으로 흘러나가는데, 당태세는 타뢰대 위에서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 자신의 짐을 챙겼다. 그때, 그의 뒤에 서 있던 청포의 사내가 그를 보며 손을 모아 예를 취하였다.
“비무에서 보여주신 초절한 무공, 잘 견식하였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다름아닌 백룡문 소문주 왕보휘였다.
사내는 깔끔하게 생긴 모습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깍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승리를 따낸 그의 무위는 깔끔하면서도 정확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었다.
당태세는 슬쩍 묵례를 취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소문주 왕보휘의 뒤로 미끄러지듯 사람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노인 세 명과 매혹적인 모습의 중년 미부였다. 당태세는 단박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한소군 도려진, 그리고 백룡삼교(白龍三蛟) 아닌가.’
한소군 도려진은 나이를 먹었어도 미모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고, 세 호법은 북경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신위가 멀쩡해 보였다. 전란중에 동족을 배신하고 산 좋고 물 좋은 소주까지 내려온 보람이 있어 보였다.
그때, 도려진이 당태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참으로 훌륭한 공부였소. 제 자식도 대협의 무위를 본받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당태세는 말없이 도려진을 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겨우 갈무리한 당태세는 몸을 돌려 자리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백룡문주 왕양성의 거취를 모르는 판국에 한소군 도려진부터 손을 대는 것은 섣부른 짓이었다.
소주 전체가 백룡문을 칭송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모든 이들의 행방을 알고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을 친 뒤에 삽시간에 일망타진을 해야 자신이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터덜터덜 자리를 뜨고 있는 북경 무명수의 뒷모습을 보던 도려진은 이내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더니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잘하였다. 오늘처럼만 한다면 장원에 이를 것이야.”
“모두가 어머님의 덕이옵니다.”
“착하기도 하지.”
당태세는 귓가로 흘러드는 대화를 들으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무척이나 다정한 모자지간의 대화였지만 좋게 말하면 정이 넘치고 과하게 말하면 자식을 싸고 도는 듯한 말투였다.
“한소군이 원래 자기 소유는 절대로 남에게 주지 않는 성미였지.”
당태세는 예전 북경에서 알던 시절의 한소군 도려진의 성품을 추억하다가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에 흐르는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기묘한 살기를 내어 보이며 그를 따라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태세는 피식 실소를 지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곽일지가 처음이 아닐 것이요 내가 마지막도 아니겠지.”
당태세는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걸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를 따라오는 살기는 조금씩 더 실체를 뚜렷하게 만들었고 그럴수록 당태세는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소주의 얽혀있는 골목은 이내 노인의 자취를 삼켜버렸다.
결국 당태세가 도달한 곳은 기나긴 회랑처럼 어둡게 뻗어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조금씩 비틀리며 이어진 긴 골목의 끝에는 잡초가 뒤엉킨 또 다른 길이 나 있었는데 그 곳에는 오래되어 쓰지 않는 우물터가 하나 있었다.
당태세는 돌 뚜껑을 닫아놓은 우물에 털썩 주저앉아서 자신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앉아서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섯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우물터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흑가면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란 눈치였다. 당태세는 옷꾸러미를 매달고 왔던 지팡이를 천천히 뽑으며 다섯 사람을 바라보았다.
“뭘 놀라서 기다리고 있느냐. 살수(殺手)라면 살수답게 일을 하거라.”
당태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섯 명이 품 안에서 팔뚝 길이의 박도(朴刀)를 꺼내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골목에서 보는 장병기였다. 당태세는 그들이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바라보며 지팡이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검은 가면을 쓴 당태세가 좌우를 바라보더니 준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와서 덤벼라, 기다리다 죽기 싫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