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06화 (106/226)

106. 강남 소주(6)

백룡문주는 장원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평탄한 백룡문의 장원중 유일하게 언덕배기로 이루어져 있는 정원은 푸른 잔디를 그대로 깎지 않고 내버려 둔 채 언덕의 정상에 작은 정자 하나가 놓여 있는 모양새였는데, 아래에서 정자를 올려다보면 마치 성벽의 돈대(墩臺)를 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근처를 지키는 호법도 없었고 시위도 없었다.

종리세리가 안내하는 이를 따라 올라갔을 때 백룡문주는 차를 따르는 시비 하나만을 옆에 대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북경의 선무사 천호께서 이 먼 곳까지 무슨 용무시오.”

백룡문주 왕양성은 또렷하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어조로 종리세리를 맞이하였고, 종리세리는 앞의 작은 의자에 앉아 시비가 준비한 다른 찻잔을 받았다.

왕양성은 가늘고 긴 골상에 얇은 수염을 지닌 호리호리한 인물이었다. 무(武)보다는 문(文)에 가까운 인상이었지만 도포 아래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골격은 그가 결코 무공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들을 멀리 물리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대는 칼을 차고 있지 않소?”

백룡문주의 말에 종리세리는 말없이 칼을 풀어 검대를 잔디아래 내려놓았다.

백룡문주가 슬쩍 눈을 들어 시비를 쳐다보자 시비는 가녀린 허리를 굽혀 종리세리의 칼을 감싸쥐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종리세리는 찻잔에 손을 올리고 백룡문주를 돌아보았다.

“귀린갈 당태세를 아십니까?”

종리세리는 에둘러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고, 그의 어법은 그의 도법과 같았다.

백룡문주는 종리세리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차를 한 잔 입에 머금고 멀리 있는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조정의 관리를 쳐다보았다.

“옛 친구의 별호로군요. 그대는 그를 어찌 아시오?”

“그가 살아있습니다.”

백룡문주 왕양성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사내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손을 멈춘 뒤 하늘을 보고 잠시 숨을 크게 골랐다. 종리세리는 백룡문주의 모습을 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남의 주통산, 개봉의 오자평, 무창의 진윤타, 그리고 장사의 전영포가 그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그가 죽인게 맞소?”

“거의 확실합니다. 장사에서는 저와 손을 섞은 적도 있소이다.”

“그래요?”

“다리를 절지만 천하의 고수였소. 아시는 분이 맞습니까?”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의 발 아래 있는 잔디를 흔들었다. 왕양성의 시선은 종리세리에게 가 있었지만 종리세리를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나이많은 백룡문주는 멍하니 과거로 자신의 눈을 돌려 그곳에 있던 당태세의 흔적을 되돌아보는 게 틀림없었다.

“……다리를 저는 것이야 모를 일이오만 천하의 고수는 맞지.”

백룡문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허탈한 한숨이 같이 더해졌다. 사내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해 보였는데 오히려 그런 사내의 모습에서 종리세리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생겼다.

“그가 원하는 것이 뭡니까?”

“복수요.”

왕양성의 대답은 종리세리의 물음과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종리세리는 말없이 눈을 크게 뜨고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데 그의 표정을 보던 백룡문주는 사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국장군, 그것도 서림각라부에서 나왔다 하셨소. 그 분께서 조사를 명하셨고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연유를 알고 계시지 않소이까.”

“그대들 여덟 문주가 청(淸)에 귀부했다는 사실과 면사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는 바가 없소이다. 당태세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소.”

“그럼 귀린갈의 이름을 어디에서 들으셨소?”

“결투를 하기 전에 당태세 본인에게 들었소.”

백룡문주 왕양성의 착잡하던 얼굴에 희미하니 미소가 올라왔다.

“귀린갈 답도다. 사내가 변한 것이 없구나.”

“그가 왜 여덟 문주의 목숨을 노리는 겁니까?”

종리세리의 메마른 목소리가 상념에 빠진 백룡문주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사내의 차가운 시선을 보던 백룡문주 왕양성은 슬쩍 자세를 고치더니 차를 다시 들이켰다.

어느새 백룡문주의 표정에서 여유와 권태가 사라지고 옷 속에 감춰두었던 벼려진 칼날 같은 눈빛이 슬며시 눈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호께서 그 연유를 듣기를 원하시오?”

종리세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동안 종리세리를 노려보던 백룡문주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며 눈을 깜박이더니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찻잔에는 더 이상 차가 남아있지 않았다.

사내는 물끄러미 빈 찻잔을 바라보더니 아래 펼쳐진 장대한 호수와 푸른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백룡문주의 입이 열리며 깊은 숨을 들이키자 잊고 있던 과거지사가 한숨과 함께 늙은 문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십칠 년 전의 이야기요.”

***

“숙부님은 내일 사자림에 가실 겁니까? 내일부터 비무초친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숙부님은 당신이 얌전하시면서도 사람들 치고 박는 건 은근히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허허, 싸움을 누가 좋아하느냐. 그냥 비무라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그래서 내일 언제쯤 가실 겁니까? 저는 아침 먹고 벗을 만나 같이 가기로 했는데 말입니다.”

어느새 아룡은 술집에서 막역지우를 만나 도원결의라도 한 모양이었다. 당태세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고는 싶다만 하루종일 서 있어야 할 터인데 내가 그 일이 감당이 되겠느냐.”

“아무래도 그러시겠죠? 그럼 내일은 제가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숙부님은 나중에 시간 되면 슬슬 보러 오시면 될 겁니다.”

“오냐,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무두리. 젊은 네가 즐기고 재미있는 것이 우선이니라. 나는 내가 알아서 보고 돌아다닐 테니 말이야!”

“네,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요!”

일단 말이 끝나면 다시는 물어보지 않는 게 아룡의 장점 아닌 장점 중 하나였다. 당태세는 슬쩍 자신의 침상 아래 묶어놓은 새 봇짐을 살펴보았다. 오늘 아침 아룡이 밖으로 나간 틈을 타 사온 옷들이었다. 옷이야 갈아입으면 그만이었지만 객잔 말고 다른 곳이 필요했다.

아룡과 동선이 마주치지 않는 다른 곳을 한 군데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와 별개로 또 다른 물건을 하나 더 사야 하는데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다. 당태세는 입속이 바짝 말랐다.

‘십칠 번이면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지는 않으렷다. 조금 시간은 있겠구먼.’

당태세는 내일 아침 아룡이 아무쪼록 일찍 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어머, 선무사 천호께서는 벌써 용무를 마치셨습니까?”

종리세리가 묵묵히 땅을 보며 백룡문의 장원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주라 불린 아름다운 미부는 종리세리가 자신을 돌아보자 반갑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여인의 몸에서는 말리화 향내가 은은히 풍겨왔다.

“문주께서는 원하시는 대답을 들려주셨습니까?”

“듣고자 하는 답을 들었습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네요.”

여인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종리세리를 노려보듯 바라보며 슬쩍 옷을 여몄다. 종리세리는 그녀가 자신의 입을 통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어하는 기색을 느꼈지만 별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백룡문주 왕양성이 말한 십칠 년 전의 이야기는 지금도 말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종리세리 자신이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종리세리의 표정을 보던 여인은 눈을 반짝이더니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내일부터 백룡문이 주최하는 비무초친이 사자림 앞에서 열린답니다. 천호께서도 공사다망하시겠지만 시간을 내주신다면 귀빈으로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배려 감사드리오.”

“뵈었으면 좋겠군요.”

여인의 깊은 눈동자와 묘한 표정을 보고 있던 종리세리는 슬쩍 고개를 숙이며 몸을 돌렸다.

“시간이 되면 들러보지요.”

문을 향해 나가는 종리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여인은 고개를 돌려 멀리 언덕처럼 솟아있는 정자를 바라보았다. 여인의 눈매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

어둡고 조용하던 밤은 동녘의 미명과 함께 시나브로 사라지고, 아침의 새소리와 함께 들창 너머 환한 빛이 침상으로 넘어왔다.

아룡은 이미 옷을 꾸며입고 바깥으로 나간 지 오래였고, 노인은 가만히 앉아 문을 열어둔 채 객잔 주인이 자리를 비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의 옷은 검은 장포에 붉은 바지, 그리고 검은 피혁화를 신은 모양새였다.

오른발의 보철은 붉은 바지안에 감춰 밖에서 알아보는 이가 없도록 하였다. 당태세는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날려 소주 시내로 나섰다. 노인은 화급히 시장쪽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원하는 물건이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노인의 구미에 닿는 물건을 아무리 찾아봐도 구할 수가 없었다. 진종일 시장 바닥을 헤매고 다닐 수도 없었다. 이제 곧 비무초친의 첫 시합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제길. 이렇게 되면 얼굴에 분칠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당태세는 더운 햇살 아래에서 이마를 닦으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였다. 아무래도 이대로 있어서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았다.

노인은 사자림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가는 길에 먹이라도 있으면 얼굴에 먹칠을 하던, 안되면 긴 천으로 얼굴을 싸매던가 할 요량이었다.

“세상에 어떤 미친 놈이 늙은이가 비무초친을 하게 만들겠냐 말이야.”

그때였다. 당태세의 눈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형형색색 요란한 의상에 화려한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이 한눈에 봐도 예인(藝人)의 패거리였는데, 자신과 가는 방향이 비슷한 것이 사자림 근처에서 공연을 벌일 모양인 듯 보였다.

아무래도 저쪽에 부탁해서 얼굴에 그림이라도 그려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당태세는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순간, 뭔가를 발견한 당태세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지더니 그들을 향해 돌진하듯 뛰어갔다.

노인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던 사내들이 화들짝 놀라는데, 노인은 허리춤의 전대에서 쇄은을 꺼내더니 한 사내의 손을 덥석 잡고 그에게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자네 쓰고 있는 것 좀 나에게 팔게나! 지금 당장!”

***

사자림 앞의 타뢰대는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미 비무초친은 시작된 지 오래였고, 선수들은 갖은 재간을 동원하여 타뢰대 위에서 자신들의 공부를 겨루고 있었다.

생각보다 금방 승부가 나는 경우도 있었고, 지지부진하게 오래 시간을 끄는 권사들도 있었지만 관객들은 평생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광경에 이미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버린 상태였다.

뒤쪽에서 경기를 진행시키는 백룡문도와 입회객들 역시 밀려드는 관객과 비무초친의 참가자들을 떼어놓고 승패를 확인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때 한 명의 사내가 참가자들 사이에서 훌쩍 뛰어나오더니 진행자의 책상 앞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명부를 작성하던 사내가 자신의 앞에 온 사내를 바라보더니만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허! 가면까지 사서 쓰고 왔소? 대단하구먼. 진짜 옛날 비무초친을 보는 것 같네!”

가면을 쓴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타뢰대를 바라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내 번호가 십칠 번이오. 아직 시작하려면 멀었소?”

“지금 십삼 십사 번이 겨루는 중이요. 딱 맞게 오셨구만. 그래, 십칠 번이라고 하셨소?”

명부를 작성하던 백룡문도가 명부를 훑어보다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다시 가면 쓴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가면 쓴 사내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십칠(十七)의 증표를 보여주자 백룡문도는 다시 명부를 보고 중얼거렸다.

“잠깐…십칠번이…쌍웅권의 곽일지…였는데? 누구시오?”

“아. 십칠 번은 쌍웅권에게서 샀소이다.”

“아, 매매를 하셨소? 그럼 성함을 빨리 적어야지. 별호와 성함이 어찌 되시오?”

“별호와 성함…귀린….”

“귀…뭐요?”

당태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서기를 보며 말하였다.

“그러니까 내 별호는….”

***

십오, 십육의 경기는 삽시간에 끝나고 사람들의 함성이 사그러지자, 타뢰대 위로 진행을 맡은 백룡문도가 가볍게 몸을 날려 올라갔다. 다름 아닌 깃발 아래에서 호객을 하던 백룡문도였다.

이제 관중들의 분위기는 달아오를 만큼 달아올라 참가자도 아닌 백룡문도가 올라왔음에도 두 손을 올리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는 사방에 운집한 관중과 단상 위에서 비무초친을 바라보는 귀빈들을 향해 인사를 꾸벅하더니 두 손을 활짝 펴고 우렁찬 목소리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 이제 오늘의 비무초친도 중반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현란한 무공을 보여준 모든 참가자들에게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보여지는 두 명의 권사는 실로 비무초친에 어울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드디어 이번 비무초친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소주제일미를 구하는 복면인이 나타났으니!”

백룡문도가 하늘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불쑥 치켜 올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룡문도의 손에 집중되었다. 백룡문도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가리켰던 손을 내리며 서쪽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사내의 쩌렁쩌렁한 소개가 타뢰대를 울렸다.

“하늘 아래 보일 것은 오직 내 실력뿐! 그 이름하야 북경 무명수(無名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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