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04화 (104/226)

104. 강남 소주(4)

당태세가 보니 소리 지르는 사람은 소매 없는 적삼 위에 조끼를 하나 걸치고 울퉁불퉁한 팔근육을 드러낸 청년이었는데 복장을 보아하니 그리 넉넉한 살림살이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내의 부리부리한 안광과 굳게 다문 턱을 보건데 고집도 세고 어지간한 압력에는 자기 뜻을 꺾지 않을 것 같은 대찬 인상이었다. 사내는 자신을 불러 놓고 쩔쩔매는 사내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한번 일갈을 내질렀다.

“사내가 오랜만에 몸에 익힌 공부로 명성을 얻겠다는데 어디 쥐새끼 같은 놈들이 튀어나와 몇 푼 돈으로 장부의 자존심을 희롱하느냐? 썩 꺼지지 못할까!”

“대협,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해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허,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라!”

사내는 자신의 팔목을 잡는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몸을 돌려 타뢰대 앞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룡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멀어져 가는 사내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돈을 받고 안 져주면 될 일 아닌가. 공짜로 돈을 준다는데 그것도 마다하다니….”

당태세는 아룡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독 바른 돈을 덥석 물었다가는 나중에 보복을 당하는 게야.”

“아, 그것도 그렇겠군요. 이거 참, 멀쩡한 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도 방회간의 싸움이나 다를 바가 없네요. 정말 지저분합니다.”

그 순간, 당태세는 돈 주는 걸 거절당한 사내들의 눈초리가 반대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태세의 눈이 번개처럼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쫓아 움직였다.

그곳에는 일단의 사내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것이 힘깨나 쓰는 부류 같았다. 그리고 그 사내들은 정확하게 맞은편 접수처의 사내들의 눈짓을 받고 바로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갔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돈을 물지 않아도 호된 꼴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

“네, 숙부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태세는 아룡에게 대답하는 대신 지팡이로 땅을 툭툭 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구. 이거 지팡이가 짧아서 다리가 힘을 많이 받는구나. 아무래도 나는 먼저 숙소로 돌아가 봐야겠다.”

“아니, 겨우 그 거리 걷고 다리가 아프십니까? 장사의 침쟁이 순 사기꾼 아니에요?”

“그러게 말이다. 내가 사기를 당한 건지 지팡이가 안 좋은지…일단 나는 먼저 숙소로 돌아갈 테니 너는 좀 더 구경하다 들어오너라.”

“오늘은 숙부님하고 온종일 돌아다닐 계획이었는데 이거 아쉽게 되었습니다. 목발부터 빨리 맞추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룡은 당태세의 말에 머리를 긁으며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풍류쟁이의 본성은 쉬이 버리지 못하는 법인지, 아쉬운 표정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몸은 이미 한 발짝 당태세에게서 멀어진 뒤였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룡의 움직임에 방점을 찍어주었다.

“그러게 말이다. 내일부터는 지팡이나 하나 사러 다녀야겠다. 너는 어서 놀러 가 보거라! 나는 돌아갈 것이니 늙은이 신경 쓰지 말고!”

“존명! 존명입니다! 존명!”

유쾌한 얼굴로 당태세와 인사를 한 아룡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태세는 아룡이 건들건들 다른 골목을 타고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좀 빨리 움직여라.”

당태세는 바로 몸을 돌려 다리 건너편을 향해 움직이는 사내들의 모습을 쫓기 시작했다.

어느새 당태세는 지팡이를 땅에서 떼고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저벅저벅 사내들의 뒤를 따라 큰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백룡문을 없애려고 왔으면서 코 하나 더 꿰이게 생겼구만.”

노인은 자기가 무슨 일을 벌일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몸이 사내들을 향해 움직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저 앞에 벌어지는 일을 보며 스스로 따라가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푸념을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조금 뒤에 일어날 일을 예견할 수 있으면서 그냥 방관하는 것 역시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바뀌고 있구나.”

당태세는 자신이 제남과 개봉에서 보여주었던 행동을 답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복수행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이용하고 목숨 정도는 쉽게 뺏고 줄 수 있었건만 어느새 부터인지 그는 자신의 행동에 쓸데없는 협심(俠心)을 섞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창의 진언표, 그 다음부터 바뀐 게야.”

당태세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앞을 보고 지팡이와 다리를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노인의 흰 콧수염이 운하를 따라 부는 바람을 타고 가볍게 흔들리는데 노인의 눈동자는 움직이는 사내들을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담고 있었다. 당태세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의족을 낀 오른다리에 힘이 들어가자 가볍게 발이 저려왔다. 하지만 걷는 속도와 보폭은 달라진 것이 없었고,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발을 놀릴 수 있었다. 당태세는 운하를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어느새 사내들은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방향을 옮기는 중이었고 당태세는 운하 건너편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같은 방위를 향하는 중이었다.

그 때, 강 건너 앞쪽에 민소매 옷을 입고 터덜대며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타뢰대 앞에서 매수하려던 자와 싸움이 붙었던 권사(拳士)가 틀림없었다.

사내의 모습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오는 순간, 건너편에 있던 사내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저들이 민소매의 권사를 노리는 것은 명백했다.

당태세가 앞에 나타난 다리를 통해 재빨리 사내들의 뒤를 향해 운하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사내들의 걸음이 빨라지자 당태세의 걸음도 빨라졌다.

노인의 눈은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절대로 사내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덧 사내들의 모습이 대로를 지나 작은 골목을 향해 사라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당태세는 지팡이를 손에 쥐고 조금씩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다 급기야는 뛰기 시작했다. 노인의 몸이 바람처럼 앞을 향해 달려가자 맞은편에서 오던 여인들이 깜짝 놀라 길을 피해주었다.

마지막 사내가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노인의 눈에 들어왔다. 당태세 역시 바람처럼 몸을 날려 그들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순간, 당태세는 눈을 의심했다. 골목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누구 하나 이곳에서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환술(幻術)이라도 쓰지 않은 이상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자취를 감출 수는 없었다.

그 때, 바로 맞은 편에 있던 작은 쪽문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태세의 눈이 빛났다.

“저 안이다.”

당태세가 문을 잡고 열려고 하자 문은 굳게 안에서 잠겨 있었다. 누군가 안에서 조금 전 잠가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문 안에서는 연이어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사람의 기합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마음이 급해졌다.

“빌어먹을!”

노인은 문 위를 쳐다보았다. 작은 쪽문이 연이어 하나씩 붙어 있는 담벽은 아무리 못해도 한 장 두자는 되어 보였다. 당태세는 벽을 더듬어보았다. 벽호공을 걸만한 돌 하나 튀어나와 있지 않은 매끈한 벽이었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조용히 살 수 없는 팔자인가보구먼.”

당태세는 작은 쪽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슬쩍 구부렸다. 오른다리의 철제 의족에서 묵직한 느낌이 다리를 통해 전해져 왔다. 다리가 단단히 지면에 박히자 사내의 등이 곧게 펴졌다.

노인의 양손이 천천히 원을 그리며 소중한 단지를 받쳐드는 자세로 두 손을 한 군데로 모았다.

곧이어 노인이 눈을 부릅뜨는 순간, 당태세의 두 손이 두 손에 받친 무형의 강기(剛氣)를 앞으로 쏟아붓듯 쌍장을 날렸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쪽문이 들썩거렸다.

당태세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두 손을 모았다가 발을 찍으며 한 번 더 쌍장을 달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들썩이더니 우직 소리와 함께 쪽문의 돌쩌귀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태세는 문을 노려보더니 다시 한 번 긴 호흡을 멈추고 쌍장을 날렸다.

삼타(三打)가 쪽문의 가운데 명중하는 순간,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위아래를 고정하고 있던 돌쩌귀가 박살나며 문짝이 안쪽으로 먼지와 함께 넘어가 버렸다.

“어떤 놈이냐!”

문 안쪽에서 누군가의 외침과 들려오며 희뿌연 그림자가 당태세를 향해 날아오듯 덮쳐왔다. 당태세는 말없이 들어오는 그림자의 우수를 지팡이로 막은 다음 자세를 낮추고 오른팔꿈치를 그림자의 가슴팍에 질러 넣었다.

허공에 뜬 채로 짧은 비명을 지른 그림자는 그대로 옆으로 머리부터 떨어졌다.

당태세가 먼지를 헤치며 앞으로 나가자 안채 밖으로 튀어나온 두 명의 사내가 손에서 단도를 휘두르며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내가 쥐고 있는 단도는 이미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당태세가 이를 드러내며 두 사내를 노려보았다.

“네놈들이야말로 누구기에 죄 없는 무인을 괴롭히는 거냐?”

“쳐라!”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좌우 옆에서 당태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당태세의 오른팔이 왼소매로 들어가며 단도를 뽑아 들었다.

노인의 지팡이와 단도가 양쪽에서 다가오는 단도를 맞이하듯 앞으로 나가며 날과 날이 부딪히고 쇠와 나무가 조우하니 다르게 내려친 단도의 일격이 일시에 양쪽에 부딪히며 한 소리를 내었다.

당태세의 몸이 한 바퀴 맴을 돌며 두 명의 사내와 위치를 바꾸었다.

순간 오른쪽의 사내가 먼저 달려들며 재빠르게 발을 내질렀다. 사내의 각법은 꽤나 빨랐고 당태세의 중심을 일순간 흐트러뜨리는데 성공했다.

당태세가 한발을 크게 물러선 순간, 왼쪽에 있던 사내가 당태세를 향해 돌진하며 오른손의 단도를 거꾸로 잡고 당태세의 어깨를 노렸다.

노인의 왼손이 돌아가며 지팡이를 검처럼 움직였다. 먼지 속에서 창룡(蒼龍)이 환생한 듯 시커먼 지팡이가 돌아가면서 들어오는 단도를 막아내고 연이어 들어오는 옆차기를 옆으로 비껴내었다.

교묘한 노인의 지팡이는 두 사내의 협격을 단 일 합에 막아내고 방향을 틀어버렸다. 순간 두 사내는 멍하니 제 자리에 선 채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태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물 흐르듯 이어지던 두 사내의 동작이 일시에 끊긴 순간, 당태세의 오른손에 들린 단도가 두 사내의 가운데로 파고들며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순간 피보라가 일고 두 사내의 입에서 동시에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 사내는 똑같이 목을 움켜쥐고 단도를 땅에 떨어뜨리더니 서로를 바라보며 그대로 몸이 포개진 채 땅바닥에 쓰러졌다.

자욱한 먼지가 서서히 걷히자 당태세는 쓰러져 있는 세 명의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문을 왜 닫은 거냐?”

당태세는 쓰러진 사내의 옷으로 단도를 닦고는 천천히 안채로 들어섰다. 이미 방 여기저기는 엉망이 되어있었고 그 짧은 순간에 저항이 심했던 듯 세간살이 중에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당태세는 어두운 방안을 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하였다.

“이보시오. 괜찮소?”

순간, 침상의 맞은편에서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구…구해주시오.”

당태세는 재빨리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 소리 나는 곳을 확인해 보았다. 당태세는 소리의 근원지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에는 예의 민소매에 조끼를 입었던 근육질의 장한이 누워 있었는데, 사내의 오른쪽 발은 피투성이가 된 채였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더니 옆에 있는 옷가지를 찢으며 사내의 발을 감쌌다.

“괜찮소?”

“보이긴 잘 보입니다만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의외로 사내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명징하였다. 당태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내의 다리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누워있던 무인은 당태세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시오, 저들은 누굽니까? 무슨 일이 벌어진거요?”

“잘 싸우게 생겨 놓고 입이 더 빠르구먼.”

“네?”

어리둥절해하는 사내를 보며 당태세는 빠르게 손을 놀렸다.

“일단 대충 지혈은 했으니 어서 의자에게 갑시다. 문짝은 대충 세워놓고 다녀와서 고치고.”

“문짝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나가 보면 알게 될 거요.”

당태세의 말에 무인은 눈만 깜박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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