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강남 소주(2)
구이도 종리세리는 소주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객잔을 찾아 그곳에 여장을 풀었다.
사내는 주인에게 임료를 지불하고 가장 구석진 방을 얻었다. 주인은 좌불안석이 되어 관인이 하는 일을 보다가 슬쩍 앞으로 붙더니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종리세리를 쳐다보았다.
“나으리, 무슨 연유로 이곳에 거하시면서 가장 안 좋은 방을 쓰십니까? 보아하니 무관이신 듯 보이는데 소주부로 가시면 숙소를 따로 제공하고….”
“개인적인 사무로 온 것이오. 굳이 관에 민폐를 끼칠 이유는 없소이다.”
“아,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방이라도 저 남향의 경치 좋은 곳으로 안내해….”
“아니오. 관리가 무슨 돈이 있으며 돈 없는 이가 어찌 이유 없이 더 나은 대우를 원하겠소. 그 방은 주인이 가장 많은 돈을 받고 빌려주는 곳 아니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방이 좋소. 방세는 꼬박꼬박 낼 것이니 밀리기 전에 말해주시오.”
객잔주인은 말을 더 잇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보아하니 사람의 인상이 차갑고 매몰차 보이지만 거짓을 말하는 이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날이 시퍼렇게 서 있어서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무인처럼 보였다.
출세는 다 틀린 사내같구먼. 객잔주인은 속으로 이리 생각하면서도 객잔에 관리가 하나 묵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 물어볼게 있소이다. 이곳 소주에 백룡문이라는 문파가 있소?”
종리세리의 말을 들은 객잔주인은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으리께서도 백룡문을 찾아오신 것입니까? 진작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종리세리가 객잔주인을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백룡문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
“백룡문이라는 곳은 원래 이곳 토박이가 아닙니다. 명이 망하고 나서 조금 있다가 밀려든 외지인 중 하나였죠. 참 희한한 일이지요. 원래 강남의 한인들은 조정이 핍박하면서 살던 이들도 빠져나갔는데 그 사람들은 이리로 들어왔거든요.”
“아, 나 같은 외인들이었구려?”
당태세의 말에 다관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닌 돈은 꽤 많았다고 하더군요. 들어오자마자 한 일이 태호(太湖)에서 배들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전란 중에 제대로 된 배가 별로 없었는데 태호의 배를 많이 사들여서 그것으로 유력한 선주가 되었지요. 전란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사람들이 들어오자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고 들었습니다.”
당태세는 주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룡문은 원래부터 가진 돈이 있었고, 그들의 재산은 분명 청(淸)에 귀부할 때 그들의 항복을 받아 준 이들이 보증을 해 주었을 터였다. 그리고 재리와 내치에는 도가 튼 한소군이 있으니 그녀의 식견으로 백룡문의 치부가 가능했을 것이었다.
“호오, 돈벌이에 재주있는 사람들이구먼. 그런데 그들이 왜 존경을 받는단 말이오? 돈이 그렇게 많았나?”
당태세의 말에 다관 주인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 맨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요. 백룡문이라는 곳이 유명해진 건 최근에서의 일입니다. 정성공이 군세를 이끌고 밀려들어왔을 때, 선단을 조직해서 싸우고 수비군을 조련시킨 것이 바로 백룡문이거든요.”
당태세가 아하 하면서 감탄사를 내자 객잔주인은 자신의 말에 취했는지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
“그 전까지는 태호 주변의 부가옹인줄 알았던 백룡문주가 글쎄, 가전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 뭡니까! 사람들을 일사불란하게 훈련하고 들어오는 적의 첨병을 요격하는데, 진짜 신장(神將)이 따로 없더라 이거지요.”
“은둔 고수였구나!”
“그렇지요! 사람들이 깜짝 놀랐지 뭡니까. 그 덕에 많은 이들이 의병으로 지원하고 조정의 병력들과 녹영군이 합세해서 이 소주는 정성공에게서 벗어났지요. 지금 소주에서 백룡문을 모르면 세작입니다.”
세작(細作)이라. 나라의 성문을 헐어 적도에게 갖다 바친 자니 그 자야 말로 세작 아닌가.
당태세는 혀 끝에서 느껴지는 차 맛이 쓰디쓰게 느껴졌다. 북경에서는 황제를 배신하고 소주에서는 청을 위해 충성한다니.
이 무슨 모순인가.
“그래서 지금 백룡문은 어디 있는게요?”
상념에 빠진 당태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지만 다관 주인은 노인의 변한 어조를 알아채지 못하였다. 아니, 한술 더 떠 신이 난 그는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당태세를 바라보며 손을 펼쳐 운하와 다리 앞을 가리켰다.
“백룡문은 남쪽 태호변에 자신의 장원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소주 사방 어디에서나 보일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노사께서는 길일(吉日)을 잡으신 겁니다! 소주에서 보기 힘든, 아니 이 나라에서도 이제 찾아보기 힘든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거든요. 혹시 노사는 예전 강호의 고수들이나 무림(武林)에 대해 들어보신 바가 있으십니까?”
당태세가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그야 책이나 노래를 통해서 접한 것이 다지요. 물론 제가 젊었던 시절에는 협사라는 이들이 꽤 돌아다니곤 했습니다만….”
“예전 젊은 시절의 기억이 있다면 이번 백룡문이 벌이는 시합은 꽤나 운치있고 즐겁게 구경하실 겁니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고 본다 하여도 즐겁겠지요.”
당태세는 다관 주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멍하니 주인의 즐거운 표정을 보고 있는 당태세를 향해 다관주인이 누런 이를 씨익 드러내더니 한 마디를 던졌다.
“노사께서는 혹시 비무초친(比武招親)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멍하니 대관주인의 말을 듣고 있던 당태세의 눈이 커지며 노인의 얼굴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올라왔다.
“비, 비무초친?”
***
“다관에서는 재미있으셨습니까? 거 참, 소주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곳마다 구경거리가 천지더군요!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 또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아, 참. 항주도 가야 하는데 그곳은 또 얼마나 재미가 있으려나?”
신이 나서 아무 말이나 주워 섬기는 아룡을 따라 들어간 객잔은 안마당이 그리 넓지 않은 대신 객실이 크고 깨끗하였다. 게다가 객잔의 위치도 여염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조용한 지역이니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도 좋았다.
당태세가 원하던 객잔을 아룡이 구한 것이었다.
“조용하면서도 아늑하구나. 어찌 이런 곳을 골랐느냐?”
“제가 시끄럽게 노는 건 좋아해도 잠은 조용한 곳에서 푹 자고 싶단 말입니다. 실은 주루에서 만난 친구가 이 집을 소개시켜줬습니다! 꽤 괜찮은 객잔이라더니 말에 신용이 있지 않습니까?”
“그 짧은 시간에 주루에서 친구를 사귀었단 말이냐?”
객잔을 얻으러 가라고 돈을 줬는데 왜 주루부터 갔느냐는 말이 입 밖까지 밀려 나왔지만 당태세는 아룡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였다. 원래 판을 깔아주면 끝간데없이 나가는 것이 또 아룡인지라 당태세가 추임새를 넣으니 가뜩이나 기분 좋은 판에 아룡의 입이 더 벌어졌다.
“그럼요! 제가 누굽니까 숙부님! 천하의 재사들과 어울려 흉금을 터놓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무두리 아닙니까? 이곳에서의 유람은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친구가 주루와 기루, 괜찮은 곳들은 다 꿰고 있는데…아이구. 바쁘게 다녀도 한 보름은 걸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보름이라…뭐 그 정도면 네가 알아서 다닐 수 있으렷다.”
“그럼요! 숙부님도 좋은 옷 사 입고 지팡이도 좋은 거 들고 다니시면 소주의 부가옹처럼 보이실테니 조만간 저처럼 즐거움을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게 해야겠구나. 이곳의 운하도 절경이지만 태호(太湖)의 풍광이 그렇게 좋다니 한 번 가 봐야겠다.”
당태세의 여유작작한 말에 아룡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면서 눈을 반짝였다. 자기가 말할 것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숙부님, 안 그래도 제가 숙부님이 아주 좋아할 만한 구경거리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구경거리? 무슨 잡극(雜劇)이라도 열리는 게야?”
“잡극이 뭡니까요! 지금 소주 전체가 엄청나게 들썩거리는 잔치거리가 하나 있답니다. 숙부께서는 비무초친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룡의 질문에 당태세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치 오래 된 책 안의 구절을 기억해 내듯 더듬거리며 대꾸를 하였다.
“가만있자, 비…비무초친이라고 하면 예전 강호에서 유력자가 자기 딸을 시집보내는 방편이렷다?”
아룡이 다시 손바닥을 치며 바로 맞췄다는 듯 당태세에게 시원한 웃음을 내보였다.
“역시 아시는군요! 그 비무초친이 바로 이 소주에서 열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당금 소주에서 가장 강한 문파가 태호의 백룡문이라고 하는 곳인데, 이들이 청조의 충신인지라 소주부에서도 별로 관여를 하지 않는답니다. 이들이 비무초친을 한다고 소주 전역에 깃발을 걸고 후보자들을 모으고 있는데 그 광경이 사뭇 장대하여 평생 없는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요?”
“나 참, 어이가 없구나! 강호의 세가도 아닌 것들이 모여서 결혼 상대를 무공으로 뽑겠다고? 협객과 무림이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저런 짓을 한단 말이냐?”
당태세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아룡은 늙은 사람이 구태의연하다는 듯 슬쩍 눈썹을 모으더니 그건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하였다.
“숙부님,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변하면 모든 일이 바뀌는 법입니다. 강호와 무림이 사라졌다 하여 그 시절의 아름다운 전통마저 사라지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청나라의 신민을 자처하는 놈이 강호의 갑자기 아름다운 전통 운운하고 나오니 당태세는 어이가 없었다. 하여간 백룡문이 소주 전역에 떠들썩하게 비무초친을 알리는 것은 사실인 듯 싶었다. 당태세는 슬쩍 콧수염을 쓰다듬더니 감회가 새롭다는 듯 말하였다.
“무두리 네 놈의 말도 일리가 있지. 허! 거 얼마나 대단한 미색에 재지(才智)를 갖춘 여식이 있기에 소주 전역에 깃발을 걸고 신랑을 모집한다는 말이냐? 백룡문의 여식이 천하제일미, 아니 소주제일미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당태세가 감탄을 하자 아룡은 정색을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룡문의 여식을 시집보내려는 것이 아닌데.”
“뭐라고? 여식을 시집보내지도 않으면서 무슨 비무초친이야?”
“백룡문이 비무초친을 주관하는 것도 맞고, 시집을 가는 사람이 소주제일미라고 불리는 것도 맞지만 백룡문의 여자는 아닙니다. 이 근방에서 유명한 장수의 딸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백룡문은 뭐 하는 건데?”
“글쎄요? 그냥 이 잔치를 주관하면서 이득을 보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아룡도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당태세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는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려는 의도가 무엇일까. 게다가 자기 딸을 시집보내는 것도 아닌 마당에. 당태세는 여장을 푸는 즉시 나가서 이 일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을 하는군.”
당태세의 마지막 독백은 아룡의 귀에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