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호광 장사(15)
아직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전, 사람들은 땅이 열기로 더 덥혀지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지붕 아래로 들어가려는 듯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미곡시(米穀市)의 상인들 역시 사람들과 거간을 마무리하고 움직이는 이들로 들썩였다. 일꾼들은 창고를 정리하고 그들을 감독하는 이들도 연신 땀을 닦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뒤에는 미곡들을 사고 거둬들이며 다시 가격을 매기는 상인들의 우두머리들이 삼삼오오 패거리를 이뤄 텅 빈 창고들을 보는 중이었다.
“오늘내일 중으로 사천에서부터 보리가 당도한다네.”
“조만간 이곳에 가득 차겠지.”
“가격은 오늘 정해지는 건가?”
“호부인이 없으니 오늘 정해지지 않겠나.”
모여있던 상방의 방주들은 호부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입을 다물고 땅을 바라보았다. 개중 젊은 상인 하나가 잇새로 한숨을 내뿜더니 못 참겠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내던졌다.
“젠장, 아무리 장사꾼이 부모도 팔아먹는다지만 한두 해도 아니고.”
“조형, 말소리가 너무 크네. 조용히 하시게.”
“보리가격을 올리면 결국 구휼미를 풀 것인데, 관곡(官穀)을 들일 때도 이문을 붙이는 게 우리 아니오? 애초에 보리가격을 낮춰서 내놓으면…….”
“그럼 서방주 자네가 가격을 내리자고 대봉상회에 말하시게. 우리는 안 말릴 테니.”
서방주라는 사내는 나이 지긋한 상인의 말에 대답은 하지 못하고 인상을 쓸 뿐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시 낮게 울려 퍼졌다.
“어차피 우리야 이문이 남으니 좋은 일 아닌가. 쓸데없이 장사에 도리를 따지지 말게. 호부인 꼴 나기 싫으면.”
서방주라는 사내는 말없이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런 동료를 보던 늙은 상인들은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대붕상회 회주는 언제 오시는가?”
“아침을 먹고 온다니까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지. 빨리 가격이나 정하고 파장했으면 좋겠네.”
“방해꾼이 없으니 오늘은 쉽사리 끝나겠지.”
상인들은 어둑어둑한 골목의 끝을 바라보며 제멋대로 떠드는 중이었다. 서방주라는 사내만이 혼자 혀를 차며 다른 상인들과 거리를 벌려두는 중이었다.
***
“가자.”
청록비단으로 된 장포를 두른 탄탄한 체구의 노인이 호종하는 하인들을 대동하며 문을 나섰다. 뒤를 따르던 늙은 노복이 고개를 숙이며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사가 흉흉한데 가마를 타고 가심이 어떠십니까? 회주?”
“장사꾼이 가마를 타고 가다니, 사람들에게 눈총받을 일이 있는가.”
청록장포의 노인은 과묵하였다. 노인이 앞장서 대로에 나서자 집 앞에 모여있던 열 명 남짓한 흑의인이 그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그들을 바라보더니 슬쩍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멀리 떨어져서 걸어오너라.”
노인의 말과 함께 그를 따르는 하인들이 노인을 둘러싸고 앞으로 향했다.
노인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던 흑의인들은 노인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지자 노인에게 보이지 않는 끈이 묶인 것처럼 그를 향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봉상회의 정문에서 시장까지는 대로를 타고 한 바퀴를 돌면 바로 시장의 초입까지 들어갈 수 있었지만 노인은 골목을 타고 들어가는 지름길을 선호했고, 그 일과는 날씨와 시간에 관계없이 꾸준히 지켜졌다.
노인이 햇살을 피해 높은 벽과 벽이 이어져 성을 만들어 놓은 작은 골목길로 접어들자 뒤에서 따라오던 흑의인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골목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이는 곳을 돌자 노인의 모습이 흑의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두 번째 골목을 일직선으로 걸어가다 다시 왼쪽으로 꺾이는 골목으로 노인이 먼저 몸을 틀었다. 흑의인들 역시 노인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 선두가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며 노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후위에 있는 흑의인들은 자신의 뒤에 누군가 따라붙는 것이 아닌가를 살피며 그들의 진용을 따라왔다. 이제 시장과의 거리는 반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장사의 좁은 골목 안은 대낮에도 어둡기 그지없었고, 시간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조용하였다.
대봉상회의 회주와 하인들이 다음 골목을 향해 몸을 돌리자 그들의 뒤를 쫓던 흑의인들도 간격을 벌리고 그의 뒤를 쫓았다. 노인이 다음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어지자 흑의인들은 보폭을 늦춰 거리를 조절하고는 때가 되었다 생각했을 즈음 왼쪽으로 꺾인 골목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바람소리와 함께 그림자 하나가 날아왔다.
선두에 서 있던 흑의인의 울대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옆에 있던 사내가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올리는 순간 동료를 덮쳤던 그림자가 바로 날아와 사내의 관자놀이를 그대로 쳐올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양쪽 벽을 붙잡더니 그대로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바로 뒤를 따르던 흑의인들이 눈이 둥그레지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괴한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괴한의 몸이 그들의 시선보다 먼저 한 발 앞으로 움직였고 채 허리에 찬 쇠봉을 꺼낼 사이도 없이 두 명의 흑의인은 명치와 목에 한 발씩의 타격을 받고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순간 뒤에 남아있던 여섯 명의 흑의인 사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아직 왼쪽 골목에 접어들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진을 펼쳐라!”
맨 앞에 있던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단봉을 뽑아 들고 앞에서 다가오는 괴한을 맞이하였다. 괴한은 가운데 손잡이가 달려 있고 끝이 막혀 있는 정(丁)자 모양의 나무막대를 들고 있었다.
괴한의 몸이 먼저 움직이며 여섯 명의 방진 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그와 함께 여섯 개의 단봉이 같이 움직이며 자신들의 가운데로 들어온 괴한을 향해 단봉을 날렸다.
하지만 가운데로 들어간 괴한은 기묘하게 몸을 틀어 들어오는 단봉들을 피하며 자신의 앞으로 떨어지는 맨 후위의 단봉을 나무막대로 막더니 나무막대를 거꾸로 들어 끝으로 흑의인의 명치를 세차게 찍어눌렀다.
숨이 빠져나가는 기묘한 비명과 함께 뒤에 서 있던 흑의인이 무릎을 꿇었다.
“하나.”
괴한의 입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메마르고 거칠었다.
그의 뒤통수로 흑의인의 단봉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하지만 괴한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막대를 뒤로 뻗어 단봉을 막고는 몸을 돌리더니 우권으로 흑의인의 명치를 강타했다.
그와 함께 괴한은 옆에서 들어오는 두 자루의 단봉을 가볍게 몸을 돌리며 피하고 막대로 돌려 막으면서 방향을 바꾸더니 중심이 흩어진 오른쪽 흑의인의 뒷목으로 막대를 참수(斬首)하는 칼처럼 내리그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을 얻어맞은 흑의인이 땅바닥에 쓰러지는데, 조금 전 명치를 얻어맞은 흑의인 역시 그대로 고개를 앞으로 처박으며 골목에 쓰러졌다.
“둘과 셋.”
대봉상회를 호위하던 열 명의 영우문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을 습격한 괴한의 용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깨끗하게 밀어버린 머리 뒤로 새하얗게 땋아져 있는 금전서미에 회색 콧수염을 늘어뜨리고 눈썹마저 하얗게 센 날카로운 눈의 노인이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인상에 단단해 보이는 체구는 가히 젊은 시절의 무용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목발 같은 것을 짚고 있는 지금도 어지간한 장정은 한 주먹에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흑의인들은 눈이 동그래져서 그를 바라보더니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다, 당신은…….”
“도망가게 놔두진 않는다.”
순간 당태세의 몸이 앞으로 움직이면서 세 명의 흑을 향해 날개를 펼치듯 목괴를 옆으로 뻗었다가 그대로 앞으로 휘둘렀다.
당태세의 목괴를 단봉으로 막아낸 흑의인이 비틀대며 뒤로 물러서자 앞에 있던 흑의인은 품에서 단도를 빼들고는 당태세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순간 당태세의 우수가 갈고리처럼 올라와 단도를 잡은 흑의인의 우수를 낚아채고는 그대로 뒤로 돌려 단도를 흑의인의 명치에 박아버리고는 뻗었던 목괴를 돌려 옆에 있는 흑의인의 단봉을 얽어버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흑의인의 손목을 순식간에 비틀어버린 당태세는 사내의 단봉을 빼앗아 그대로 흑의인의 태양혈과 백회혈을 가격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다시 땅에 쓰러지자 당태세의 입이 열렸다.
“넷과 다섯.”
순간, 한 발짝 뒤에 있던 흑의인이 단봉을 내던지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골목 반대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당태세의 눈이 번득이더니 쓰러진 흑의인의 가슴에서 단도를 뽑아 들자마자 등을 보이고 달려가는 흑의인의 등을 향해 단도를 내던졌다.
단도는 빨려 들어가듯 흑의인의 등에 그대로 적중하였는데 흑의인은 구성진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대로 꺾인 골목 사이로 몸을 밀어 넣어버렸다. 당태세의 인상이 구겨졌다.
“빌어먹을, 이젠 투검(投劍)도 감이 떨어졌나!”
당태세는 눈을 부라리며 흑의인이 달아난 골목과 대봉상회 회주가 사라진 골목을 번갈아 쳐다보더니만 이를 부드득 갈더니 회주가 사라진 골목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 번 정한 목표를 바꿀 수는 없었다.
당태세는 목괴를 손에 꼬나쥐고는 재빨리 두 발을 박차며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엉뚱하게도 사내의 몸은 골목이 아닌 환한 빛이 기다리는 대로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간, 대봉상회의 회주는 골목을 벗어나 미곡시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를 알아본 수많은 상인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시장의 중앙으로 길을 터주었다.
대봉상회 회주는 엄숙한 얼굴로 그들에게 목례하며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가슴을 편 채 마치 공후(公侯)의 작위라도 받은 듯한 모습으로 상인들의 사이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대가, 오늘은 수매가를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채신없이 질문이 쏟아졌지만 대봉상회의 회주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을 주었다.
“궂은 날씨가 끝나고 해가 났으니 당연히 오늘 답이 있지 않겠는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가 자네들 덕분이네.”
모여있는 상인들이 손을 잡고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예를 표하니, 일개 상회 회주의 위엄이 가히 군왕의 권세 부럽지 않았다. 상인들이 모두 지나가는 그를 우러러보는 동안 대봉의 회주는 천천히 상인들을 응시하며 시장의 중앙으로 발을 옮겼다.
그때였다. 행렬 가운데 있던 한 절름발이 노인이 비틀대며 앞으로 쏟아지듯 미끄러졌다.
꽤나 발이 미끄러웠는지 노인은 하인과 어깨를 부딪히고 빙글 맴을 돌면서 회주의 가슴 옷자락을 잡았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비명을 질렀다. 회주는 그를 걱정스럽다는 듯 슬쩍 내려다보았다.
“노인장, 괜찮으시오?”
“아, 괜찮습니다. 이런 실례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닐세.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보아하니 다리도 불편한데….”
순간, 대봉상회의 회주는 말을 멈추고 크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크게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다시 그를 보며 고개를 숙이자 대봉상회의 회주는 한번 더 크게 기침을 하며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그 뒤로 계속 큰기침이 번갈아 터져 나오자 회주는 인상을 쓰며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지만 계속 터져나오는 기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하인이 주인을 쳐다보며 근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회주님, 물을 가져올까요?”
순간 대봉상회의 회주는 연이어 기침을 하더니만 비틀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칠 듯이 큰기침을 하던 회주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상인들 옆의 절름발이 노인이 좌중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어서 의원을 불러오시오! 회주께서 몸이 안 좋으시오!”
순식간에 시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대봉상회의 회주는 그대로 쓰러져 보릿단 옆으로 몸을 눕히는데 입을 크게 벌리면서도 눈을 껌벅이는 것이 숨 쉬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운 모양이었다. 절름발이 노인이 하인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지압을 할 터이니 어서 사람들을 모셔와라! 상회의 사람들을 불러와!”
하인들이 득달같이 시장을 빠져나가고 남아있는 상인들이 모두 모여들어 대봉상회 회주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컥컥대며 숨을 못 쉬는 대봉상회의 회주는 자신을 진맥하는 절름발이 노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절름발이 노인이 슬쩍 눈을 찌푸리며 대봉상회 회주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노인의 속삭임이 컥컥대는 대봉상회 회주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백사은침이 선기혈(璇璣穴)에 거꾸로 박혔구나. 날숨은 나오지만 들숨이 들어오지 않으니 어찌하랴. 네 천명은 이것으로 끝이니라.”
순간 얼굴이 파랗게 변한 회주의 눈동자가 당태세를 향해 움직였다. 당태세는 그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호부인을 저승가서 만나거든 당태세가 보냈다 말하거라.”
노인은 회주의 손을 가만히 풀고는 천천히 일어나며 고개를 흔들었다. 노인이 목발을 짚고 천천히 회주에게서 멀어지자 그를 돕겠다면서 다른 상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직 젊은 서방주 만이 팔짱을 끼고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상인들의 무리를 찡그린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당태세는 장사꾼들의 혼잡스러움을 덤덤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누구 하나 지나가는 절름발이 노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일단의 흑의인 몇 명이 시장으로 접어들더니 당태세를 발견하고는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당태세는 슬쩍 그들을 바라보더니 인상을 굳히며 좁은 골목을 향해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때, 당태세의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당노사!”
당태세의 발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버렸다. 그의 성을 부른 흑의인은 그를 향해 성큼성큼 뛰어오더니 손을 휘저으며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멍하니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당태세를 향해 흑의인이 입을 열었다.
“당노사. 영우상방에서 왔습니다.”
“알고 있다. 왜 부르느냐.”
“방주님이 노사를 모셔오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뭐?”
당태세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