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07화 (107/226)

107. 타뢰대 (1)

백룡문도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한 명의 신영이 계단을 올라와 타뢰대 안에 들어와 가운데 우뚝 몸을 세웠다.

그림자는 검은 방포와 붉은 바지, 거기에 검은 피혁화를 신은 단단한 체구의 사나이였는데 땋은 변발은 옷 속으로 밀어넣어 걸리적거리지 않게 하였고, 얼굴에는 하얀색으로 찡그린 눈썹과 이마의 초생달을 그려넣은 시커먼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다름 아닌 송나라의 명판관, 포증(包拯)의 가면이었다. 가면의 참가자를 본 좌중의 관객들은 잠시 웅성대더니만 이내 기름을 부은 들불처럼 확 하니 사방에서 열기가 끓어올랐다.

“옛날 소설에 미친 놈이 나왔구만! 가면에 무명수라니.”

“재미있지 않은가? 아주 제대로 꾸미고 나왔는데?”

“내 돈은 저놈에게 걸겠다! 장원해라!”

“너무 과한 것 아니냐?”

관객들이 고함을 지르고 야유와 찬사를 동시에 부리는데 흑가면의 사내는 말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동쪽 자신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이름이 북경 무명수가 뭐냐! 작명이 형편없구나!”

당태세는 흥하고 콧방귀를 낀 채 고개를 들고 백룡문도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급한 김에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었지만 나름대로는 짧은 시간 잘 지었다고 생각했던 별호였다.

“……무명수가 어때서.”

그 때 백룡문도가 다시 북쪽을 가리키며 또 한 명의 참가를 소개하니 당태세와 맞서게 될 십팔(十八)번의 권사였다. 백룡문도의 낭랑한 목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흑면의 권사에게 맞서는 또 하나의 걸물!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서로(西路)의 이대가! 귀신만 보는 권각이 천하를 얻는구나! 소주 제일각(第一脚), 이추송!”

백룡문도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한 명의 그림자가 껑충하니 무대 위로 도약하여 올라오는데, 올라오자마자 사방으로 보이지도 않는 권격을 뿌리고는 한 바퀴 공중제비를 하더니만 땅에 착지하며 보이지도 않는 빠른 발차기를 연거푸 사방에 날려댔다.

관객들의 반응은 말 그대로 우레 속에서 울려퍼지는 파도소리와 같았다.

“이겨라! 이대가! 팔섬번의 위력을 보여줘라!”

“귀신도 잡는 쾌권이로다!”

“가면쟁이를 박살내버려!”

녹색장포와 흰 바지를 입은 사내는 씩하니 가면을 쓴 당태세를 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내는 건들건들 다가오더니만 흑가면을 쓴 당태세를 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보였다.

“이번에 지기로 한 쌍웅권이 아닌가보지?”

“내가 대신 그 표를 샀소이다.”

녹색장포의 권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곽씨는 무슨 일을 해도 졌을게요. 노형도 괜히 다치지 말고 힘에 부치면 포기하시오. 어차피 올라갈 사람은 내가 될 것이고 난 두 번 싸우는 대가를 받았거든.”

이 사람도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대체 몇 사람에게 돈을 뿌렸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당태세는 이번 비무가 생각보다 많이 윗선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형씨는 다음 번 싸움에서 지기로 한 모양이구려.”

녹생장포가 씩하니 웃으며 당태세의 말에 확신을 더하여 주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짐을 지며 나직하게 말하였다.

“잘 되었구려. 노형은 한 번 싸우고 두 번 싸우는 값을 받게 될 것이니.”

“허, 기세등등하구먼? 그 가면안에 무슨 재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팔섬번에게는 안 될게요.”

녹색장포는 말을 마치자마자 훌쩍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그대로 낮게 몸을 낮추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당태세의 목과 가슴을 향해 치켜 올렸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하늘로 치솟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 섰던 백룡문도가 손을 하늘로 치켜올렸다가 재빠르게 땅을 가리켰다.

“비무 개전!”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백룡문도가 무대 밖으로 내려갔다.

당태세는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두 발을 굽히고 양 무릎을 바싹 붙혔다. 이추송이라 불린 녹색장포의 사내는 엉거주춤 앉은 자세 그대로 눈만을 번득이며 당태세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팔섬번(八閃番)이라 이거지?”

쾌권(快拳) 팔섬번의 위력은 이미 당태세도 젊은 시절부터 들었던 권법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오며 바람처럼 터지는 쌍수 연격(連擊)이 순식간에 사람을 너덜대는 넝마로 만들어버린다는 빠른 권법이었다.

그 권이 전란중에 소실되지 않고 이렇게 명맥이 이어진다는 것에 당태세는 묘한 희열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당태세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쾌권을 쓰면서 어찌 별명은 소주제일각이란 말인가?”

순간, 이추송의 몸이 그림자보다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당태세의 생각도 거기서 끊겼다. 순식간에 한 장 가까운 간격을 미끄러지듯 도약하여 들어오는 이추송의 일권(一拳)은 빠르고 더할 나위없이 깔끔했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좋을시고!”

순간, 일권이 끊어지기도 전에 이권과 삼권이 거의 동시에 당태세의 가슴과 목을 향해 쏟아졌다. 상하로 나눠진 양주먹의 현란한 연격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십수 발이 쏟아졌다. 그것도 눈 한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이름높은 팔섬번의 연환격이었다.

당태세의 두 손 역시 현란하게 움직이며 들어오는 이추송의 송곳 같은 장권들을 쌍장으로 엇갈려 받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추송과 당태세가 합을 맞춘 듯이 짧은 발걸음으로 얼음판을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서자 관중들은 순식간에 경탄과 함성을 발하기 시작했다.

“복면인도 꽤 하는군요. 이추송이 한 합에 이길 줄 알았는데.”

단상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짙은 수염의 사내가 옆에 앉은 미부(美婦)를 돌아보며 웃었다. 백룡문의 내주(內主)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름다운 부인의 눈빛만은 맹금의 눈처럼 복면인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재미있게 되어가네요.”

번개처럼 질러오던 이추송의 권이 갑자기 끊기더니 이추송의 권이 머리 위를 돌며 손을 죽 펼쳐 당태세의 목을 찔러왔다.

당태세는 여전히 권을 편 채로 들어오는 이추송의 손을 막으며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그 순간, 이추송의 무릎이 번개처럼 올라오며 당태세의 고간(股間)을 찍어 올렸다.

‘어딜!”

당태세 역시 무릎을 세워 이추송의 슬각을 막아내고 쌍장을 연거푸 앞으로 날리며 반격에 나섰다.

한없이 밀리던 복면인이 일순간 앞으로 나서며 무릎을 낮추고 허리의 탄력으로 쌍장을 연거푸 날리자 이추송은 자신의 권을 회수하고 주먹과 무릎으로 복면인의 장에 맞섰다.

복면인의 장법은 이추송의 권법만한 빠르기는 없었지만 일장 일장에 실린 무게와 파괴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사내가 발을 내디디며 장을 뻗을 때마다 옷자락이 펑펑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순간 관객들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다시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 가닥 하는구나 무명수!”

“복면 쓴 효험이 있네!”

복면인이 일장을 날리며 권을 회수하기도 전에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다리를 소퇴로 만들어 땅을 끌고 다시 앞으로 튕겨나가며 충권을 던졌다. 다리가 걸려 중심을 잃으면 일권에 갈빗대가 다 박살날 지경의 강권이었다.

하지만 소주제일각 이추송의 공부도 만만치 않아 들어오는 소퇴를 슬쩍 발을 들어 피한 뒤 그대로 진각을 밟으며 몸을 휘돌리니 이추송은 팽이처럼 공중에서 회전하여 착지하여 충권을 펼치며 앞으로 날아가는 당태세의 뒤를 잡았다.

그 순간, 이추송의 몸이 당태세의 등을 향해 바싹 붙더니만 기이하게도 자신도 등을 돌렸다.

두 사내가 등을 맞대는 묘한 형상을 이루자마자 이추송은 몸을 낮추더니 마치 말이 뒷발질을 하듯, 낫이 껑충한 풀을 베듯 사선으로 뒤차기를 하며 무릎을 구부려 당태세의 뒷머리를 노렸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당태세의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며 휘어져 들어오는 이추송의 뒷차기를 그대로 막아내며 자세를 바꾼 것이다. 이추송은 자신이 절기가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자 일순간 표정을 굳히며 다시 자세를 낮게 취하고 쌍권을 앞으로 향하였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공방이었다.

“…착각(戳脚)이구나. 이 발차기가 팔섬번하고 섞여 나온단 말인가.”

흑가면이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자신도 슬쩍 자세를 낮추며 한 팔은 이추송을 향하고 또 다른 팔은 등 뒤로 뻗으며 손바닥을 날개처럼 활짝 펼쳤다.

기묘한 자세지만 투지가 넘쳐흘렀고, 그 모습 또한 당당하니 사람들의 입에서 또 다른 감탄이 쏟아졌다. 타뢰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들의 눈은 두 사람의 움직임만을 좇고 있었으니, 한눈을 파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저 자세는 특이하구먼. 무슨 짐승의 자세 같기도 하고….”

단상 주변에서 누군가 수군거리자 말없이 흑가면의 자세를 바라보던 귀부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충룡문의 묵룡도호권(墨龍屠虎拳)?”

여인의 혼잣말을 듣기라도 한 듯 흑가면이 뒷발로 무대를 박차고 팔섬번의 이추송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앞으로 뻗었던 주먹이 옆으로 움직이며 몸이 공중에서 돌아가는 듯 보이더니 일순간 뒤로 뻗었던 사내의 다섯 손가락이 일순간 쇠갈퀴처럼 이추송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이추송은 재빠르게 몸을 틀며 떨어지는 장을 피한 뒤 다시 발에 힘을 주고 예의 팔섬번의 쾌권을 흑가면의 가슴팍에 때려 넣었다. 순간 흑가면 역시 몸을 뒤로 빼지 않고 그대로 양 주먹을 앞으로 뻗으며 이추송을 향해 쾌권을 날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서 번개처럼 주먹이 오가며 두 사람의 몸이 오른쪽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마치 두 마리 용이 꼬리를 물고 회전하듯 돌면서 서로의 가슴과 얼굴의 요혈을 향해 권을 날리기 시작하는데 들어가고 나가는 권이 일체의 공방(攻防)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상대방의 권이 수십방이 오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권은 서로에게 한 대도 맞지 않은 채 서로의 권을 어깨와 손목을 통해 흘려내는 중이었다.

두 사내의 주먹이 얼마나 빠른지 둘러싸고 있는 관중들은 그저 두 사람이 제자리에서 맴돌며 두 팔의 잔상이 오가는 것만 보일 지경이었다. 이제 관중들은 함성도 응원도 그친 채 멍하니 눈을 뜨고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볼 뿐이었다.

일순간 이추송의 기합과 함께 낮은 발차기와 무릎이 연달아 흑가면의 사내를 향해 뻗어 올라갔다.

순간 흑가면의 손가락이 갈퀴가 되어 들어오는 이추송의 무릎과 발을 차내고 앞으로 번개같이 뻗어 이추송의 목을 휘감는데, 순간 이추송이 몸을 뒤틀며 흑가면의 손아귀를 벗어난 뒤 한 바퀴 공중제비를 하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어느새 흑가면의 손아귀안에는 찢어진 녹색 장포 한 조각이 잡혀있었다.

“팔섬번만 빠른 것이 아니다.”

흑가면이 손에 잡았던 천조각을 무대에 떨구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추송은 순간 자신의 가슴팍의 옷이 한 움큼 찢어진 것을 확인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흑가면은 손을 까닥거리며 이추송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다시 우렁차게 무대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추송이 이를 드러내며 다시 낮게 자세를 잡았다.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힘을 넣은 이추송은 아까와는 반대로 천천히 발을 교차시키며 흑가면 앞으로 다가섰다.

흑가면 역시 몸을 낮추고 고양이가 걸어가듯 가볍게 발끝을 들고 이추송을 향하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아지자 관객들의 함성이 일순간 멎었다. 마치 한순간이 몇 년의 세월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순간, 이추송의 몸이 앞으로 움직이며 권을 세차게 내질렀다. 그와 함께 몸이 번개처럼 돌아가더니 왼발이 청룡도처럼 공기를 베며 옆으로 날아 흑가면의 머리를 노렸다.

흑가면이 슬쩍 몸을 뒤로 젖히는 순간 다시 한 번 몸을 돌린 이추송의 오른발이 낮게 날아오며 흑가면의 허리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그 순간 흑가면은 그대로 땅에 엎드리듯 몸을 낮추며 이추송의 오른발을 머리 위로 흘려보냈다. 연이어 흑가면의 쌍장이 무대 바닥을 치며 다시 상체가 불쑥 앞으로 튀어나오는데 흑가면의 몸은 바로 돌아가는 이추송의 가슴팍을 향하고 있었다.

흑가면의 주먹 두 개가 같이 붙어 쌍권(雙拳)의 형세로 이추송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추송의 눈이 둥그래지며 번개같이 날아오는 흑가면의 권을 가슴으로 받았다.

소주제일각의 몸이 천천히 하늘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무대 바닥에 등부터 떨어졌다. 컥하는 소리와 함께 이추송의 몸이 바닥에 붙었다가 다시 다리가 하늘로 치솟더니 훌쩍 뛰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추송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뒤였다. 흑가면은 천천히 자세를 풀더니 두 손을 깍지끼고 이마 위로 올렸다.

“좋은 공부요.”

“좋은…공부….”

이추송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소주제일각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간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지듯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친듯이 승자의 이름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무명수! 무명수!”

“북경 무명수!”

흑가면을 쓴 사내가 한 손을 위로 번쩍 올리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모두 손을 들며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검은 수염의 장부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옆의 미부(美婦)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실로 뛰어난 권사로군요. 이번 비무초친에 걸물들이 꽤 많이 나온 모양입니다. 어떻게 보시오. 도내주?”

“그러게 말이에요. 장군님. 재미있는 결과가 많이 나올 것 같네요.”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에는 웃음기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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