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05화 (105/226)

105. 강남 소주(5)

“구명(救命)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곽일지라고 합니다. 쌍웅권의 곽일지라고, 그냥 제가 사는 동리에서만 조금 이름이 붙어 있는 정도지요.”

곽일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당태세를 보며 연신 감사를 표하였다. 비록 지금은 의자를 만나 멀쩡한 듯 입을 열고 있었지만 의자가 바라본 곽모의 상세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한 치만 옆으로 갔으면 큰 혈관을 찍었을 겁니다.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그냥 죽었을거요. 천우신조라 생각하시구려.”

“제가 노대협을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로군요. 허허.”

조금 전 의자에게 죽을 뻔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너털웃음 하나로 넘기는 것을 보아하니 곽일지라는 사람의 성정은 무척이나 호탕한 듯싶었다. 당태세는 그나마 말이 시원시원 통하는 사람을 만나 다행이라 생각하는 중이었다.

“내가 소주에 들렀다가 비무초친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동해 타뢰대까지 갔다가 곽대협의 행동을 보고 쫓는 이들이 수상해 집까지 뒤를 밟은 것이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보신 바 그대로입니다.”

곽일지가 말했다.

“저는 가전으로 전해지는 쌍웅권을 익히고 사는 사람입니다. 본업은 마구와 가죽신을 만드는 피혁장이지요. 본래 용력도 좀 있고 무공도 배운 터라 가끔 사람들을 돕곤 합니다. 일전 정성공의 난때 의병에 들어가기도 했고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느 동네에서나 봄 직한 일 잘하고 힘 잘 쓰는 성실한 청년 같았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위장군댁의 위소저 신랑을 뽑은 비무초친이 열린다고 해서 관심을 가졌지요. 제가 언감생심 장군댁 따님을 원하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합니다만 일단 무공이 있으면 된다고 하고…저도 장가 좀 들어보고 싶어서….”

사내는 말을 하다가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열심히 겨루어서 예선을 통과하고 서른두 명의 경쟁자에 속하게 되었지요. 기분이 좋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접수를 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그 놈들이랑 말싸움이 붙은 겁니다.”

“뭐라고 하더이까?”

곽일지는 조금 전 일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더니 짜증이 나는지 인상부터 쓰기 시작했다.

“은 한 냥을 줄 테니 첫 경기에서 지라는 게 아닙니까? 이미 상대방하고는 약조가 다 되어 있으니 신명나게 싸우다가 마지막에 한 대 맞고 일어나지 말라는 겁니다. 화가 솟구치죠. 아니, 제가 그러려고 무공을 닦은 것도 아니고 돈이 필요해서 올라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싫다고 거절하고 가는 것을 보았소.”

“노대협께서 보신 바 그대로입니다. 거절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놈들이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만 갑자기 허벅지에 칼침을 놓는 게 아닙니까. 제가 결사적으로 도망을 쳐서 그렇지 그 놈들 저를 죽일 요량이 분명했습니다.”

당태세는 슬쩍 이마를 쓰다듬더니 생각을 정리했다.

예전에도 비무는 있었고,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것은 있었지만 매수가 실패했다고 사람까지 죽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더군다나 당태세가 목격한 것을 따져보면 당태세가 해치운 괴한들 역시 청부를 받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누군가 일을 조직적으로 꾸미는구먼.”

“네? 누가 말입니까?”

“그것까지는 모르겠소.”

말을 그렇게 하였지만 당태세는 대충 심중에 범인이 누구인지 의심을 하는 중이었다. 보통 매수를 하는 쪽은 자신이 이기거나 다른 이를 도우려 하는 법이었다. 결국 당태세가 접한 정보에 한정하여 결론을 내리자면 이런 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사람은 하나였다.

“백룡문 소문주도 이 비무초친에 참가한다 들었소만.”

당태세의 말에 곽일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곽일지는 말하기 어려운 것을 이야기한다는 듯 신음을 내더니 상처입은 다리를 손으로 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믿기 힘듭니다. 소주의 정도무문이라면 백룡문인데 그곳에서 그런 일을 벌이기야 하겠습니까.”

“정도무문이야 백룡문주이지 소문주겠소?”

“그렇진 않을 겁니다. 백룡문의 소문주 왕보휘 역시 사람의 행동거지가 조신하고 겸손하다 들었습니다. 차라리 유자(儒者)에 가까운 인물이라고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흉계를 꾸밀리가요.”

“그렇소? 그럼 누가 이런 일을 꾸민단 말인가?”

당태세의 말에 곽일지는 깊은 숨을 내쉬어 탄식하여 자신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제 다리만 멀쩡하면 제가 나서서 이 일을 밝힐 터인데! 아쉽습니다. 제 수행이 부족한 것이지요. 제가 괜히 하늘의 별을 따겠답시고 헛짓거리를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허어, 왜 그런 말을 하는 게요. 악한들에게 욕을 본 건 곽대협인데.”

당태세는 순박한 청년의 호기가 가상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였다. 순간,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기묘한 생각 하나가 당태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노인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곽일지를 보며 은밀하게 말을 건넸다.

“이보시오 곽대협. 내가 제안할 것이 하나 있소이다.”

곽일지가 고개를 들자 당태세는 멀리 앉아있는 의자의 눈치를 보더니만 속삭이듯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내가 그대의 필증을 다른 이에게 권하여 그가 진상을 살필 수 있도록 함이 어떻겠소?”

“네?”

“곽대협을 해한 자는 분명 승부에 조작을 하려는 이유가 있을 터, 그 행위도 괘씸하고 동기도 궁금하지 않소? 내가 곽대협 대신 타뢰대에 올라 비무를 뛸 고수를 하나 데려온다면 어떻겠느냔 말이오. 이대로 참가를 안 하는 것은 억울한 일 아니오?”

곽일지는 순간 당태세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다시 자신의 상황을 복기해 보는 눈동자였다.

이런, 이 자가 나를 의심하는 것인가.

당태세는 곽일지가 자신을 더 의심하기 전에 자신의 본심을 일푼 정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곽대협, 나 역시 강호를 떠돌며 수많은 걸 봐 온 사람이오. 이런 일이 무턱대고 일어나진 않을 거라 믿지요. 결코 곽대협에 대한 사원(私怨)이 있어 이런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오. 그 위에 다른 것이 있는 게지.”

“그렇겠지요.”

“그래서 내가 곽대협에게 이런 제안을 한 거요. 주제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만약 곽대협이 영 마뜩잖거나 나를 믿을 수 없다면 지금까지 들은 말을 없는 것으로 해도 좋소이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닌데……”

자신의 생각을 읽힌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곽일지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속으로 조바심이 나서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때, 곽일지가 아아 하는 한숨을 쉬더니만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그 놈들, 본 기억이 있습니다. 남문의 주루에서 늘 같이 몰려다니던 녀석들이오. 영 불량해 보여 가까이하지 않은 이들이었는데 이곳까지 나타난 것이 더 이상하지요. 그들은 구면이지만 노대협은 초면이오.”

곽일지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노대협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최소한 노대협은 생면부지의 저를 위해서 목숨을 거셨으니 어찌 제가 노대협을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이 표식을 받으십시오.”

곽일지는 자신의 품 안에서 사각으로 두 번 곱게 접힌 종이를 주었다. 그 종이 안에는 십칠(十七)이라고 적힌 숫자와 백룡문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제 참가 번호가 열일곱이니 이것을 그 고수에게 전해주시면 됩니다. 그가 비무초친에 참가하여 그 내용을 알게 된다면 제게도 바로 알려주십시오.”

“말할 나위가 있겠소.”

“만약 그가 비무초친에서 우승을 한다면 혼례에 초대는 해 달라고 하시오. 신부는 못 얻어도 축하주는 마시고 싶으니 말입니다.”

곽일지의 하얀 이를 보면서 당태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략의 일보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당태세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진짜 최선의 방책인지 의심이 들고 있었다.

***

문을 지키고 있던 시위는 사내가 자신에게 보여준 옥패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였다. 그저 평소 관인(官人)들이 보여주었던 나무로 된 통부보다는 상당히 격이 있어 보인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위가 연신 긴장하고 있는 것은 옥패가 아니라 옥패의 주인공 때문이었다. 그는 때묻은 관복에 때묻은 검대를 차고 오래된 안모도를 쥐고 있었는데 복장의 추레함 따위는 관계없이 위세가 칼처럼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어…어디서 오셨다고 하셨지요?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북경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보국장군 서림각라부 선무사 천호가 왔다고 문주께 전하거라.”

“서림…아, 예. 자…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위 하나가 부리나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본 종리세리는 눈을 들어 건물을 올려보았다.

크고 힘찬 필체로 쓰여진 [백룡문]이라는 현액이 큼지막하게 대문의 앞에 붙어 있는 하얀 회칠을 한 대가의 저택이었는데, 그 정갈하고 아름다운 처마가 마치 작은 별궁(別宮)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종리세리는 이 건물이 장사 영우문과는 대척을 이루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부터 속까지 시커멓던 영우문과는 달리 이곳은 온통 모든 것이 백색(白色)으로 칠해져 있었고 드나드는 이 하나 없던 영우문의 대문에 비하면 이곳의 출입문은 시장터라고 해도 좋을만큼 사람들이 들끓었다.

슬쩍 시위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면 장원의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 다 보일지경이었건만 지키는 사람이나 오가는 사람 모두 신경쓰지 않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백룡문주가 사람을 대하는 법을 일견(一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천호 나으리. 이 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조금 전의 세상물정 모르는 시위가 아닌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사내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종리세리를 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를 안내하는 이는 이런 일이 몸에 익은 사람인 듯 절도와 예의가 몸에 배어 있었다. 종리세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사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백룡문의 대문을 넘어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종리세리의 눈이 슬쩍 커졌다. 시위들의 어깨 너머로 본 백룡문의 정원은 실로 일견(一見)에 불과했던 것이다.

곱게 깔아놓은 자갈을 따라 휘어진 길을 따라가면 작은 연못 여러 개가 기묘하게 생긴 바위를 둘러싸고 사방에 파여 있는데, 그 연못 안에는 화려한 색깔의 고기들이 무리지어 몰려가고 있었다.

연못을 넘어 작은 다리를 따라 우아하게 지어진 정자를 지나가니 그곳에는 온갖 기화요초를 색색별로 무리지어 심어놓았는데 그 풍광과 정취가 가히 별천지(別天地)에 가까웠다.

정원의 안쪽에는 넓은 마당과 앉아 쉴 수 있는 큰 별채가 하늘로 처마를 올린 채 자리 잡았고 별채 안에는 좌돈(坐墩)과 장등(長凳)이 놓여 사람들이 앉아 쉬며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실로 공경대부의 정원 아니면 왕족의 별실이라 해도 믿을 법한 경치였다.

지금 종리세리가 들어오는 와중에도 여남은 명의 귀부인들은 별채 안에서 조용히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종리세리는 슬쩍 그들을 외면하며 다시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를 안내하던 사내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미 말씀은 드려 놓았습니다.”

종리세리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종리세리의 눈이 슬쩍 커졌다. 그의 앞에는 화려한 복색을 한 수많은 귀인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다과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의 앞으로 다가온 사람은 붉은 산호와 푸른 비취로 장식된 포두(包頭)를 금비녀로 고정한 초로의 미부(美婦)였다.

청홍의 비단으로 온몸을 감싼 여인은 손가락 끝에 길게 낀 백은과 금장으로 장식한 긴 호갑투(護甲套)를 늘어트리고 물 위를 배가 떠오듯 가벼운 몸짓으로 종리세리에게 걸어오니 그 보법에는 경공의 묘리가 숨어 있었다.

종리세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여인을 바라보는데, 여인은 으레 사내들의 반응을 안다는 듯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슬쩍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백룡문의 내주(內主)가 북경의 선무사 천호를 맞습니다. 무슨 용건이신지요?”

“보국장군 서림각라부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 백룡문주를 만나러 왔소이다.”

“문주께서는 지금 다른 곳에 계십니다. 하나 문주와 저는 내외지간(內外之間)이고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처리하는 것이 일반이지요. 제게 말씀하시면 백룡문의 대소사는 모두 처리가 가능합니다만.”

여인의 목소리는 실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아름다웠고, 여인의 눈동자와 붉은 입술, 오뚝한 콧날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매혹적이었다. 교태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잠시 말을 머뭇거리며 사방을 보고 있던 종리세리를 본 여인은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단순호치(丹脣皓齒)가 글이 아닌 사람으로 표현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터였다. 종리세리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이는 문주께 직접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제게 말씀하시면 제가 문주께 소상하게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전해드리지요.”

“여럿에게 회자시킬 말이 아닙니다.”

종리세리의 예리한 눈이 다시 빛을 되찾았다. 순간, 내주라고 소개한 여인은 슬쩍 고개를 들고 종리세리를 내려다보더니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중요한 문제시라니 어쩔 수 없지요. 후원으로 천호를 안내해 드리거라.”

“존명.”

종리세리를 안내했던 사내가 슬쩍 앞으로 나서며 종리세리를 인도하였다.

자신의 옆을 스치며 안으로 들어가는 종리세리를 굳은 얼굴로 지켜보던 여인은 이내 표정을 화사하게 바꾸더니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돌아섰다. 어느새 유쾌한 웃음이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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