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99화 (99/226)

99. 호광 장사 (17)

모처럼 나왔던 밝은 햇살은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무리에 의해 가리워진지 오래였다.

우기(雨期)는 이제 시작되었으니 언제 그칠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모처럼 바람이 불고 강물이 일렁이는 부둣가에는 성을 나고 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룡은 거대한 대선에 수레를 싣고 나귀를 제값을 받고 팔아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주까지 가는 게 나귀를 싣고 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당태세의 판단을 따른 덕이었다.

당태세는 나귀를 판 돈으로 회색 장포를 맞추었고, 작은 흑단 지팡이 하나도 구입하였다. 소주에서 사겠다는 당태세의 고집보다 여기서 물건을 사 가자는 아룡의 강권을 못 이긴 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배를 타고 길게 여행을 하는데, 우리가 다른 선객(船客)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게 없습니까 힘이 모자랍니까?”

“아니, 우리가 선객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뭐가 있다고 그러느냐?”

아룡은 손가락을 흔들며 당태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숙부님은 사람이 선해서 인생이 가지고 있는 추악함을 모르신다 이겁니다. 원래 사람은 옷이 추레하면 깔보게 되어 있어요! 특히 한족은 가진 건 없는 주제에 허영심만 강해서 사람의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요!”

“그러냐?”

기껏해야 스무살 남짓 나이를 먹은 아룡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세상만사 통달하지 않은 게 없는 것 같았다. 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지요! 제가 왜 늘 이렇게 화려하게 옷을 입고 다니겠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고귀해도 그 모습을 받쳐주는 옷이 없으면 거지 취급 당하는 게 한족들의 세상이라 이겁니다. 좁아터진 배 위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당태세는 이제 아룡을 속으로 욕하는 것도 지겨울 지경이었다. 굳이 괜한 말싸움을 하느니 바로 아이의 청을 들어주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당태세는 자신의 무위(武威)가 서서히 돌아오는 반면, 그에 반대하여 자신의 마음이 점점 여려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나하나 자신의 배신자들을 처형할수록 자신의 마음은 점점 쓰라렸다.

진윤타와 전영포를 심판한 이후, 당태세는 인간사의 허망함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이러다 내가 미쳐버릴 것 같구먼.”

당태세는 새로 다듬은 지팡이를 짚고 아룡이 기다리고있는 부두를 향해 걸어갔다.

사실 이제 지팡이는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었지만 아룡에게 자신의 오른 다리가 철갑을 두르고 예전처럼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적들도 몰라야 하고, 떠벌이는 더더욱 몰라야 하였다. 당태세는 점점 자기 자신의 삶이 기묘한 가면을 뒤집어쓰는 기분이었다.

“천하를 유랑하는 절름발이. 그 옆에는 정신나간 종자가 있고 뒤에는 매서운 칼잡이가 쫓아오네.”

혼자 싯구를 지어내어 읊던 당태세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부둣가 어딘가에서 안모도를 뽑아든 종리세리가 튀어나와도 이젠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자는 당태세가 했던 행적을 모두 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길을 추적하고 있었으니 다음에도 자신이 갈 길을 유추할 것이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품 안을 만져보았다. 영우문주 전영포의 책상 안에서 찾아낸 또 다른 사면장이 그 안에 있었다. 당태세의 생각에는 이 종이가 북경과 그의 접점이었다.

당태세는 이것을 왜 모으게 되었는지 이제는 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여덟 장을 다 모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귀린갈.

당태세는 자기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그저 원수의 품에 있기에 가져온 것 뿐이었다. 앞으로도 이것을 가져올 것인가. 그것은 다음의 목표를 만났을 때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결정된 것은 죽을 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놈 보게. 그냥 보란듯이 장사 일대를 주유하는구먼. 목숨이 너댓 개는 되는 모양이지?”

순간, 당태세는 자신의 앞에서 중얼대는 두 명의 인영을 보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다름 아닌 해도침옹 양중일과 외손녀 류소화였다. 당태세는 양중일에게 예를 표하였고, 양중일은 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왜, 내가 해준 보철(補綴)이 맘에 안 드느냐? 왜 지팡이를 또 짚고 걸어?”

“몸이 멀쩡해진 것보다는 눈을 속이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허, 아주 자기 일에 충실하구먼. 그러니까 하룻밤 만에 영우문을 도륙내었겠지.”

양중일의 이죽댐을 들으면서도 당태세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곳에는 어찌 오신 겁니까? 제가 따로 기별을 드리지도 않았는데.”

“원래 네놈은 일을 마치면 전후좌우 거들떠보지도 않게 제 갈길을 갔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부둣가에 나와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환자 얼굴은 보고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당태세는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뒤에 서 있던 류소화도 두 노인의 대화를 들으며 잔잔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안색이 어떻습니까?”

“명부 구경을 하고 나온 놈 치고는 멀쩡해 보이는구나. 아무쪼록 섭생을 잘 하도록 해라.”

“해도침옹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오늘 저는 이곳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볼 날이 있겠느냐?”

“글쎄요.”

두 노인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남아 있는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권리이지 늙은이들의 욕심이 닿을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오늘이 살아생전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마지막 날이 될 터였다. 둘 다 아는 말을 굳이 꺼낼 이유는 없었으니, 남은 것은 미소를 짓는 것뿐이었다.

“너와 전영표 둘을 내 침방에서 같이 봤던 게 어제 일 같다. 한 놈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명부로 먼저 갔으니 이제 남은 건 둘이다. 이렇게 서로를 보며 웃는다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이다만…….”

“모든 것은 천명(天命)이겠지요.”

당태세의 말에 해도침옹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당태세가 빤히 양중일을 쳐다보자 양중일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노인을 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모든 것은 도리(道理)니라. 결국은 인생의 종당에 나를 만드는 것은 도리일 뿐.”

당태세는 흐린 하늘 아래 출렁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강물을 흔들지만 결국 강은 늘 그곳에 있으니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고 강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소항으로 가 백룡문과 동성문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다음은 서안의 사형문이냐?”

“서안의 사형문, 사천의 포일문이 마지막이겠지요. 때가 되면 더 들를 지도 모릅니다만… 그리 되면 제 과업도 끝날 것입니다.”

“그다음은 무엇이 있느냐?”

양중일의 말에 당태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계속 생각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해도침옹께서는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양중일은 어깨를 들썩하더니 뒤에 있던 외손녀를 돌아보았다.

“나야 손녀와 여기서 일평생 고락을 끝내야지. 하지만 내 한 번 무창은 다녀와야겠다. 남평수 이놈, 제 입으로 스승이 어디 숨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이거지?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써 놓으면 그게 어디 맹세를 지킨 것인가? 나중에 무창에 가면 파문시켜 버릴 것이네.”

“진짜 파문시킬 생각은 있소? 그저 보고 싶어 가는 것이면서 말이 많구려.”

“이놈, 네놈도 꼴에 늙었다고 의뭉스럽기 그지없어졌구나.”

두 사내는 서로를 보며 호쾌하게 하늘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쾌한 감정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다.

당태세는 그제서야 자신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수라도를 사는 악귀 나찰의 삶에 어찌 휴식이 있으리오만 그래도 이생에 발을 딛고 사는 인생 아니랴. 어찌 괴로움만이 삶의 전부일까. 이 길의 끝에 가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

당태세는 해도침옹 양중일이 말한 그 도리(道理)라는 것을 마지막에 만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나저나 류소저는 어찌 이곳까지 오셨소. 그저 이 늙은 몸은 도움이 안 되는 일만 하였거늘.”

“아니에요. 저도 인사를 드려야지요. 짧은 시간이지만 제게 잊지 못할 일을 만들어주셨는데.”

“아무쪼록 그게 흉한 기억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외다.”

당태세의 말에 류소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진 않을 거예요. 제 기억 속에 당노사는 좋은 분으로 남아 계실 거예요. 그리고 다른 분에게도요.”

“다른 분이라니?”

당태세가 눈을 껌벅이자 류소화는 뒤를 바라보더니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이리 오시는군요.”

당태세는 무슨 말인가 싶어 류소화의 뒤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바람이 세지며 강둑의 풀들이 옆으로 눕는데, 그 바람을 뚫고 한 여인이 푸른 박사를 두른 채 세 사람이 모여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여인은 당태세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만 이내 두 손을 모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당태세의 신발 앞에 머리를 비비며 울음을 터뜨렸다.

“노야! 못 뵙고 그대로 떠나시는 게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당태세는 그제야 이 여인이 누군가 알아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호부인의 막내딸이 아닌가. 여인은 한참동안 당태세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더니 머리를 들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제 어미의 포한을 풀어주시고, 제 목숨을 구해주셨고, 저희 가문의 욕됨을 하룻밤 만에 씻어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겠습니까?”

“소저. 일어나시오. 나는 할 일을 한 것뿐이오.”

“아닙니다. 장사에서 평생 어찌 살 것인가 두려워 잠 못 자던 때가 매일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 이렇게 가슴 속의 천근 무게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제 가족의 원한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을 까무라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노야, 노야께서는 하늘이 내려주신 분이예요. 정말 이 은혜를 제가 어찌 잊겠어요?”

당태세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노인은 우는 여인을 바라보다 허리를 숙이고는 여인을 달래주려 하였다. 뭐라 말할 것인지 딱히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일어나시오. 소저. 나는 그저….”

당태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도리(道理)를 행한 것뿐이라오.”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

장부비무루(丈夫非無淚: 장부 눈물이 없는 것은 아니나)

불쇄이별간(不灑離別間: 이별에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네)

장검대준주(杖劍對樽酒: 칼을 차고 술잔을 맞대는 때에)

치위유자안(恥爲遊子顔: 나그네의 슬픈 얼굴 부끄러울 뿐)

복사일석수(蝮蛇一螫手: 독사가 튀어나와 손을 문다면)

장사질해완(壯士疾解腕: 장사는 속히 팔을 잘라내는 법)

소사재공명(所思在功名: 뜻한바 공명을 얻는 것인데)

이별하족탄(離別何足歎: 어찌 이별로 탄식하리오)

해도침옹의 입에서 육구몽의 당시(唐詩)가 흘러나왔고, 바람을 받은 돛이 천천히 배를 위로 띄워 보냈다.

소상강을 지나 동정호를 타고 올라간 배는 장강을 지나 동으로 동으로 움직이며 소항의 화려한 운하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태세는 또 다른 인연을 풀러 갈 터였다.

“제석망으로 얽힌 인생사가 한 번에 풀리겠느냐마는….”

해도침옹은 말을 아꼈다. 어느새 강어귀에서는 비가 소슬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노인이 장사에 들어올 때와 나갈 때, 하늘은 그 대우가 공평하였다.

당태세가 탄 커다란 배가 포구를 떠나고 있을 때, 작은 목선 하나가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은 첩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한 관인(官人) 하나가 뱃전에 발을 올렸다.

사내는 출렁이며 흔들리는 뱃전에 서서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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