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장사 영우상방(2)
“동소장(銅蕭墻) 전욱성, 숙부께 안부를 여쭙니다.”
“양매군(兩魅君) 전욱균, 숙부께 안부를 여쭙니다.”
병풍 뒤에서 나타난 두 사내는 당태세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고는 신중한 보폭으로 당태세와 거리를 벌리며 당태세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당태세는 재빠르게 눈을 돌려 두 사람의 무장을 살펴보았다. 동소장 전욱균의 손에 들린 동편은 영우문의 절기인 철편의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틀림없었다.
체구도 아비와 다를 것 없이 단단해 보이고 몸뚱어리가 천 년된 고목처럼 거창하고 두꺼운 것이 절륜한 용력을 자랑할 듯 싶었다. 별호가 동소장(銅蕭墻)인 것으로 보아하니 철편의 공세가 아닌 철편으로 방벽을 쌓는 것이 주특기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옆의 전욱균은 전욱성과 체형 자체가 달랐다. 아비를 닮아 뼈가 굵고 훤칠하여 당당한 체구를 지녔지만 둔중하다기보다는 날렵해 보였고, 등 뒤의 두 자루 단도는 평범한 단도에 비해 도신이 긴 것이 장검과 단검의 묘리를 다 쓸 법해 보였다.
별호인 양매군(兩魅君)으로 추측컨데 양손으로 쾌도(快刀)를 부리는 모양새였다. 철편이 뒤를 막고 쌍단도가 전위를 수행한다면 꽤나 골치 아픈 상대가 될 터였다.
“둘 다 범 같은 자제들이구먼. 자식 농사는 잘 지은 걸 인정하겠네.”
당태세의 말에 전영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형이 칭찬해주니 이거 몸둘 바를 모르겠구먼.”
전영포는 의자를 밀더니 탁자 아래에서 자신의 쌍부를 뽑아 들었다.
애초에 작정하고 자기를 불렀음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영우문의 쌍도끼를 다시 보게 되니 당태세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때는 등을 맞대고 밀려드는 적을 맞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동지였다.
“오랜만에 자네의 월천부박(月天斧搏)을 보게 되겠구나.”
“잊지 않으니 광영이오. 나도 이 나이를 먹고 귀린갈 당태세의 무공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당태세도 목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가 천천히 전씨(全氏) 부자의 삼각 진용 가운데로 들어서자 시비들과 하인들이 나와 주안상을 주섬주섬 치웠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에서 왠지 그 모양새가 우스워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접시 몇 개 깨지는 게 아쉬워서 술상부터 치우느냐?”
“나중에 감당 못 하게 부서지는 것을 치우느니 애초에 깔끔하게 처리하면 되는 것이오.”
“많이 바뀌었구나. 영우문주.”
“나이를 먹을수록 홀가분해질 줄 알았더니 웬걸. 어깨에 천근만근 무거운 짐만 더 얹히더이다.”
영우문주는 자신의 두 손에 쥐어진 도끼를 가볍게 붕붕 휘둘러보았다. 거대한 곰 같은 사내의 신위에 무(武)가 얹히니 시나브로 범인은 범접하지 못할 위엄과 박력이 드넓은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쉽게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의 긴장감이 밀려왔다. 실로 흑천상제라 불리는 호걸의 위용이었다. 당태세가 주변을 살피며 오른발을 뒤로 빼고 목괴를 앞으로 내민 채 사방의 기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절름발이라기에 거짓인 줄 알았더니 사실이로군. 전당괴(轉堂拐)를 목발로 짚고 보행을 보조하며 유사시엔 병기로 사용하는가. 오른 다리는 불구가 되었고?”
전영포의 말에 당태세가 이를 드러내었다.
“오른 다리 하나 없다고 네놈 삼부자를 못 이길성 싶으냐.”
당태세의 말에 전영포가 검은 수염 사이로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닐 것이오. 순천문주. 이렇게 된 거, 하늘을 원망하시게.”
“말이 길다. 셋 다 덤비거라.”
“예나 지금이나 시원시원한 건 안 변하는군!”
껄껄대는 전영포의 웃음소리와 함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아들이 동시에 옆으로 움직였다. 당태세 역시 움직이는 두 아들을 보며 방위를 바뀌었다.
선공(先攻)은 양매도 전욱균의 몫이었다. 부드럽게 양어깨에서 빼낸 단도가 목과 허리께를 점하고 빠르게 쏟아져 나와 당태세 앞에서 방위를 바꿔 허리와 목을 노리며 그대로 찔러 들어왔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좋은 자격(刺擊)이었다. 당태세 역시 가볍게 목괴를 들어 순차적으로 들어오는 단도를 한 줄기 흐름으로 이어지듯 막아내고 바로 괴를 돌려 전욱균의 목을 노렸다.
그 순간, 뒤에서 한 줄기 강맹한 공격이 들어와 당태세의 목괴를 쳐내고 전욱균의 앞을 지켰다. 다름 아닌 동소장 전욱성의 동편이었다.
순식간에 사람이 바뀌자 아까와 다른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강맹한 공격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동편의 육중한 무게가 내력을 싣고 목괴를 부서지라 두들기며 당태세의 허점을 찾기 시작했다. 당태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과격 일변도의 근본 없는 도끼질 같은 손질 사이로 느껴지는 공력에 당태세는 쉽사리 목괴를 빼어 전욱성의 몸을 찍어낼 수가 없었다. 저 방망이질을 뿌리치는 순간 분명 전욱성은 방위를 바꿔 당태세의 몸을 사각에서 공격할 것이었다.
둔기와의 싸움에서 중심을 잃으면 그것으로 검결은 끝이었다. 당태세는 노도처럼 밀려드는 전욱성의 공격을 뒤로 몸을 빼며 막으면서 교묘하게 발을 바꿔 전욱성의 공격이 조금씩 빗맞으며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전욱성이 순간 당태세의 전략을 눈치채고 발을 바꾸자, 당태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싹 전욱성의 앞으로 들러붙더니 그대로 전욱성의 몸을 타고 뒤로 움직이며 전욱성의 머리를 목괴의 손잡이로 소리 없이 찍어버렸다. 허를 찔린 전욱성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였다. 탕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당태세의 목괴과 몸이 같이 뒤로 퉁겨 나왔다.
자신이 노리고 있던 전욱성의 머리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고 오히려 당태세의 몸이 일장 넘게 뒤로 밀려나 버린 상태였다. 전욱성과 당태세 사이에 둔중한 손도끼 하나가 들어와 당태세의 목괴를 뒤로 날려버린 것이었다.
당태세가 이를 드러내고는 전영포를 노려보았다.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쉽게 되었군. 영우문주.”
“이거 참 민망하오. 아직 이 두 놈의 공부가 당형을 충분히 당해내지 못함인가.”
“다 장성한 자식들을 감싸고 도는 것은 아비의 할 일이 아닐세.”
당태세의 이죽거림에 전영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광을 당태세에게 쏘아붙였다. 수염 사이에서 으르렁대는 거한의 소리가 음산하게 연무장의 바닥에 깔렸다.
“과연 발 하나가 없다고 전갈이 침을 못 쏘는 건 아니로군.”
전영포는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슬쩍 뒤로 빠지면서 두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목괴의 사정거리 밖에서 요격하겠다는 심산은 버려라. 사로(死路)를 택하여야 활로(活路)를 찾을 것이다. 귀린갈이 아무리 고수라도 분명 약점은 존재하는바, 너희 둘의 협격으로 그곳을 찾아내어라.”
“존명!”
“존명!”
동소장과 양매도가 동시에 대답을 하며 양쪽으로 거리를 벌렸다.
당태세는 다시 목괴를 거머쥐고 두 사내의 움직임을 파악하였다. 양매도 전욱균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당태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쌍도를 휘둘렀다. 실로 나무랄 데 없는 신법이었다.
사내의 시원한 움직임 사이로 예리한 단도 두 개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하지만 이번의 공격은 전과는 달리 낮게 깔리며 당태세의 하복부와 다리를 향해 날아왔다.
“제법이군!”
당태세가 목괴로 땅을 쓸듯이 들어오는 단도를 막아내며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낸 뒤 다시 앞으로 나가며 양매도의 목과 허리를 노렸다. 그를 본 동소장의 동편이 당태세의 공격을 막아내는 순간, 당태세의 몸이 오른발을 축으로 반대로 회전하였다.
오른발의 통증이 찌릿하니 밀려왔다. 하지만 그와 함께 당태세의 몸은 순식간에 양매도가 아닌 동소장의 뒤로 넘어간 상태였다. 전영포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양매도! 형을 도와라! 그건 속임수다!”
하지만 전영포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당태세의 목괴가 동소장 전욱성의 몸을 난타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동편 한번 휘두르지 못한 전욱성이 속절없이 뒤로 밀리며 몸의 요혈을 방어하는데, 전욱균이 쌍도를 휘두르며 옆에서 당태세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아마 삼합 내에 칠공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말았을 터였다.
당태세는 옆에서 밀려든 질풍 같은 전욱균의 쌍도를 빗겨 막으며 목괴를 돌려 들어오는 쌍도의 궤적을 틀어버리고 번개처럼 목괴의 겨드랑이 지지대를 낫처럼 휘둘러 전욱균의 오금을 걸어 채 버렸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비틀대며 쓰러지는 전욱균을 보던 당태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이젠 안 되겠구먼!”
순간, 대갈일성과 함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시커먼 돌덩이가 시야를 가리고 뛰어들었다.
다름 아닌 흑천상제 전영포였다.
사내는 두 손에 들린 쌍도끼를 보이지도 않게 휘두르며 당태세의 요혈을 찢어발길 기세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압력이 앞에서 밀려왔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목괴를 들었다.
실로 만부부당의 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예전에도 영우문주 전영포와의 대련은 검결이나 다름없이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하물며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계제가 아니었다.
당태세의 눈이 매서워지며 목괴를 창처럼 들고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전영포의 목과 가슴을 향해 내뻗었다. 범인의 시각으로는 쫓아갈 수도 없는 찌르기였다.
하지만 전영포의 쌍부는 들어오는 목괴의 끝을 하나하나 도끼날로 쳐내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함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창법은 당형의 장기가 아닐 텐데.”
빌어먹을 놈.
전영포의 이죽거림을 듣던 당태세는 이를 악물었다.
실로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검결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와의 대결이라는 말이 있듯, 전영포는 당태세의 공부를 가장 소상하게 알고 있는 위인이었다.
실제로 당태세가 지금까지 강호에 재출도하면서 수많은 적들을 때려눕힌 목괴의 곤술과 창술은 당태세의 모든 것을 이끌어 내지는 못하는 수법이었다.
당태세의 눈빛을 바라보던 전영포의 입이 굳게 닫히는 순간, 거한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쌍부가 동시에 허공에서 땅으로 육안(肉眼)에 잡히지도 않는 속도로 떨어졌다. 당태세가 이를 악물고 들어오는 쌍격을 빗겨 막았다.
그 순간,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당태세의 목괴가 두 조각으로 박살이 나 버렸다.
“젠장맞을!”
당태세가 화급히 목괴를 버리고 소매 안의 단도를 꺼내는 순간, 전영포의 몸이 웅크리는 범처럼 낮게 자세를 낮추고는 왼손의 도끼를 안에서 밖으로 휘둘렀다.
당태세는 화급히 몸을 빼었지만 오른발을 차마 끝까지 빼내지는 못하였다.
전영포의 도끼는 당태세의 발목과 무릎을 감싸주고 있던 부목과 부목을 동여맨 가죽끈을 소리 없이 조각내어 버렸고, 순간 다리가 다시 뒤틀려버린 당태세는 비틀거리며 그대로 옆으로 볼썽사납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몸을 일으킨 전영포가 도끼를 휘두르며 뒤로 물러나더니 뒤에 서 있던 두 아들을 돌아보았다.
“미욱한 놈들, 내가 발톱과 이를 다 뽑아 놓았으니 지금부터 다시 해 보도록 해라.”
그제야 당태세는 왜 전영포가 자신에게 살초를 쓰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제 보니 네 놈은 새끼들에게 사냥연습을 시키는 고양이구나. 내가 쥐로 보이느냐?”
“보통 쥐가 아니라 천년 묵은 쥐 요괴지.”
전영포가 껄껄 웃으며 비틀대는 당태세를 보고 비웃었다.
“쓸모없는 목숨 이렇게나마 후학(後學)들을 위해 쓴다고 자위하시오. 다른 건 몰라도 당신과 검결을 하여 이기게 되면 이놈들의 견식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니까.”
“더러운 짓거리를!”
당태세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전욱균을 맞받았다. 전욱균의 쌍도가 번갈아 당태세의 가슴과 어깨의 요혈을 찌르려 들어오는 것을 당태세의 두 손이 갈퀴가 되어 허공에서 젖히며 자신의 팔꿈치를 빗장처럼 젖혀 상대의 팔을 봉쇄하였다.
새하얗게 질린 전욱균의 얼굴을 바라보는 당태세의 눈동자는 방금 지옥에서 튀어올라온 악귀나 다름없었다.
“어린 것들이 어디서 사람을 능멸하려 드느냐!”
순간, 당태세의 왼발을 동편이 노리고 덤벼들었다. 당태세가 발을 들어 들어오는 동편을 막으며 전욱성의 어깨에 쌍장을 날리려는 순간, 전욱균이 몸을 휘감고 소퇴를 당태세의 오른발에 날렸다.
“이런 망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당태세가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전욱성의 동편이 그대로 다른 발을 걸며 허공에서 한 바퀴를 뒤집었다. 순간 당태세는 그대로 중심을 잃은 채 등부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번쩍이고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보였다. 당태세는 기혈이 뒤집힌 채 몸을 눕히고 헛구역질을 해 대었다.
“되었다. 그만 멈추어라.”
“아버지… 아니, 방주님! 이 자는 위험합니다. 지금 목숨을 끊어 놓아야…….”
전욱성이 전영포를 보며 동편으로 당태세의 등을 찍어 눌렀다. 전욱균이 발을 들어 당태세의 얼굴을 짓눌렀다. 노인의 눈이 캄캄해지며 숨이 답답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다시 전영포의 진중한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자는 북경의 천호가 데려갈 것이다. 그자에게 당태세를 넘겨주는 대가로 뭔가를 얻어내야 할 것 아니냐!”
“하지만….”
“보국장군 서림각라부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가문이다. 어찌 이런 호기를 놓치느냐?”
빌어먹을 곰 같은 놈, 거죽만 곰이고 속은 의뭉스러운 여우가 다 되었구나. 당태세는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쓴웃음을 지으며 전영포의 얼굴을 바라보려 애썼다.
하지만 당태세의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이내 노인의 눈앞으로 커다란 검은 점이 확 밀려오는 듯하더니 이내 시커먼 침묵이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말았다. 노인은 다시 기나긴 어둠 속으로 파묻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