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장사 영우상방 (5)
비록 해가 뜰 시간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박명(薄明) 하나 비치지 않는 하늘은 어둡기만 하였다. 게다가 흑칠로 전역을 도배해 버린 영우상방의 안쪽은 횃불이 없으면 땅에 떨어진 동전 하나 찾기도 힘들만큼 어두웠다.
그 어두운 장원의 횃불 사이로 노인 하나가 유엽도를 들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노인의 발에서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고, 스쳐가는 횃불이 만드는 얼굴의 그림자는 변화가 없었다.
이미 새벽녘에 일찍 일어난 영우상방의 방도들은 모두 자신의 무기를 지참하고 무공연마를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누구냐?”
그중 계단을 내려와 장원으로 가는 복도를 가로질러 가던 영우상방의 방도가 칼을 들고 천천히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청의의 장포를 두르고 검은 바지를 입은 흰 수염의 노인은 영우상방의 방도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손에 칼을 들고 눈에서 살기가 폭사하는 노인은 보폭을 바꾸지도 않은 채 저벅저벅 사내들을 향해 다가오는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를 처음 바라본 방도는 전신을 압박해 들어오는 살기에 채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은 채 자신을 따라오는 이들에게 허우허우 손짓을 하였다. 가까스로 열린 입에서 나온 말은 딱 한마디였다.
“치… 침입자다!”
방도의 말에 계단을 내려오던 영우상방의 흑의인들은 모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어느새 계단의 아래 참까지 큰 걸음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계단참 위에 있던 사내들은 노인 외에 다른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눈썹을 곤두세우고 큰소리로 노인을 향해 일갈을 날렸다.
“뭐 하는 놈이냐! 뭐 하는 놈이기에 감히 영우상방에서 칼을 들고….”
순간, 번뜩이는 섬광이 노인의 손에서 빛났다 싶은 순간, 맨 앞의 계단참에 있던 방도가 피를 뿌리며 모로 넘어가는 꼴이 사내들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사내들의 입이 떡 벌어지며 모두 대련용으로 준비하고 있던 목봉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계단참의 또 다른 방도가 그대로 피를 뿌리며 앞으로 고꾸라지자 방도들은 일제히 소리와 비명을 질러대며 다시 계단을 타고 위쪽으로 앞을 다투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사내들의 뒤에서 다시 구성진 비명이 들려왔다.
이제 사내들에게 오와 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위로 뛰어올라가며 아직 채비를 하고있는 동료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모두 칼을 잡아라! 창을 잡아! 실전이다! 적이 쳐들어왔다!”
순식간에 방도들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계단 앞에 있던 방도 하나가 바닥에 튕기듯 쓰러지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그때, 검은 바지가 불쑥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쓰러진 채 뒹굴고 있던 방도의 목을 모질게 밟아버리더니 그대로 방향을 틀어 방도들의 숙소와 무기고를 향해 걸어왔다.
계단을 타고 올라온 노인이었다. 노인의 손에 들린 유엽도가 피로 번들거리는데, 노인의 안색과 걸음걸이는 맨 처음 연무장에서 목격했을 때와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죽어!”
순간 한 명의 영우방도가 칼을 내리치며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노인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영우방도의 칼이 챙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올라가고 젊은 사내의 몸이 붕 뜬 채 피보라를 뿜으며 공중제비를 넘었다.
일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모습을 보던 영우방도들은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무기고를 향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뛰어들었다.
“도수가 먼저 앞장서라! 그 뒤를 창수가 받는다!”
그나마 맨 처음 정신을 차린 경험 많은 영우방도가 동료들을 조직하며 방진을 급조하였다. 칼을 든 사내들이 앞장서서 노인을 향해 달려나가자 그 뒤를 장창을 든 방도들이 뒤따르며 도수들의 어깨너머로 창끝을 겨누고 전진해 들어오는 노인을 막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노인의 발이 슬쩍 앞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다음에 보인 것은 보는 자도, 검과 창을 든 자도 불가해한 광경이었다. 노인의 칼질 한 방에 도와 창이 한꺼번에 밀리며 노인이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두 번째 칼질에 창날이 수수깡처럼 잘려나갔고, 세 번째 칼질에 앞에 서 있던 도수 세 명이 동시에 목에서 피를 뿌리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네 번째 칼질에 나무막대로 변한 창을 들고 있던 창수들이 그대로 목이 날아간 채 주저앉았고 노인이 칼을 다시 앞으로 겨누었을 때 영우방도들이 만들었던 진용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된 채 지리멸렬 박살이 나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남은 방도들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지금 앞에 있는 노인에게 창검을 가져간다는 것은 아무런 효용이 없는 짓 같았다.
말 그대로 늙은 도귀(刀鬼)가 앞에 서 있었다.
노인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남아 있는 영우상방의 방도들에게 전해졌다.
“내가 묻는다. 영우상방의 남은 방도들은 모두 몇이냐.”
“…이곳에 스물, 동방(東房)에 스물, 그리고 부방주님들의 직속으로 스물이다.”
“오래 걸리진 않겠구나.”
노인의 말에 나머지 방도들을 이끌고 있던 선임 방도는 그가 누구인지를 그제야 알아냈다. 어젯밤 방주님과 부방주 두 사람이 검결 끝에 지하 암옥(暗獄)에 넣었다던 늙은 마두였다.
듣기로는 분명 방주와 부방주가 무기를 빼앗고 결박하여 황도의 뇌옥으로 끌고 갈 준비를 마쳤다고 한 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자가 여기 반나절도 못되는 시간에 당당히 탈옥하여 자신들의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너희는 그간의 업보를 받아라.”
순간, 영우방도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음산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살기가 빛나는 유엽도를 타고 날아들고 있었다.
사내는 재빨리 자신의 도를 들어 밀려오는 유엽도를 막으려고 애썼다. 사내의 마지막 기억은 번쩍이며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한 줄기 은빛 섬광이었다.
***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왜 동서 양방의 군사들이 모두 늦는 거지?”
동소장(銅蕭墻) 전욱성이 못마땅하다는 듯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동생인 양매군(兩魅君) 전욱균을 돌아보았다. 양매도 역시 이상하다는 듯 동쪽과 서쪽의 회랑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방도를 보며 물었다.
“양방이 오늘 따로 움직이는 일정이 있었더냐?”
“아닙니다. 소인이 알기로는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이상하군. 연무에 한 방이 늦은 적은 있어도 양 방이 같이 늦은 적은 한 번도 없었거늘.”
“어제 술이라도 마신 것인가? 어째 점점 모두 기강이 흩어지는 모양새구나.”
동소장의 볼멘소리에 양매군도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사이 성부의 일이 어수선하니 방도들이 제멋대로 일탈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개중 몇을 추려 내어 일벌백계를 해야 제대로 규율이 잡힐 것 같습니다. 형님은 날을 잡으셔서 각 방별로 한 사람식 치죄를 하시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양약(良藥)이 고어구이이병(苦於口而於病)이라 하지 않더냐. 따끔하게 혼내야 방의 기틀이 잡히겠지.”
그때, 그들의 앞에 있던 방도가 손을 들어 동방의 계단을 가리켰다.
회랑을 따라 한 명의 사내가 다급하게 연무장을 향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사내의 차림새는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검은 제복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고 비틀대며 사람은 동소장과 양매도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드는데 이미 발걸음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 급기야는 두 손과 두 발로 기다시피 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동소장이 굳은 표정이 되어 방도들을 바라보더니 짧게 구령을 내렸다.
“모두 뒤로 가서 칼을 꺼내 와라!”
동소장의 명과 함께 방도들이 우르르 연무장의 벽으로 몰려가 거치대에서 칼을 꺼낼 때, 비틀대던 사내가 겨우 동소장 전욱성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양매도 전욱균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앞에 도달한 방도의 온몸에는 그야말로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것도 칼에 의한 상처였다. 동소장 전욱성은 몸을 굽혀 그의 앞에 쓰러진 방도를 잡고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냐! 어찌 된 것이야! 왜 너만 이곳으로 왔느냐?”
“부방주… 몸을… 피하십….”
“이미 늦었다!”
순간 동쪽 계단 위에서 크지 않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나이든 노인의 목소리였다.
양매도 전욱균이 몸을 펴고 반사적으로 쌍도를 뽑아 들었다. 동소장 전욱성 역시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동편을 손에 감싸쥐었다. 하지만 사내의 얼굴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설마 지금 그 목소리…….”
뚜벅뚜벅 사내 하나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번쩍이는 검은 바지를 입은 사내가 기이한 빛으로 빛나는 유엽도를 손에 들고 연무장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변발을 친 머리에 하얀 콧수염, 그리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짐승 같은 눈동자의 노인은 다름 아닌 귀린갈 당태세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형님. 저 작자 다리…….”
“……귀신이냐.”
전욱성이 꿀꺽 침을 삼키고 접근해 오는 늙은이를 바라보는데, 이미 노인은 피를 충분히 봤는지 눈빛이 기이하게 빛나며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죽이겠다는 살심이 충천해 있었다. 마치 역병신(疫病神)이 걸어오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당태세의 입이 먼저 열렸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동소장.”
당태세의 눈을 마주 보는 동소장 전욱성을 보며 당태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네 놈이 호부인의 등에 매화문을 놓은 놈이렸다?”
동소장 전욱성은 대답 대신 자신의 동편을 눈썹 위로 들어 올리고 당태세의 칼을 받아칠 준비를 하였다. 형의 자세를 보고 있던 양매도 역시 쌍도를 들자 뒤에 있던 영우방도들 모두가 도법의 기수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동소장과 양매도를 비롯한 영우상방의 사내들은 모두 무기를 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칼을 들고 다가오는 노인에게 먼저 다가서려는 자가 없었다.
“죽을 각오는 되어 있지만 먼저 죽을 생각은 없다 이거냐.”
당태세가 앞에 있는 사내들을 노려보며 제자리에 우뚝 섰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유엽도를 늘어뜨린 늙은 사신(死神)은 젊은 방도들을 보며 차분하게 말하였다.
“사람이 있을 곳과 있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하지 못하는 죄가 인생에 가장 큰 죄다.”
당태세는 칼을 들고 그를 바라보는 마흔 개가 넘는 눈동자들을 노려보았다.
“덤벼라. 칼을 버리고 빌어봤자 살려주지 않는다.”
“이야아아!”
앞에서 부들대며 당태세를 노려보던 영우상방의 방도 하나가 검을 뽑아 들고는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뛰어들며 길게 팔을 뻗어 검을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노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노인의 칼은 슬쩍 궤도를 틀고 들어오는 검을 휘감아 다시 앞으로 뻗었다.
한줄기 핏줄기와 비명과 사내의 몸이 한데 휘감기며 그대로 포석 위에 뿌려지는데, 노인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나머지 사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란 말이다.”
노인의 이가 드러나며 섬뜩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양매도 전욱균이 주위를 돌아보며 칼을 당태세에게 겨누었다. 영우상방의 후계자는 결심을 굳힌 얼굴이었다.
“모두 싸워라! 싸워서 살아남아라!”
“존명!”
당태세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번득이며 검을 세웠다.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