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장사 영우상방(1)
아룡은 서쪽 포구에서 한잔 술을 걸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성시에 인접한 기루를 찾아 내려오는 중이었다. 아무리 풍광이 장엄하고 멋진들 기루의 아리따운 가기들이 따라주는 술 한잔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좋은 걸 마다하는 것이 어찌 장부의 삶이냐고 혼자 자평하면서 터덜터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움직이는 아룡을 보던 사람들이 모두 슬슬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무리 봐도 대낮부터 흔들대며 돌아다니는 덩치 좋은 장한 근처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아룡은 사람들이 자신을 경원시한다는 생각이 들어 급격하게 마음이 상해 있었다.
“대체 이놈의 동리는 어찌 된 것이 사람을 보면 슬슬 피해 다니기만 하는 건가…젠장.”
어느 순간 자신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알아챈 아룡은 숙부의 안 좋은 버릇을 자기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참, 근묵자흑이라더니…안 좋은 버릇은 서로 닮아가는 것인가….”
혼자 히죽대며 사방을 돌아보던 아룡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커지면서 골목의 한켠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북으로 몰려가고 있는데 사내들은 하나같이 옆구리에 작은 단봉을 차고 있는 의심스런 복색이었다.
하지만 아룡이 놀란 것은 그들의 옷차림새 때문이 아니었다. 흑의인의 한가운데 목발을 짚은 채 절뚝거리며 가고 있는 노인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 모습은 숙부의 모습이었다.
아룡은 손을 들고 숙부에게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밝힐까 싶었지만 숙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흑의인들을 보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그들을 빤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숙부님 아닌가? 숙부님이 왜 저기 있는가?”
아룡은 미간을 찌푸리고 흑의인들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내의 입이 다시 열리며 진지한 어조의 독백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숙부께선 아래로 여행을 갈수록 처소에서 머무는 시간이 줄어드시는군.”
아룡은 입맛을 다시더니 눈을 다시 가늘게 뜨고 골목을 쳐다보았다.
“내가 뭔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흑의인들이 사라진 골목을 바라보던 아룡은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고개를 갸웃대다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알게 뭐람!”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고는 다시 주루를 찾아 몸을 돌렸다.
이 넓은 장사 천지에 목발을 짚은 노인이 하나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모든 걱정과 의문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내가 사람 잘못 본 것이지. 숙부라면 별 탈 없이 돌아오실 것이고!”
아룡은 다시 한번 어깨를 흔들며 날갯짓을 하더니만 다시 남쪽을 향해 비틀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진중한 의문들은 어느새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당태세는 흑칠이 되어있는 위압적인 검은 대문 앞에 서서 영우상방이라는 거친 글자의 편액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
사방이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높은 담의 저택 안은 생각보다 넓고 단출하였다.
드넓은 안마당은 연무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 연무장 바닥은 빈틈없이 포석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연무장의 북쪽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갖은 요리와 술이 그득하게 깔려 있는 주안상이었다. 그리고 그 주안상의 뒤에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곰 같은 형태의 노인 하나가 들어오는 당태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다름 아닌 영우문주 흑천상제 전영포였다.
“어서 오시오. 당형.”
곰 같은 사내의 굵직한 목소리가 안마당의 포석을 타고 진동이 되어 당태세에게 전해졌다.
당태세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안부를 물은 사내는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두 손을 모아 눈썹 위까지 올려보았다. 예전부터 익숙한 영우문주의 인사였다. 당태세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하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영우문주.”
“혹시나 했더니만 진짜 당형이었구먼. 이리 오십시오. 오랜만에 아우가 올리는 술이나 한잔 받으시구려.”
당태세는 목괴를 의자 옆에 괴어두고 상 앞에 걸터앉았다.
영우문주 전영포의 솥뚜껑 같은 손이 작은 술병을 쥐고 와 당태세의 상에 있는 술잔을 가득 채웠다. 물끄러미 당태세가 술잔을 보고 있자 전영포는 털북숭이 얼굴에 웃음을 띠더니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가득 채웠다.
“독 같은 건 타지 않소. 저를 알면서 그러십니까.”
“자넨 음식에 장난치는 소인배는 아니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어 올리고는 단숨에 한 잔을 들이켰다. 장사의 백주(白酒)는 독하게 목을 넘어가면서도 아찔할 정도로 깊은 향취가 있었다. 당태세의 모습을 보던 전영포는 다시 히죽 웃으며 술잔을 들어 보였다.
“이곳 장사에서도 알아주는 명주요. 이런 날을 대비해서 지금까지 안 마시고 두고 있던 거라오.”
“내가 올 줄 알았다니 그건 고맙구먼.”
당태세의 차가운 눈빛이 곰 같은 사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삽시간에 사방이 얼어붙을 것 같은 눈빛을 받으면서도 전영포는 별다른 내색 없이 당태세의 말을 받았다.
“딱히 당형이 올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하지만 당형이 귀한 손님인 것은 맞지 않소?”
영우상방의 방주, 전 영우문주는 매끄럽게 당태세의 말을 받아넘겼다. 예전 젊은 시절의 과격함 대신 물의 흐름을 탈 줄 아는 노회함을 늙은 곰은 지니고 있었다.
사내의 덩치는 예전 그대로였고 갈무리 되어있는 내공 역시 정순하면 정순해졌지 결코 탁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쉽지 않구나. 당태세는 자신의 앞에 앉은 사내를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전영포는 예전에도 고수였다. 지금도 당연히 고수일 것이고 더 여유로워 보였다. 급하게 마음을 먹으면 죽는 것은 당태세가 될 것이었다. 당태세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정체를 어찌 알았는가?”
전영포는 다시 당태세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워주고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실은 몰랐소이다. 아니, 알 재간이 없었다고 해야지. 형이 한 보름 전에만 이 장사에 들어와서 우리 방도들을 쓸어버렸다면 나는 손발 다 잘린 채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거요.”
“누가 내 이야기를 하던가?”
전영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북경의 보국장군부에서 사람이 하나 왔소. 고수의 풍모가 보이는 무인이었지. 그가 한밤중에 나에게 찾아와서 충룡문과 구봉문, 견정문의 문주들이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더구먼.”
당태세는 그 말을 듣고는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자로구나. 골목에서 나와 붙었던 사내.
“그때는 무슨 흰소리인가 싶어 넘어갔지. 그런데 엊그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나에게 인편이 하나 왔소이다. 그 친구가 보내온 거였지. 나를 노리고 있는 자는 순천문주 당태세라고 하더군. 그가 찾고 있던 절름발이 노인의 이름이 당태세라고 써 있었는데…… 허 참, 나는 그때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다 떨어뜨렸지 뭔가.”
전영포는 껄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화통한 것인지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어 보여도 자신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아까 단도에 맞아 다 죽게 된 우리 방도 하나가 기어들어 오면서 말을 하더구려. 지금 대봉상회 회주를 당태세가 습격한다고. 허, 그 북경의 고수가 한 말이 사실이었어. 뒤숭숭한 꿈이 현실에 튀어나온다니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니.”
“왜, 나를 보니 귀신을 보는 것 같으냐?”
“사실 말이 났으니 그렇지. 그렇게 형을 보냈는데 다시 앞에 튀어나오면 누가 좋아한단 말이오?”
아예 십칠 년 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같잖은 변명을 늘어놓지 않겠다는 투였다. 사내답다면 사내다운 태도였다. 당태세도 전영포의 말을 듣더니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꽤 괜찮은 도법의 사내였다. 강호에서 만났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였지.”
“당형도 나이를 드신 게로군. 그런 고수의 숨통을 붙여준 건 아쉬움 때문이요?”
“호부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걸음을 재촉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결국 둘 다 내가 얻은 것은 없었다만.”
“아, 호부인. 호부인 일은 정말 안 되었지. 나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는데.”
“매화문의 혈흔은 영우문의 것이 맞구나.”
전영포도 술잔을 입에 털어 넣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야 내 공부를 오래전부터 봐 왔으니까 단번에 알아본 것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오.”
“그렇게 나라와 보국구대문파맹의 맹세를 배신하여 잔명을 보전해 놓고, 기껏 먼 장사까지 와서 한다는 일이 사람 목숨 청부나 하고 있단 말이냐?”
당태세의 말을 들은 전영포는 쓰읍, 잇새로 숨을 들이켜며 다시 술을 술잔에 따랐다. 곰 같은 거구의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드러냈다.
“나도 이런 식으로 일이 풀릴 줄은 몰랐지.”
“호부인에게 네 과거 행적을 들었다. 이일 저일 하다가 결국 칼밥 먹는 일로 눌러앉았다고.”
“망할 놈의 할망구. 쓸데없이 입을 놀리긴…….”
전영포는 술잔을 입에 가져가다가 다시 탁 소리를 내며 술상 위에 술잔을 내려보았다. 사내의 눈이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스멀스멀 뿜어나오며 사방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형, 충신 굴원이 어디서 죽었는지 아시오? 멱라수가 바로 상강의 웃자락이요. 이 고장 사람이라 이거요.”
“굴원을 모르는 자가 있겠느냐.”
“그래, 그 충신 굴원도 결국 왕이 자신의 말을 계속 무시하자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은 것 아니오. 그런 충신도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못하는 게 세상사고 천명인 거요. 우리가 그때 명(明)을 위해 성벽 위에서 죽었다고 뭐가 달라졌을 것 같소? 이자성이 성문을 허무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그 이자성을 팔기군이 박살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고! 우리는 살았어야 했단 말이오!”
“죽은 것은 나뿐이고 말이냐.”
“아니,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 젠장!”
전영포는 술잔이 아니라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 왼손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여차하면 목괴와 오른 소매 안의 단도 둘 중의 하나를 써야 할지도 몰랐다. 슬슬 전영포의 예전 격한 성격이 드러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당태세의 오판이었다.
술병의 술을 깨끗이 비우고 난 전영포는 오히려 침잠한 눈빛이 되어 물끄러미 검은 성벽을 바라보더니만 낮은 목소리로 중얼대듯 말하기 시작했다.
“당형, 난 솔직히 당형을 북경의 만주족 놈들에게 넘길 생각이 없소이다. 지나간 과거는 과거지사요. 내가 했던 일도 과거의 일이고 지금 일어나는 일은 현재의 업보지. 그러니 이쯤에서 나를 용서하시오. 나도 형이 대봉상회 회주를 죽인 것은 잊을 테니 말이오.”
“잊으라고?”
“잊으십시오. 영우문의 문주가 아닌 동생 전영포의 부탁이외다.”
무서운 놈이 되었구나.
당태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노회한 맹수라니. 이보다 더 안 좋은 경우가 있는가. 전영포의 시선이 물끄러미 당태세를 향하였다. 당태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바라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당태세는 술상 위의 술잔을 들어 조용히 뒤집었다. 당태세와 전영포의 눈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언제부터 영우문이 하오배들의 법도를 따랐느냐?”
당태세의 말에 전영포의 눈썹이 가운데로 몰리더니 주름이 깊이 새겨졌다.
“때에 맞춰 사는 게 사람의 인생이야. 당형. 나는 지금 굉장히 힘든 결정을 하는 중이란 말이오. 대봉상회가 날아간 게 뭘 뜻하는지 당형은 모를 거요.”
“알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마음이 변한 적도 없고.”
“……형은 예나 지금이나 대쪽이구먼. 그래서 내가 좋아했지만.”
전영포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전영포는 입맛을 다시더니 할 수 없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영포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우레와 같은 소리로 명을 내였다.
“욱성, 욱균! 너희들은 나와서 숙부께 인사를 드려라!
전영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술상 뒤에 세워 두었던 병풍의 뒤에서 두 명의 장한이 양편으로 걸어 나왔다.
한 사내는 거대한 철편을, 또 한 사내는 양어깨 뒤에 칼을 꽂고 있었다. 두 사내 모두 체구가 장대하고 부리부리한 눈과 밤송이 같은 수염을 지녔는데 한눈에 봐도 누구의 씨인지를 알아볼 지경이었다.
당태세가 그들을 바라보더니만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너희들이 그 유명한 쌍도자(雙刀子)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