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강남 소주(3)
당태세 일행이 소주에 처소를 잡은 다음 날, 꾸물대던 하늘이 제대로 갈라지며 청천(靑天)이 눈에 들어오자 가뜩이나 화사했던 소주의 풍광은 말 그대로 극락처럼 만개하였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며 운하 옆의 석축과 다리를 뜨겁게 데웠지만 운하를 타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열기를 식혀주어 사람들의 왕래에 불편함이 없었다. 당태세와 아룡은 오랜만에 같이 밖으로 나가 소주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아룡은 아침부터 소주의 경치를 보며 연달아 감탄사를 토하는 중이었고, 당태세는 주변을 힐끗대며 백룡문의 깃발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우아하게 물 위로 솟아오른 구름다리를 지나 붉은 등이 촘촘히 걸려있는 운하 옆의 집을 바라보며 조금씩 서쪽으로 다가가다 보니 넓은 도로와 우마가 다니는 대로가 나오는데, 이곳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면 항주를 지나 절강과 복건으로 향하는 남로(南路)를 타게 되는 것이었다.
“인생여로는 세월이 가면 행선지가 달라져도 땅의 길은 변함없이 한곳을 통하는구나.”
당태세는 물끄러미 멀리 휘어지며 뻗어있는 도로를 감개무량하게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당태세가 소주를 들렀던 마지막은 이십 여년 전, 절강의 왜구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의군을 따라 잠시 들렀던 때였다.
그 시절의 기억은 마치 어제처럼 선연한데, 그 사이에 못 보던 건물들과 도로가 뚫려 풍경이 낯설어지니 그제야 당태세는 자신이 누워있던 십칠 년의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긴 세월 동안 내게 바뀌지 않은 것은 원수에 대한 복수심뿐이로다.”
당태세는 시린 마음을 부여잡고 아룡과 함께 다시 주변을 돌아다녔다. 아침을 간단히 길에서 때우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풍경을 보자 답답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오늘 따라 아룡은 주루나 기루로 가지 않고 당태세의 뒤를 졸졸 따르고 있었다.
“얘야. 무두리. 어찌하여 오늘은 따로 기루나 주루를 안 들리느냐? 나와 함께 돌아다닐 요량이냐?”
아룡은 씩 웃으며 당태세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친근함이 진짜 피를 나눈 숙질사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제가 그동안 좋은 걸 본다고 오가다 보니 정작 숙부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지 뭡니까? 내일부터는 다시 신나게 좋은 것을 보러 다닐지언정 오늘은 제가 숙부님과 함께 구경을 해보려고요!”
‘아니, 새삼스레 굳이 필요 없는 일을 하려 드느냐’라는 말이 당태세의 입에서 새어나올 뻔 했지만 당태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말을 하려다 보니 아룡의 눈매가 너무 천친하고 즐거워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떨궈버릴 동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을 보고 악심(惡心)없이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이유없이 모진 말을 내뱉기도 그러했다.
결국 당태세는 히죽 웃으며 아룡의 어깨를 두들겨 주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실로 내 조카로구나! 이렇게 든든한 장부가 내 옆에 같이 있어주니 두려울 것이 없고 같이 좋은 것을 보니 실로 즐거움이 두 배로다.”
“그렇지요? 역시 숙부님은 제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 이제 슬슬 배도 부르고 하니 네가 말한 그 비무초친인가 하는 것을 좀 알아보자꾸나.”
“그럴까요? 남쪽다리 근처 동서로 깃발들이 많다고 하던데 그리 가시지요!”
기묘하게도 아룡이 술자리에서 앉아있다 얻어오는 정보가 당태세가 하루종일 품을 파는 정보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태세는 새삼스레 아룡을 떨어뜨려 놓는 게 진짜 좋은 일일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노인은 그런 고민을 하며 부지불식중에 다리를 넘어가 버렸는데 다리를 넘어가자마자 노인의 눈에 커다란 깃대 하나가 들어왔다.
거대한 깃발은 아래 주렴이 달려 기다란 천이 하나 땅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그 천조각에는 비무초친(比武招親) 네 글자가 또렷이 쓰여 있었다.
게다가 당태세가 힐끗 그 위를 쳐다보니 청색 바탕에 흰 글자로 백룡(白龍)이라는 두 글자가 똑똑히 새겨져 있었으니, 오매불망 당태세가 잊을 수 없었던 백룡문의 깃발이었다.
“백룡문이 맞았구나.”
노인은 깃발을 보며 이가 부드득 갈리며 저절로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데, 그 깃발 앞에서는 한 사내가 사람들을 모아 둔 채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차려입은 옷을 보아하니 백룡문의 문도 같았는데 사내의 구변은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처럼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천하의 꽃같은 영웅들이여, 재기 넘치는 소년들이여. 일생에 한 번 있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세상을 살면서 언제 미인을 얻을 것이며 어디에서 공명을 얻을 것인가?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가 어찌 옛 글의 일이랴! 일기당천(一騎當千) 만부부당(萬夫不當)이 어찌 군웅담의 이야기랴! 지금 이곳 소주에서 화려한 비무가 절세가인을 두고 벌어지니! 아무쪼록 많이 왕림하여 자리를 빛내주시오!”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박수를 치며 사내의 재담에 웃음을 보태니 말을 하는 사내도 흥겨운지 연신 웃음을 띠고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실로 분위기가 가볍고 흥겹기 그지없었다.
하마터면 당태세도 자기도 모르게 씰룩 미소를 머금을 지경이었다. 아룡이 말하는 사내에게 슬쩍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이보시오. 나는 오늘 소주에 초행인데 그 비무초친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백룡문도는 손님이 온 걸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우리 소주를 정성공의 마수에서 구해주신 지휘사 위문구 장군의 무남독녀가 배필을 찾는 중이라오! 위소저로 말하자면 가히 용모는 월궁항아요 성품은 보살의 현현이며 그 재지는 옛 탁문군에 버금가는 소주제일미라!”
“거 너무 거창한 소개 아닌가?”
아룡이 문도의 말에 이죽거렸지만 문도는 아룡의 반응에 반박하는 대신 싱글벙글하며 자기 말을 계속 읊어대었다.
“하지만 이 위소저는 당금 천하의 영웅이 아니면 자신의 반려로 삼지 않겠다 하였으니, 그 처지를 우리 백룡문이 보고 분연히 일어나 강남 일대의 영걸들을 모두 소주로 부른 것이오! 바야흐로 그들이 실력으로 장원을 뽑을 것이니 이야말로 소주 무장원! 소주 제일의 무장원이 되어 장군의 아리따운 여식을 얻는 비무초친의 승자가 되는 것이지요!”
백룡문도의 변설은 무관의 문도라기보다는 시장판의 거간에 어울릴 정도로 매끄러웠다. 당태세는 현란한 문도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세세한 것을 물었다.
“그 비무초친이라는게 창칼을 들고 싸우는 게요?”
당태세의 말이 백룡문도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며 쳐다보았다.
“아니, 노사. 무슨 말씀이오? 이 태평천하에 무슨 칼싸움이오? 그건 비무가 아니지. 순수한 백타(百打)로 결판을 내는거요!”
“어디서 그걸 결판내오?”
“고래의 규율에 따라 타뢰대(打擂臺)에서 비무를 할 것입니다. 저 위 사자림(獅子林) 앞에 큼지막한 타뢰대를 세워 놓았지요.”
타뢰대라 함은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사각의 대(臺)를 설치해 놓고 그 안에서 두 사람이 겨루는 무대였다. 생각보다 옛 방식을 철저하게 고증한 비무였다. 당태세는 슬그머니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하오?”
“오늘 예선을 끝낸 자들이 참가등록을 하고, 내일 모래부터 서른두 명을 추려 시합을 열 예정입니다.”
“이런, 난 아직 등록을 못했는데 낭패로구먼.”
지팡이를 짚은 당태세가 말을 하자 아룡과 백룡문도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당태세도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는데 노인의 눈은 그 틈을 타 백룡문도를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보아하니 무공은 그리 깊은 소양이 있는 것 같지 않았고 따로 무기를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백룡문도의 평균적인 수준이 이 정도라면 날을 잡아 하나하나 격살하는 것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다.
‘문제는 문도가 아니라 그 위의 두령들이겠지.’
당태세가 혼자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번에는 아룡이 슬쩍 백룡문도에게 운을 띄었다.
“아니, 백룡문의 소저가 아니라 장군의 소저가 결혼하는데 왜 백룡문이 이 일을 부담하는게요?”
“우리도 이렇게 깃발을 걸어놓고 이름을 알리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시합이 열리면 근처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인데, 우리가 그 앞에서 여러가지 물산과 음식을 펼쳐 놓고 작은 시장을 열 계획입니다.”
“아니, 그럼 음식 팔려고 백룡문이 이걸 주최한단 말이오? 이문이 얼마나 남는다고? 백룡문 부자라던데?”
바람잡이 문도가 껄껄 웃으며 아룡을 재미있다는 듯 보다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도복을 들어 보였다. 사내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새라 목소리를 낮춰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공자 말씀대로 백룡문이 당과 팔아먹으려고 이런 거창한 일을 하겠습니까?”
“그럼 뭔가 꿍꿍이가 있소?”
“사실, 우리 백룡문의 소문주가 이번에 참전을 한단 말이죠.”
“백룡문 소문주?”
당태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바람잡이 사내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룡과 당태세는 서로 아아 하는 감탄사를 동시에 내었다. 세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보며 낄낄거렸다.
“그거 참 묘수로구나. 소문주가 비무초친에서 우승하면 되는거 아닌가?”
“그렇게 신부 될 여인이 아름답소?”
“허허허, 일단 가 보십시오! 가서 보시면 왜 소문주가 이 비무에 나오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요!”
***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아룡과 당태세는 내친김에 사자림 앞에 만들어 놓았다는 타뢰대를 보러 길을 나섰다.
기기묘묘한 돌과 운치있는 연못들로 이름높은 정원 사자림(獅子林)의 앞에는 이미 천과 깃발이 화려하게 둘러진 거대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방에 세워진 튼튼한 기둥과 타뢰대를 받치고 있는 나무판자의 두께를 보니 상당한 공력이 들어가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다.
타뢰대의 위치가 사람 가슴보다 위로 올라가 있어 아래쪽에 군중이 군집해도 위에서 대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충분히 보일 것 같았고, 타뢰대의 뒤쪽에는 나무로 쌓아 올린 좌석들도 있는데, 당태세의 생각으로는 그곳에서 이 비무초친의 당사자인 위소저와 백룡문의 관계자들이 앉게 될 것 같았다.
‘저 자리에 백룡문주가 올라온다 이건가?’
당태세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떻게 이 기회를 이용해 볼 것인가 고심하고 있는데 아룡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당태세를 붙잡고 한쪽을 가리켰다.
“숙부님, 저 곳에서 예선을 통과한 사람들이 등록하는 모양입니다.”
당태세가 보니 덩치가 좋은 장한들과 민첩하게 생긴 이들이 줄을 서서 한 곳에서 뭔가를 적고 있었다. 보아하니 출전한 사내들의 명부 같았다.
그런데 바로 맞은편에서는 등록을 마친 사람들을 향해 몇몇 사내들이 다가가 한참을 이야기하다 손사래를 치거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대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당태세가 유심히 보니 모든 사람에게 사내들이 들러붙는 것도 아니고 다가가서 귓속말로 은근하게 상의하는 이들은 몇몇 후보로 정해진 모양이었다.
한참동안 실랑이를 하던 한 후보는 사내들과 결국 이야기가 통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에게 다가온 사내에게 작은 주머니를 받고 슬며시 예를 표하였다. 당태세는 작게 탄식을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너무 예전과 똑같은 재현이구먼. 악습(惡習)까지 그대로 따라할 이유가 무엇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숙부님?”
당태세는 아룡의 말에 입맛을 다시며 씁쓸한 표정이 되어 말하였다.
“예전 문파의 싸움을 비무로 풀어낼 때 종종 있던 관습이다. 상대편에서 돈을 주고 비무하는 상대방을 매수하는 게지. 그래서 진 사람은 돈을 얻고 이긴 사람은 명예를 얻는 것인데……이 꼴을 여기서도 보게 되다니 이걸 반갑다 해야 하느냐 슬프다고 해야 하느냐?”
당태세의 말을 듣던 아룡은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고 그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한족들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전통을 되살린다 하였습니다. 결국 뇌물만 판치고 없는 놈만 뜯기는 그런 세상을 여기서도 보는구먼요! 역시 한족들은 안 된단 말입니다.”
당태세는 아룡의 말에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어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보는 상황이 불편한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돈이 있고 사람들이 모이면 필요없는 일도 같이 딸려오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 때, 앞에서 누군가 커다란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사람들과 맞붙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매수자들 사이에 있던 장한의 입에서 터진 소리였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나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고 돈을 주는게야!”
당태세의 눈이 크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