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98화 (98/226)

98. 호광 장사 (16)

“기침하셨습니까?”

종리세리의 머릿속에서 맨 처음 울린 소리는 누군가 먼 곳에서 어딘가를 향해 외치는 소리 같았다. 사내는 꿈속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사방이 시커먼 안개가 드리워져 방향과 갈 길을 모르는데 자신은 발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푹푹 뻘에 다리가 잠기고 있었다. 이윽고 발을 빼지 못할 지경이 되어 사방을 돌아볼 때, 하늘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찾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야. 아이야. 네가 어이하여 이곳에 와 있는 것이냐.

“기침하셨습니까?”

두 번째 문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종리세리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뜬 그가 맨 처음 본 것은 햇살이 가득 들어와 있는 그의 침소였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다 가슴의 뜨끔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군문(軍門)에 들어온 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수많은 전장과 토벌에 참여하며 크고 작은 부상도 수차례 겪었지만 이렇게 심신이 피폐하여 문밖에서 사람이 부르는 데도 듣지 못하고, 심지어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잠을 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들어오라.”

사내의 말에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변발친 형리 하나가 절도 있게 들어와 선무사 천호에게 예를 취하고 시립하였다.

종리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문지르면서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만났던 당태세의 일격은 아직도 그에게 내상을 남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종리세리의 물음에 형리는 보고받은 바를 기억하느라 잠시 천장을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이 보고받은 바를 읊기 시작했다.

“어젯밤 해시(亥時) 경에 영우상방에서 보고 받은 바가 있어서 알려드립니다. 영우상방의 방주 전영포가 이르길, 선무사 천호께서 말하신 적도(賊徒)의 신병을 확보하였으니 어서 와서 인수를 해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순간 종리세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내는 급히 자신의 피혁화와 허리띠, 칼집을 찾으며 전에 없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두 다리뿐이 아니라 사지가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파 왔다. 종리세리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자 서 있던 형리가 종리세리를 부축하며 다급히 말을 걸었다.

“천호 나리! 서두르지 마십시오. 천천히 가셔도 되옵니다!”

“어제 해시에 들어온 전갈이라 하지 않았느냐! 벌써 해가 중천에 올라갈 시간인데 내가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늦어도 별 상관없사옵니다.”

종리세리가 무슨 소리냐는 듯 형리를 돌아보자 형리는 잠시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슬쩍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천호에게 대답을 이어갔다.

“실은…… 오늘 아침 새벽에 영우상방 사인(使人)에게서 한 번 더 전갈이 왔사온데…….”

형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종리세리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져 갔다.

***

“아니 어디서 주무시고 오신 겁니까? 옷은 또 왜 그 모양이세요?”

아침 단잠에서 깨어나 방을 둘러보던 아룡은 침상에서 비척대던 당태세를 발견하고는 적잖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노인을 돌아보았다. 노인의 옷은 어디 공사판이라도 돌아다닌 듯 먼지투성이인데다 장포의 아랫자락은 위아래도 좍 찢겨 있었다.

게다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노인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마저 반 동강이 난 채 침상 아래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슬쩍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려던 당태세는 아룡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다가 손사래를 치며 말하였다.

“아이구, 무두리. 내가 어제 참으로 죽을 뻔하였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글쎄, 밤에 소상강의 정취를 보겠다고 강둑을 걷다가 그만 지팡이를 헛디디고 말았지 뭐냐? 그대로 강으로 굴러 떨어져 익사할 뻔하였느니라. 그나마 근처에 있던 어부의 그물에 걸려 이렇게 목숨은 부지했는데…….”

“옷하고 지팡이가 찢어지신 겁니까?”

당태세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책맞은 노인이 나잇값을 못 하였다는 듯 당태세는 아룡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우물대며 말을 주워섬겼다.

“어부가 나를 뱃전에 끌어올려 주었는데, 그 와중에 지팡이와 옷이 부러지고 찢어졌지. 그나마 옷을 말리고 지금에서야 살아 돌아왔으니 이제 천운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아니, 그 어부에게 옷값과 지팡이값을 보상해 달라고 해야지요! 그냥 보내셨어요? 장사의 한족들은 정말 정이 안 갑니다! 어떻게 노인 지팡이를 부러뜨리고 돈도 안 준단 말입니까?”

“그러게 말이야….”

당태세가 맥없이 자리에 앉아있자 아룡은 자신이 화가 난다는 듯 씩씩대며 방안을 돌아다니는데, 실로 격동시키고 속여넘기기에 이렇게 좋은 위인이 없었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아룡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얘야. 무두리. 아무래도 네 말이 맞는 듯 싶구나.”

“네? 뭐가 말씀입니까?”

“이곳은 내가 예전에 봤던 대처 장사가 아니다. 사람들이 이상해지고 물산도 예전만 못한 것 같다. 내가 괜스레 너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 같구나. 그냥 네 말마따라 소항으로 바로 갈 것을.”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오래 된 추억은 믿을 것이 못 된다니까요. 같은 값이면 소항(蘇杭)이지 어찌 장사가 비교가 되겠습니까!”

당태세는 아룡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이 났으니 말인데 지금이라도 바로 출발할까?”

“네?”

“바로 소주(蘇州)로 가잔 말이다. 어차피 장사에서 배를 타고 가면 한참 동안 뱃놀이를 하며 갈 수 있으니 그것도 꽤나 괜찮은 풍류 아니겠느냐?”

당태세의 말에 아룡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산동에서 맨 처음 유람을 떠날 때에도 제일 먼저 들러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곳이 바로 소항, 소주와 항주(杭州)아니던가. 아룡은 입이 저절로 벌어지면서도 짐짓 점잖은 척 헛기침을 하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먼길 떠나는 것인데 식료하고 숙부님 옷, 지팡이 정도는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식료 같은 것은 준비할 것이니 숙부님도 오늘은 여행 채비를 하시는 게….”

당태세는 고개를 저으며 되었다는 듯 말했다.

“아니다. 네 진중함과 부지런함이 있으니 내가 무슨 걱정이랴! 옷이야 소주에서 사는 것이 더 낫겠지. 기왕 사는 거 지팡이도 소주에서 제대로 된 것을 사는 게 낮지 않겠느냐?”

당태세의 말이 끝나자 마자 아룡은 터지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까요? 그러면 저는 나귀랑 수레나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바로 떠나는 게 낫겠습니다!”

“오냐, 그러자꾸나!”

아룡이 방문을 박차고 뒷마당으로 달려나가자 당태세는 물끄러미 땅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노인은 그제야 온몸으로 밀려드는 피로를 실감할 수 있었다. 실로 노구가 버티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하룻밤이었다. 노인은 어젯밤과 오늘 아침 본 모든 광경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십칠 년 전의 추억 중 좋은 것으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인생에 아름다운 것으로 남는 것은 얼마나 될 것이냐.

“……하루라도 빨리 모든 것을 완결하는 것이 낫겠지.”

홀로 남은 추레한 복색의 노인은 웅크리고 앉은 채 더는 말이 없었다.

***

검은색으로 칠해진 장원의 안은 무더웠고, 이미 지독한 냄새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현장을 들어온 형부의 관리들과 형리들은 사방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 임직한 지 얼마 안 돼 이런 무자비한 광경을 처음 본 젊은 형리들은 담벽에 기대어 교대로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전욱성과 전욱균 형제가 부하들과 함께 죽은 게 발견되었습니다. 동쪽과 서쪽의 숙소에서도 각각 연무장에서 죽은 것과 비슷한 인원이 사망했고, 사인은 모두 칼에 의한 도상입니다.”

“모두 몇인가?”

“거의 육칠 십… 합치면 백 명에 가깝습니다.”

형리의 보고를 받던 통판(通判)은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하룻밤에 백 여명을 죽인다는 게 말이 되나? 그것도 영우상방의 도수들을?”

“게다가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칼자국이 하나씩만 남아있습니다.”

“그게 무슨…….”

어젯밤에 검귀(劍鬼)가 장사 성내를 활개치고 돌아다닌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지금까지 영우상방에 화를 입은 원혼들의 장난인가.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진 통판은 해쓱해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통판의 뒤에는 동쪽과 남쪽 벽이 박살난 채 바깥의 풍경이 다 들여다보이는 뻥 뚫린 영우방주의 집무실이 펼쳐져 있었다.

영우방주의 시신은 집무실의 한가운데 하늘을 보고 쓰러져 있었고, 북경에서 왔다던 천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죽은 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쩍 바람이 부서진 벽으로 통해 들어오자 시취(屍臭)가 통판을 향해 풍겨왔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으며 통판은 종리세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종리세리는 처참하게 죽은 영우방주의 옷 속을 한참 동안 뒤지더니 별 소득이 없었던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통판은 이 피비린내 나는 광경에서 저렇게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해 보였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으십니까?”

통판의 말에 종리세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단한 무공의 사내였다는 것만 알겠소이다. 이 벽 두 군데는 이 사내가 부순 것이오.”

“사람이 벽을 부술수도 있는 것이군요.”

“굉장한 신력과 무공이 있는 사람임은 알고 있었소이다. 생전에 도끼를 사용했었군.”

“그렇다면 이 자를 죽인 자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가 도를 사용했단 말인가? 칼 대신 곤을 사용하였던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오. 내 혼잣말이라오.”

통판이 기묘하다는 표정으로 종리세리를 바라보자 종리세리는 슬쩍 고개를 들고 통판의 주위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뭔가 특이한 것을 발견한 것은 없소이까?”

종리세리의 말에 통판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침입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깔끔해요. 자취도 찾을 수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돈까지 털어갔지 뭡니까.”

“돈을 털어가?”

종리세리의 질문에 통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의 책상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저 안에서 부서진 상자와 은조각 몇 개를 발견했습니다. 영우방주 생전에는 아마 가득 차 있었겠지요? 세상에 어떤 도적놈이기에 이런 곰 같고 늑대 같은 이들이 몰려있는 곳에 들어와 대학살을 하고 금품을 훔쳐간답니까 그래. 선량한 백성들은 잠도 못자는 흉흉한 민심은 어찌한단 말인가….”

종리세리는 가만히 서서 통판의 말을 듣다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들이 선량한 백성들이라도 된단 말이오?”

“네?”

“지부대인께서는 이 일을 어찌하실 요량이시랍니까? 대대적으로 추포령이라도 내리실 겁니까? 영우상방이 멸문했으니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통판의 물음에 종리세리는 미소 위에 차가운 눈빛을 보이며 통판을 노려보았다.

“그냥 없는 셈 치는 것이 그대들에게도 낫지 않겠소.”

“처, 천호 나리… 그게 무슨 말씀… 이신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터인데? 그동안 장사 지부의 지저분한 일은 누가 해결한 거요? 녹영군을 풀어서 해결했다고 보고할 텐가? 아니면 그냥 저절로 문제가 없어진 거요?”

종리세리는 차가운 눈으로 통판을 노려보았다. 맨 처음 봤을 때와 다를 바 없었던 황량하면서도 서늘한, 인간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듯한 한기(寒氣)가 통판의 몸을 꿰뚫었다. 통판이 말없이 연신 혀로 입술을 축이자 종리세리는 시선을 거두고 짧은 말을 남겼다.

“지부대인께 전해주시오. 그동안 숙소 잘 썼다고.”

종리세리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종리세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통판은 결국 무릎을 꿇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햇살은 어느새 푸른 하늘의 위로 올라와 있었다. 날은 무덥기 그지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