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01화 (101/226)

101. 강남 소주(1)

연원으로 따지자면 유명한 오왕 부차로부터 시작되었고, 화려하기로 따지면 당나라 때부터 이름을 날렸으며, 부유하기로 따지면 송나라때의 명성을 이어가고, 사람들의 학문으로는 명대(明代)부터 자자한 고장이 바로 이곳 소주였다.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성읍이며 명성이 자자하기로는 어떤 제국의 수도보다 휘황하니 가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천하제일의 동리에 산다고 여겼고, 다른 고장을 부러워하는 일 또한 없었다.

사람들은 여유롭고 예의에 밝은 대신 다른 이들과의 삶에서도 확실하게 경계를 두기로 유명하였다. 그리하여 소주 사람들은 특유의 고고함과 온순함이 뒤섞여 있었으니, 실로 사방에서 몰려오는 외지인들을 대할 때에도 이런 습성이 확실하게 나타나곤 하였다.

“이거 보십시오. 숙부님,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선량한 낯빛을 하고 있고 돌아다니는 여인들은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길가에 놓여있는 저 집들의 처마와 운하의 다리들을 보십시오! 뭐 하나 눈에서 덜어낼 것이 없습니다. 실로 이 곳이 제가 찾는 도원경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청조(淸朝)의 모든 덕성(德性)이 오롯이 이 소주에 모여있는 것 같습니다.”

입을 벌리고 멍하니 사방을 둘러보는 아룡을 보며 당태세는 이 소주의 근원이 얼마나 오래되었고 만주족의 청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몸뚱어리만 한인이고 정신은 이미 만주족이 다 되어있는 아룡에게 그런 말이 먹힐까 의심스러웠다.

그나마 사방 천하에 정신이 팔려 자신이 혼자 움직여도 되는 것이 더 수월해진 것만큼은 맘에 드는 일이었다.

“객잔은 좀 싼 곳을 찾아야겠지? 우리가 이곳에 아무래도 무창이나 장사보다는 오래 머물지 않겠느냐?”

“그렇겠지요.”

“즐길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으니 나중에라도 돈 걱정을 안 하려면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야.”

“걱정 마십시오. 숙부님. 이 무두리가 다른 건 몰라도 밥 먹고 자는 곳 찾는 능력은 있습니다. 금월방에서도 제가 가는 주루와 객잔은 다 사람들의 호사에 오르는 곳이었거든요! 이번에도 한 번 맡겨 봐 주십시오!”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곳이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당태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일은 스스로 해결할 일이지 아룡을 더 깊숙하게 끌어들이면 안 될 것 같았다. 가뜩이나 북경에서 온 천호까지 자신의 뒤를 들쑤시며 돌아다니는 판이라면 모든 일에 조심해야만 하였다.

당태세는 자신이 소주에서 할 일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백룡문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무엇으로 소주에서 업을 삼고 있는 지를 파악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확실한 목표를 세우는 일이었다.

결국 마지막의 목표는 백룡문주가 될 터였지만 백룡문주 외의 다른 이도 걸려 있을 확률이 있었다. 최소한 한소군 도려진은 당태세의 살생부에 올라갈 확률이 놓았다.

두 번째는 부러진 목괴(木拐)를 대신한 지팡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말이 지팡이지 실상은 병기를 제작해달라고 주문할 만한 믿을 수 있는 대장장이를 찾아야 하였다.

비록 해도침옹에 의해 근사한 철제 의족을 얻어 자신의 공부를 무리없이 펼치게 되었지만 한동안 쓰고 다니던 목괴가 없으니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을 방심시키기에 목발만큼 좋은 게 없더구먼. 이번에는 창촉 대신 다른 걸 넣어야겠어. 칼이나 철추를 넣어볼까. 아니면 조총을 달아볼까.”

당태세는 자신의 생각이 가는대로 혼잣말을 중얼대다 조총 생각이 나자 피식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다가 새삼스레 자신의 하는 짓을 돌아보더니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리질을 하였다.

“내가 필시 미친게다. 살겁(殺劫)을 논하면서 비실대며 웃다니…사람이 악귀가 다 되었구나.”

당태세는 깜짝 놀라 두려운 낯빛을 띄었다가 이내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지. 젊은 시절 강호에서는 내가 온전히 사람들을 살렸던가. 원래 나는 이런 놈 아니었던가. 협객의 삶에 피가 튀고 원한을 갚는 것이 어찌 새삼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그저 늙어서 걱정이 많아진 게지.”

문득, 당태세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옆에는 기묘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룡이 있었다. 아룡은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걱정스러운 어조가 되어 노인에게 말을 꺼냈다.

“숙부, 괜찮으십니까? 점점 혼잣말이 늘어나십니다. 표정도 혼자 울었다 웃었다 하면서 혼백이 빠져나갔다 들어갔다 하시는 것 같은데 어디 아프십니까? 의자라도 부를까요?”

“음? 아, 아니다. 나는 그저 옛 생각이 많아져서……….”

“그럼 잠시 이 근처 다관에서 쉬고 계십시오. 객잔은 제가 알아볼 테니까 말이죠. 괜스레 저랑 같이 무더운 시내 구경을 나섰다가 객사(客死)하시면 서로 낭패 아닙니까?”

도대체 말을 어디서 배워먹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지간 아룡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태세도 아룡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안 그래도 혼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봐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이곳에서 쉬고 있을 터이니 멀리 다녀 오거라.”

“멀리 가진 않고 근처에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길러낸 사위 같은 놈이 말버릇만 가살스러워 당태세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사람은 부려야겠기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전대를 풀어 아룡에게 건네주었다. 아룡이 당태세에게 받은 전대를 보며 눈을 끔벅이자 당태세는 일부러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너도 따로 금월방주에게 받은 것이 있겠지만 어찌 그 돈으로 우리 둘의 살림을 다 하겠느냐? 이것도 같이 보태서 사용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숙부님은 정말 하늘이 제게 내리신 분입니다!”

아룡의 입이 하늘까지 올라가며 신이 나서 대로에서 춤을 추듯 사라지자, 당태세는 피식 웃곤 다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태세는 실로 오랜만에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다관에서 시킨 특색없는 차였지만 주변으로 보이는 그림 같은 정경이 한결 다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듯 싶었다.

“백룡문이라…….”

당태세는 머리를 쓰다듬다가 선뜩한 느낌에 다시 손을 내리고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변발이라는 물건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머리가 응당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이 그저 까칠한 짧은 숱만 느껴졌다.

그것도 모자라 매일 머리를 면도까지 해야 했다. 이제는 무창에서 턱수염까지 잘라 턱도 터럭을 잘라야 하였다. 실로 당태세는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산동에서 소주까지 정신없이 달려온 이 여정 모든 것이 한바탕 꿈속의 잡극(雜劇)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라도 없고 가족도 없고 제자도 없고……머리카락도 없다니.”

노인은 멍하니 혼잣말을 하며 중얼대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혼잣말만 많아지는 게 아니라 헛웃음도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종당에는 미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노인은 웃으면서 다관의 바깥을 살펴보았다. 순간, 당태세의 눈에 기묘한 장면이 눈에 띄었다.

몇 명의 사내들이 검대에 검을 차고 북적대는 운하 옆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복색을 보아하니 청의 팔기(八旗)도 아니고 녹영군도 아닌 평범한 한족의 사내들 같았다. 한족 사내들이 칼을 차고 성읍 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봉의 하오문들도 칼을 옷 속에 숨기고 다녔고, 무창이나 장사의 역사들도 그저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몽둥이 정도였는데 이 휘황찬란한 소주 한복판에 칼을 차고 다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당태세는 화급히 주변을 돌아보다 다관의 주인을 불러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나는 이곳 소주에 초행인 사람인데 궁금한 사연을 물어봐도 되겠소?”

다관주인은 으레 있는 일인지 미소를 가득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초행이시군요. 노사.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당태세는 손가락을 들어 운하 위의 구름다리를 건너가는 사내들을 가리켰다. 다관 주인이 슬쩍 눈을 찌푸리고 다리 위를 보더니만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영문인지 알았다는 투로 말하였다.

“저 칼 찬 이들을 말씀하시는 게로군요. 하긴 모두 궁금해하시지요. 성내에서 칼을 패용하는 건 금지되어 있지요.”

“그렇지요? 내가 알기로 성내에서 칼을 패용하는 것을 허락해주는 곳이 없을텐데 저들은 국법이 무섭지 않은 것이오?”

“아닙니다. 저들은 조정에서 허락한 자들입니다. 아마 조만간 단속이 내려오겠지만 말이지요.”

“조정에서 허락을 했다고?”

다관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태세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주인과 구름다리 건너편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 때, 옆에 앉아있던 수수한 복장의 중년인이 두 사람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행색으로 보건대 소주에 살고 있는 토박이 같았다.

“노사께서 초행이시라니 궁금해 하겠지요. 노사께서는 재작년 이맘때의 변란을 모르시겠군요.”

“변란이라니?”

“반역도 금문도주(金門島主) 정성공이 병력을 이끌고 이곳 연안까지 군사를 몰고 온 걸 모르십니까? 정성공 말이오! 조정의 명을 거스르고 변발조차 하지 않은 채 남녘에서 난을 일으키는 역적의 수괴 말이오이다.”

당태세가 가만히 사내의 말을 들어보니 망한 명(明)의 충신을 자처하는 정성공이라는 수군 도독이 자신의 강역을 확보하고 남에서 북으로 군사를 보내 남경을 위협하고 그 세력이 이곳 소주까지 이르렀던 모양이었다.

그 때가 지금부터 2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당시 소주는 전란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 때 협기있는 사내들이 모두 칼을 들고 의군(義軍)으로 나서서 소주를 지켰지요. 그래서 조정에서도 정성공의 침입이 물러간 뒤에도 그때 일어섰던 의군들에 한해 녹영군과 같은 지위를 주었습니다. 그때 받은 명을 받들어 지금도 칼을 차고 다니는 협사들이 종종 보이는 것이지요.”

중년인의 말은 공손하면서도 조리가 있어 늙은 당태세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태세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못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 나라가 망했어도 충신은 남아 있구려. 그런 이가 병력을 동원할 정도라면 그 군세가 아직 남녘에는 남아 있다는 소리렷다.”

당태세가 혼잣말을 중얼대자,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년인은 갑자기 안색이 급변하더니 당태세는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다 한소리를 하였다.

“충신이라 하셨소?”

“네?”

“어허, 이분. 큰일 내실 분이시구려. 정성공은 대놓고 우리 황실에 대해 역적질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 대고 충신이라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소이다. 노사께서는 어디 출신이시오?”

“북경에서 왔소이다.”

북경에서 왔다는 당태세의 말을 들은 중년인은 이리저리 당태세를 쳐다보며 힐끗대더니만 공손한 말투로 다시 답을 하였다.

“북경이면 천자께서 계시는 황도를 말하는 것인데 어찌 그런 부박한 말을 입에서 꺼내신단 말입니까. 자고로 선인들이 말씀하시길, 나이를 먹을수록 입을 신중히 열라고 하셨지요.”

공손히 말을 마친 중년인은 마치 역신(疫神)이라도 만난 듯 당태세로부터 훌쩍 떨어지더니 바람소리가 나게 뒤로 돌아서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관을 빠져나갔다. 당태세는 그 모습을 보다가 언짢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원래 전란이 났던 곳이 민심이 메마른 법이다만……여긴 아룡이 살기에 딱 맞는 동네같구먼.”

지금까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관 주인은 행여 당태세가 계산도 안 하고 심통이 나 가게를 나갈 것처럼 보였는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당태세를 달랬다.

“노사께선 언짢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노사처럼 연륜이 있고 옛 명(明)의 기억이 남아계시는 분들은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한족으로 태어나서 말하는 투가 너무 괴악하지 않소이까? 내 지금까지 계속 들으면서 꾹꾹 참고 있었는데 말이지. 해도해도 너무들 하는구먼.”

당태세는 그간 아룡에게 쌓여있던 못마땅함까지 한 번에 터져나와 눈살이 흐려지고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데 그를 보던 다관 주인은 웃으면서 심술 난 노인의 역정을 달래주었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이곳 사람들이 모두 지사(志士)도 아니고 다 살려고 하다보니 그리 된 것입니다. 누가 자기 눈앞에서 창칼이 오가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원…….”

“인생이 그런 것이지요. 그리고 그 때 우리 한족들이 앞장서서 정성공과 싸우니 조정에서도 우리를 갸륵하다 여기는 것이지요. 저 의용군이나 백룡문 같은 이들이 소주에 있으니 팔기도 건드리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순간, 당태세의 찡그려졌던 얼굴이 삽시간에 펴지며 다관 주인을 무심코 돌아보았다. 노인의 눈은 주인이 뱉아 놓은 단어 하나에 반짝이는 생기가 되돌아온 듯싶었다.

“백룡문? 그게 누구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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