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장사 영우상방(3)
어느 틈엔가 해는 저물고 서쪽 하늘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붉은 석양이었다.
당태세는 작은 술병을 하나 들고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하늘과 같은 색으로 붉게 물든 강을 보며 감회에 젖어 있었다.
술에서는 신맛이 올라왔다. 기이한 맛이었다. 달콤하면서도 알싸했지만 취기는 전혀 올라오지 않는 이상한 술이었다.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아버지.”
“오, 그러냐.”
어느새 당태세의 옆에는 창을 들고 시립해 있는 건장한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시커먼 흑발과 그에 걸맞은 검은 눈동자를 지닌 훤칠한 청년은 곰 같은 어깨와 범 같은 허리를 지니고 있는 장부였다.
당태세는 옆에 서 있는 청년을 빤히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맛없는 술을 다시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취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좋은 경치에 범 같은 아들이 함께 있었다. 당태세는 마음이 푸근해지며 무엇인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어머니는 잘 있느냐?”
“아버지를 그리워하시지만 평소와 같이 지내십니다. 늘 걱정이 많으시지요.”
아들은 침착하고 아비를 닮아 말이 짧았다. 당태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내 걱정을 할 것이 무엇이냐? 나야 늘 거기서 거기인데.”
“다리는 어떠십니까?”
“해도침옹이 대충 손 봐주기는 했다만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한다는구나.”
당운천은 슬쩍 아비의 다리를 살펴보더니만 근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일은 길게 보고 나갈 일이지 단숨에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네 녀석이 결정할 일이 아니야. 이건 아비의 문제다.”
“저와 어머니 때문에 벌이신 일이라면 더욱 쉬시는 게 맞습니다.”
당태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어찌 이런 일이 내 가족 하나 때문에 벌인 일이겠느냐. 물론 너와 네 어미에 대한 포한이 맺혀 몸을 떨치고 일어난 것은 맞다만….”
당태세는 물끄러미 붉은 해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강호가 존재할 때에도 의리란 소인배의 손바닥과 같았다. 자신의 손익에 따라 약속을 뒤집는 자가 수십 수백이었지. 하지만 그것으로 강호가 망하지는 않았어. 늘 그곳에는 소인배보다는 그들을 보며 비분강개하는 지사들이 있었다.”
당태세는 작은 술병의 술을 목에 쏟아부었다. 취기는 올라오지 않고 들큼한 맛이 대신 혀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강호가 소인배들에게 뒤집혀 천하를 들쑤시는 지렛대가 되지 않기를 바랐지. 어느 때는 대다수가, 어느 때는 소수만 남은 지사들이 충실히 그 역할을 하곤 했었다.”
당태세는 이제 비어버린 술병을 나무 아래 내려놓았다. 취하지 않는 술이었지만 술기운에 말을 내놓는 기분을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까지더구나. 약자가 당연히 핍박받고 가진 자가 자연스레 대접받는 세상은 이미 내가 젊을 때 도래했더랬다. 세상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저 협사(俠士)의 시도는 우행(愚行)일 뿐이었어. 그래도 그것이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빛을 볼 것으로 믿었건만.”
당태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그리고 나는 그 꿈의 끝자락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는 반쯤 살고 반은 죽은 늙은이로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늙은 사내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쓸모없는 꿈에 끌어들였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았어야 하는데 일이 거꾸로 되었구나. 이 아비의 미안함과 죄를 어찌 갚아야 한단 말이냐?”
“아닙니다. 아버지. 어찌 그것을 꿈이라 생각하십니까.”
당운천이 당태세를 보며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창을 잡고 있는 젊은이의 눈은 예전 이자성에게 황도가 포위되었을 때 보여주었던 불같은 기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여럿이 가지 않고 홀로 간다 하여 그것이 틀린 길이 되지는 않습니다.”
“운천.”
“한때의 비굴함으로 풍요로운 여생을 얻을 수 있다 말하는 자들에게 무슨 교육과 도리가 필요하며 그들의 자손을 무엇으로 훈육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살아있음에 변명을 붙이는 것입니다.”
당태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있는 것이 낫지 않으랴?”
눈물을 흘리는 당태세를 보고 있던 아들 당운천의 눈이 번득였다.
“저와 어머니를 위한 일이 아니라 말씀하실진대, 제가 죽고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무엇을 하셔야 합니까?”
순간, 당태세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뜬 곳에는 암흑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이 뻐근하고 오른 다리가 짜릿하게 시려 왔다. 당태세는 아직도 자신이 호흡을 하고 있고 손에 딱딱한 바닥과 지푸라기가 만져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넓은 영우상방의 연무장에서 삼 대 일로 싸운 뒤 전영포의 공격에 패하여 쓰러진 기억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흘러나왔다. 지금이 며칠이나 지났는지, 아니면 몇 시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는 살아있었다.
당태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움직였다. 다리의 통증이 날카롭게 그의 뇌를 후벼팠다.
“오른 다리는 아직 붙어있나보군.”
순간, 당태세는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 바닥을 더듬었던 손 역시 허리 뒤춤으로 돌아가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왼 다리 역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끙끙대며 몸을 돌려보려 애쓰던 당태세는 그제야 자신이 손을 뒤로 묶이고 발까지 꽁꽁 밧줄로 묶여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자신의 구속(拘束)을 깨닫는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당태세는 묶은 손을 벌레처럼 까닥대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영포, 다 늙은 내가 뭐가 무섭다고 이렇게 꽁꽁 묶어서 옥에 쳐 넣은 게냐!”
입에서는 헛웃음이 연이어 나왔지만 지금 이렇게 누워서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뭔가 방도를 찾아야 했다. 당태세는 두 팔에 힘을 주어 밧줄을 끊어보려 하였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시도였다.
영우상방은 자신의 팔을 뒤로 돌려 묶은 것도 모자라 두 팔을 몸뚱이와 다시 묶어 버린 것이었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두 손목과 열 손가락뿐이었다. 그렇다고 손바닥에 매듭이 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당태세는 한참 동안 손목을 까닥대다 제풀에 지쳐서 벌러덩 위를 보고 누운 채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완벽하게 패배한 것 같구먼.”
당태세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어이없는 검결로 끝나버린 복수행은 장사에서 마무리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악전고투하며 헤쳐 나온 지옥도에서 당태세가 얻은 것은 달랑 원수 세 놈의 목숨뿐이었다. 가슴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노인의 이가 부드득 갈리며 보이지 않는 천장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인가.”
순간, 사내는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신을 차리기 전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태세는 눈을 깜박이며 시커먼 천장을 배경으로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당운천의 모습을 기억하려 애썼다. 꿈에서 본 아들의 모습과 목소리는 생시와 다를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노인은 이를 악물고 흐느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래. 네가 말한 대로구나.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이랴.”
젖었던 노인의 눈에 다시 광채가 어리고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내의 입에서 통곡 대신 짐승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피 묻은 과거를 피 묻은 손으로 다시 파헤치려고 나온 것이다!”
사내는 거칠게 내뿜고 있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호되게 태질당했던 등은 다행스럽게도 어디 한군데 부러진 것 같지도 않았고 숨쉬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당태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머리 뒤로 땋아 놓은 금전서미의 머리카락이 바닥과 등에 깔리며 뒷머리를 당기고 있었다. 순간 당태세는 눈을 깜박이더니 다시 몸을 똑바로 눕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묶인 손은 길게 땋아 내려온 변발의 머리 타래 끝을 잡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다시 몸을 돌렸다가 고개를 세차게 뿌리고 몸을 데구르르 돌려 자신의 머릿단 끝이 손바닥에 닿을 수 있도록 만드는 중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머리가 손에 닿을 때까지 머리를 돌리고 다시 몸을 돌리고 머리를 세차게 젖히고 다시 몸을 벌레처럼 돌리는 일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헐떡이며 손으로 바닥을 더듬던 당태세의 입가에 히죽 미소가 올라왔다.
“드디어 잡았다.”
사내는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조심스레 잡아당기고는 묶어놓은 타래의 끝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이윽고 당태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곳에 보관하기로 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군.”
당태세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가느다란 백사은침 한 가닥이 잡혀 있었다. 당태세는 양중일에게 구입한 백사은침들을 변발을 친 금전서미 안에 꽃아넣어둔 뒤였다.
백사은침의 생김새는 머리카락이나 진배없었고 색깔도 흰 머리카락과 다를 바가 없으니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당태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엄지와 검지로 잡고 있는 은침에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원래 은침은 그 끝의 날만 날카롭게 제련되어 있는 무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극도로 가늘게 만들어진 세침은 기공과 속력을 더할 수 있다면 그 옆면으로도 종잇장 정도는 가볍게 벨 수 있었다.
“밧줄이 잘라지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만.”
당태세는 손목을 돌려 엄지와 검지로 쥐고 있던 백사은침을 자신의 손을 묶고 있는 밧줄에 갖다 대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재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이자 지직대는 소리와 함께 밧줄이 긁히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백사은침의 절삭력은 나쁘지 않았고, 한 다경이 지날 시점이 되자 우두둑 소리와 함께 손목을 묶어 두었던 밧줄이 풀려나갔다.
“됐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사내는 자신의 몸통을 묶고 있던 줄을 끊어버리고 이윽고 다리를 묶고 있던 줄도 끊어버렸다. 당태세는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노인의 몸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어둠 속에서 서 있을 수가 있었다. 당태세의 입에 음침한 미소가 새겨졌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해도침옹 양중일이 고쳐놓은 다리는 이제 별다른 도구 없이도 몸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가볍게 걸어 다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을 주거나 축을 삼아 발차기를 날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노릇이었다.
그나마 경공을 써서 시장 골목을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것은 무릎 안팎에 대놓았던 부목과 가죽끈의 덕택이었다.
당태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입맛을 다셨다.
“부목도 부서지고 목괴도 부서졌지 않은가. 전영포가 내 발을 묶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로군.”
당태세는 천천히 자신의 허리춤과 소매를 뒤져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소매 속의 단도도 보이지 않았고, 허리줌에 차고 있던 창촉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해도침옹에게 돈을 주고 산 영약들도 주머니째 사라져 버린 뒤였다.
“돈까지 빼앗아가다니 망할 자식. 나보다 부자인 놈이…….”
당태세는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는 천천히 뒤통수에 땋은 변발을 만져보았다. 돼지 꼬리처럼 땋아내린 머리 타래를 두 손으로 만지작대던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백사은침 네 자루가 내 무기의 전부구나.”
당태세는 세 가닥의 백사은침 중 하나를 더 잡아당겨 뽑은 뒤에 조심스레 손에 쥐었다.
당태세는 조금씩 앞으로 걸어 다니며 자신을 가둬 둔 방의 사방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다른 옥(獄)과는 달리 창살도 없고 볕이 드는 구멍도 없었다. 대체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 알 도리도 없었다.
“아니 배식구(配食口)도 하나 없다니. 그냥 굶어 죽으라는 소리인가?”
당태세가 투덜대며 벽을 만지는 순간, 갑자기 노인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바로 옆의 벽에서 쇠사슬 끄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자물쇠를 벗기고 있었다. 당태세는 양손에 백사은침을 하나씩 쥐고는 벽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암흑 속에 가느다랗게 세로로 하얀빛이 새어 들어오더니 이윽고 틈이 벌어지며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을 살피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재빨리 백사은침을 들고 고개를 내미는 건장한 사내의 목을 향해 침을 던지려 하였다. 그 순간, 당태세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춰서 버렸다. 대신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문을 열어준 사람을 마주 보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문을 열어준 이는 다름 아닌 류소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