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00화 (100/226)

100. 장강 – 소주

장사에서부터 내리던 비는 장강 줄기를 타고 배와 함께 동으로 흘러갔다.

비의 굵기는 날마다 달랐지만 호우라 부를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소슬한 비가 안개처럼 사방을 적시며 한낮에 물안개를 피우고 사방의 경치를 연기 아래 파묻어 버리니, 강과 뭍의 경계가 모호하며 땅과 하늘의 나눔이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오직 경륜 있는 노잡이와 키잡이만이 그 가운데를 따라 배를 부릴 수 있었으니, 당태세와 아룡은 무릉도원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 어디쯤 왔을까요?”

“무창은 지났으니 양주가 멀지 않았겠지. 양주까지 간 뒤에 그곳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소주로 갈 것이니 아직 길은 멀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룡은 자기 생각보다 갈 길이 먼 것에 슬쩍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뱃전으로 보이는 기기묘묘한 광경을 보며 새삼스레 감탄하는 중이었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아래로 내려가는 뱃전 앞에는 뱃사람이 앞에서 오는 배를 경계하기 위해서 등불을 켜고 수시로 긴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그 기나긴 나팔 가락이 마치 산과 강이 우는 것처럼 들리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더욱 신묘하게 보이고 있었다.

“참으로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합니다. 산동 구석 포구에서 자란 제가 어찌 이런 기막힌 광경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습니까!”

“나도 무두리 널 잘 만나서 말년에 눈과 귀가 호강하는구나. 어찌 네 덕이 아니냐!”

“아닙니다! 이게 다 숙부님을 공후(公侯)처럼 떠받들며 모실 수 있는 저 같은 인재를 발굴한 방주님의 덕이지요. 방주님이 아니셨으면 숙부께서 어찌 저를 등용하셨겠습니까?”

“그래, 너를 만나고 나니 새삼 사람의 중요성이 생각나는구나.”

아룡은 당태세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하게 말하였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실로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저는 제가 한 단계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매일매일 깨닫고 있습니다. 이 넓은 대청의 영토를 둘러보며 황제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보며 저 인간은 닮지 말아야지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일어나니, 이 모든 것은 예전에 제가 갖지 못했던 생각들입니다.”

“오호라. 네가 실로 대인이 되어가는 것이렸다.”

“그렇습니다. 저는 실로 대장부가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기루와 주루를 섭렵하던 젊은이는 자신의 호연지기를 불태우고 있는데 당태세는 이 아이와의 인연을 언제까지 끌고 가야 할지 고민이었다.

지금 아룡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과연 끝까지 도움이 될 것인가. 자신의 복수행을 알게 된다면 그때에도 자신의 옆에 있을 것인가. 당태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룡의 처리에 대해서 고민을 하였지만 아직까지 별 뾰족한 전망은 세울 수가 없었다.

“저는 그럼 잠깐 저쪽에 가서 구경 좀 하고 오겠습니다! 누가 엽자패(葉子牌)를 가지고 놀고 있어서요.”

“너무 돈 많이 걸지 말거라.”

“걱정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무두리 아닙니까!”

아룡이 건들대며 노름판 사이에 끼어들어 가는 것을 본 당태세는 슬쩍 선실 뱃전에 몸을 기대고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그를 살펴보았다.

소주의 백룡문(白龍門)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당태세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노인의 입에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왕양성은 신의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원래 백룡문은 화려한 공부와 무명으로 북경 구대문파에서도 수위를 다투던 문파였다.

백룡문은 본시 하남의 작은 군소방파로 그 안에서 장려한 검법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던 곳이었는데, 백 여년 전, 풍류무진 동방성이라는 걸출한 호협이 하나 출현하며 백룡문의 입지를 완벽하게 환골탈태시켜 주었다.

동방성의 백룡문은 황실 후계자 세력이 이해타산을 따라 여러 개로 쪼개지고 권력의 공백에 무림이 깊숙이 관여했던 철천의 난(鐵天之亂)을 제압한 공적으로 황도에 백룡문의 분타를 내게 되었고, 그 이후 백룡문은 본거지인 하남을 떠나 황도의 중요 무문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 후 백룡문은 하남에서 가져온 자산(資産)과 황도에서의 치부(致富)를 바탕으로 부자 문파로 이름을 날렸고, 황실과의 관계가 있는 무문인지라 황실의 후원도 암암리에 받는 곳이었다.

물론 무공도 뛰어나 따르는 문도가 많았다. 심지어 보국구대문파맹을 결성하였을 때에도 가장 열심으로 참여했던 문파 중 하나였다.

“문주 왕양성은 충의로운 사람이었지.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금월방주가 조사해 온 문파의 표에는 백룡문에 대한 묘사가 담백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강남 소주에 자리하고 있으며 누대의 자산을 잘 운용하여 소주의 명사(名士)로 각처의 호걸들과 교분을 쌓고 있다고 전해짐-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있는지, 뭘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없는 조사였다. 금월방의 조사는 강남으로 내려갈수록 부실하였는데, 아무래도 지역이 멀어지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당태세는 종이를 다시 품 안에 집어넣으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철선군자(鐵扇君子)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무래도 문제는 한소군(寒昭君)이었겠지.”

백룡문은 다른 문파와 다르게 문주가 둘이었다.

엄연히 말하면 철선군자 왕양성이 문주였지만 그의 부인이었던 한소군 도려진은 내주(內主)라 하여 백룡문의 내부인사와 문파의 살림을 책임졌다.

문제는 두 사람의 성격이었다. 백룡문의 한온쌍군(寒溫雙君)이라 하면 문주의 이름을 몰라도 대충 어떤 사람인지 인식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무공 역시 달랐다. 백룡문주 왕양성은 백룡소요보(百龍逍遙譜) 같은 화려하고 불꽃 같은 기세의 양검(陽劍)을 구사한 반면, 한소군 도려진은 백룡음월겸(白龍陰月鎌)과 같은 암습 위주의 무공을 즐겨썼다.

왕양성이 협객행을 즐기며 어진이와 어려운 이를 돕고 권세 잡은 이를 미워하여 대의에 생을 거는 전형적인 무인이라면, 도려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초를 여러 사람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냉철한 여인이었다.

도대체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어떻게 혼약을 했는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고 예전 북경에서도 기사(奇事)라고 여기던 일이었다.

“아마 이자성 군에게 투항을 하자고 했을 때 찬성한 것은 한소군이겠지. 무정금 유독중이 그들을 꼬시고, 이도협 진윤타가 의견을 하나로 조율하고 오자평과 주통산 같은 이들이 찬동을 하게 되면 당연히 다른 이들은 갈등이 생겼을 것이다.”

당태세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끝까지 저항한 사람은 왕양성과 포일문주 마길 정도였겠지. 그리고 왕양성을 다그친 사람은 아내 한소군일 것이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당태세는 그 날 황도의 성벽에서 열렸을 역적모의가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자신이 알고 있던 문주들의 성격으로 봐서는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억측은 금물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왕양성이라는 자가 치세(治世)의 가면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세(亂世)가 되어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었고, 이도저도 아니면 부부가 합작으로 같이 그를 공격했을지도 몰랐다.

당태세는 눈을 감고 자신이 습격당하던 당시를 생각해 봤지만 딱히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분명 백룡문의 깃발은 자신의 기억 속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어림짐작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당태세는 안개투성이의 강물을 살펴보며 다시 아무도 못 알아들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종리세리는 작은 목선 안에 앉은 채 백주를 한잔 마시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전쟁터에서는 한 번도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고, 임무가 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군부의 경사가 있을 때나 슬쩍 입술을 축일 정도였지 평상시에는 시간이 남았어도 술을 입에 가져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는 지금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강을 떠내려가는 작은 배 안에서 그가 쫓는 추적자를 향해 딱히 할 일도 없었거니와, 속내가 뒤숭숭해서 자꾸 잡념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할 것 같았다.

사내는 지금 북경에 보내는 장계를 구상하려다가 그만둔 뒤였다. 제남, 개봉, 무창, 장사를 돌아다니면서 네 명의 문주가 죽은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용의자의 신상도 파악한 뒤였다.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결코 가벼운 이름은 아니었다. 선무사 천호 구이도(仇夷刀) 종리세리에게 검결에서 첫 패배를 준 사내였다. 그리고 젊지도 않은 나이였다.

아마 당태세의 두 다리가 멀쩡하고 지금보다 젊었을 한창 시절일 때였다면 종리세리는 한 합을 기다려줄 여유조차 못 챙겼을 터였다. 가히 일절(一節)이라고 할 만한 무공. 그리고 마지막에 보여준 기이한 여유로움.

종리세리는 장계에 들어갈 초안을 갈기갈기 찢은 채 선창으로 찢은 종이를 날려 보냈다. 사내는 다시 백주를 술병째로 들이키면서 안개 너머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을 절름발이 노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종리세리는 다음 기착지에서 소주로 먼저 연락을 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도 접어버렸다.

모든 것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할 일이었다.

***

“드디어 왔구먼!”

“이제 소주에 도착하는 겐가?”

“언제 봐도 절경이란 말일세.”

뱃길 여행이 물리고 물려 선창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게 괴로와질 정도가 되었을 때, 아룡과 당태세의 귀에 상인들의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룡은 눈을 번쩍 뜨더니만 옷도 제대로 걸쳐 입지 않고 선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먹구름이 점차 개이며 아침의 햇살이 구름 사이로 슬쩍 비출 때, 젊은 청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잔잔한 운하의 옆으로 뻗어있는 장려한 석벽과 우아한 건물들이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어 연결된 물길 위로 우아하게 굽은 돌다리가 배들을 품었다가 밖으로 보내는데, 강변의 능수버들은 모두 물에 닿을 듯 내려와 겸손함을 보이고 있었다.

교묘한 재주로 조각된 다리의 무늬와 멀리 보이는 높은 탑에서는 예불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고, 붉은 등과 적색으로 칠해진 다리의 난간들이 연이어 이어져 수평선과 지평선의 끝을 마무리 지으니 가히 주변에 보이는 건물과 물과 사람 모두가 세상 것이 아닌 듯 보였다.

“내가 실로 천상에 와 있구나.”

입 벌린 아룡의 감탄을 들으며 슬쩍 선실에서 나온 당태세는 주변의 풍광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의 풍광은 이십여 년이 지난 다음에도 바뀐 것이 없었다.

여전히 고아하고 아름다우니 마치 물 위에 따로 떠 있는 보주(寶珠)와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보주 안에는 당태세가 잡아야 할 독사가 하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둘이 될 것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던 노인의 눈이 조금씩 가늘어지며 이윽고 먹이를 노리는 늑대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소주 백룡문.”

노인은 가늘게 눈을 뜨고 자신의 사냥터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