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호광 장사(14)
하늘은 구름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청명하였다. 그와 함께 찌는 듯한 더위도 같이 되돌아와 있었다. 장사는 다시 우울하던 날씨에서 벗어나 활기차고 복잡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무두리, 아룡은 일찌감치 일어나 근사한 옷을 갖춰 입고 산야와 호수를 보러 나간 뒤였고, 당태세 역시 젖은 옷을 말리고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천천히 목괴를 짚고 객잔 밖으로 나섰다.
오랫동안 묵고 있는 늙은 손님의 외출을 본 객잔주인이 깍듯이 인사를 올리자 당태세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부지런히 문을 나섰다. 잔잔히 주인에게 미소를 흘리며 길을 나선 당태세는 이내 입을 굳게 다물고 매섭게 앞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늙은 호부인의 집이었다.
“신중하고 신중하게.”
당태세는 혼잣말을 내뱉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호부인의 집으로 향하였다. 한때는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대가 앞의 넓은 길은 조문을 온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살아생전에는 호부인과 같이 엮여 무슨 변고라도 당할까 전전긍긍하던 이들이 막상 앓던 이 같던 호부인이 사라지자 앞을 다투어 문상을 온 것이었다. 대저 사람의 인성이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당태세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 골목 끝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상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가까이 올 성싶지는 않아 보였다. 당태세는 그들을 슬쩍 쏘아보고는 목괴를 짚으며 장원의 안으로 들어섰다.
상주 둘을 먼저 떠나보낸 여인의 장례에는 이제 홀로 남겨진 딸이 홀로 조문객들을 받고 있었다. 슬픔과 과로로 수척해진 젊은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당태세는 곧장 딸의 앞으로 다가가 예를 표하고는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조용히 딸에게 말을 걸었다.
순간 금세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피로한 인상의 여인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이 뭔가를 계속 이야기하자 상주 역시 슬쩍 눈을 돌려 주변을 확인하더니 그 역시 들리지 않는 소리로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대렴(大殮)을 앞둔 상주와 손님의 밀담(密談)은 그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귀린갈.”
당태세의 무릎에 침을 놓고 있던 해도침옹 양중일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는 듯 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당태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을 되풀이하여 양중일이 들은 말이 헛소리가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
“대봉상회를 멸할 것입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네가 나와 약조한 일을 깨겠다는 말이렷다? 왜 이유없이 장사의 성민을 죽이려고 하는 게냐?”
“그자가 장사의 상인들과 백성을 착취하오.”
눈을 크게 뜬 양중일 앞에서 당태세는 그가 목격한 것과, 호부인의 참살과 장례식장을 다녀온 일이 낱낱이 말해주었다. 조용히 상가에서 있던 일을 말하는 당태세의 목소리는 분노에 떨리지도 않았고 비감(悲感)에 이지러지지도 않았다.
“호부인의 하나 남은 여식에게 이미 대봉상회에서 언질이 들어온 모양입니다. 어미의 시신이 집에 인도된 날, 호부인의 집안은 보리 수매에서 빠지라고 협박에 가까운 서신이 들어왔다더군요.”
“세상에.”
뒤에 서 있던 류소화가 탄식을 내뱉자 양중일은 슬쩍 손녀를 보고 인상을 쓰더니만 당태세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귀린갈. 네 마음도 알겠고 왜 그러는지도 알겠다. 대봉상회가 패악을 저지른다는 것을 모르는 장사의 성민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외지인인 네 일이 아니다.”
“나는 호부인에게 호위를 요청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약조한 자와의 신의를 위해서도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이건 강호의 도리가 아니오.”
“강호는 망했느니라.”
“저는 살아있지 않습니까.”
“이 정신나간 놈아! 다 늙어서 한다는 소리가 강호 운운이냐! 다시는 강호 찾지도 않을 놈이!”
양중일은 그리 말하면서도 당태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당태세의 표정에서는 격동이나 불안정한 마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그는 마음을 정했고 냉정하게 일을 수행하겠다 마음먹은 뒤였다.
양중일이 아는 당태세는 일단 이렇게 마음을 정하면 끝까지 쫓아가 상대를 없애는 위인이었다. 도깨비불같이 움직이며 전갈처럼 노린 자는 기필코 죽였다. 귀린갈이 그냥 붙은 별호가 아니었다.
“망할 놈, 이미 계획은 다 짜 놓은 뒤로구나. 늙어서도 변한 게 없구먼.”
그때, 지금까지 잠자코 한 마디도 없던 류소화가 갑자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이번에는 당노사의 말을 들어주세요.”
“뭐야?”
류소화는 양중일이 소리를 지르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고 아리따운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할아버지도 호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좋은 분이셨잖아요. 그런 분이 그렇게 돌아가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년이 뭘 한다고 함부로 나서는 게야!”
“전 그 집에서도 허드렛일을 한 적 있어요. 품삯도 괜찮았고 저를 막 대하지도 않았어요.”
양중일은 끄응 하면서 머리를 긁더니만 맘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도리질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며 분이 풀렸는지 당태세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매도 아까보다는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래, 대봉상회만 손을 보고 끝낼 일이냐?”
“아닙니다. 당연히 영우문은 없애버릴 겁니다.”
양중일은 당태세의 말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렇다면 최소 사흘은 더 기다려야 한다.”
“사흘이요?”
“그래, 내가 닦달을 한 덕에 네 오른발에 도움이 될 의족을 그때까지는 맞출 수 있을 게야. 그러니 그 이후에 일을 도모하든가 말든가 네가 결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당태세는 양중일의 말을 듣더니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보리 수매는 모레가 되면 끝날 거라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집에서 진중하라고 협박이 들어왔다는 것이 호부인 따님의 이야기였는데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지요.”
양중일이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귀린갈 당태세. 지금 네 놈의 몸뚱어리로는 엄연한 한계가 있으니라. 주통산은 어찌 이겼을지 몰라도 진윤타와 오자평은 요행이렸다. 네가 항상 그런 식으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영우문의 전영포는 그들과는 또 다른 위인이다.”
“알고 있습니다.”
“네놈이 다리를 회복한다면 십중팔구 호각이거나 네가 털끝 하나 차이로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전에 붙는다면 네놈은 백전백패야! 순천문의 모든 무공은 강건한 두 다리가 기둥으로 받춰 줘야 제대로 된 강력(剛力)이 구사된다. 지금 강대강으로 붙어봤자 전영포에게는 절대 못 이겨! 문주인 네놈이 그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강호에서 일갑자를 넘게 종횡해온 의자(醫子), 해도침옹은 어지간한 문파의 내력과 기술 정도는 아예 머릿속에 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별 다른 말없이 그의 말에 수긍하였다.
“지금도 한계는 날마다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침옹의 의족을 차게 되면 뭐가 달라진단 말입니까?”
“달라지지! 네놈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게냐?”
당태세가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해도침옹은 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옆에 있는 문갑을 벌컥 열고는 주섬주섬 커다란 상자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상자 안을 뒤지던 해도침옹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섬주섬 몇 가지 물건을 꺼내어 당태세의 앞에 늘어놓았다.
“네놈에게 이걸 주마. 돈을 내놓거라.”
당태세가 해도침옹이 하는 짓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뭡니까? 다짜고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주면서 돈을 내놓으라니?”
“지금 네놈이 영우문과 대봉상회와 싸우는데 가장 필요한 것 세 가지만 추려보았다.”
해도침옹은 자신의 엄지와 검지로 다섯 가닥의 얇은 흰 머리카락을 들어 보였다. 당태세가 그를 유심히 지켜보더니만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사은침(白絲銀鍼) 아닙니까? 이 물건을 가지고 계시다니…….”
“그래도 한 문파의 장문이라고 알아보는구먼. 머리카락보다도 가늘지만 강철보다 질기다. 기공을 불어넣으면 화살촉보다 딱딱해지지. 이 정도면 어디에든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이야.”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 안을 뒤져 은편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해도침옹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둥근 구리구슬 하나를 꺼내 보였다. 당태세가 그를 보며 인상을 쓰자 양중일이 나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건 만장백편독(萬丈百翩毒)이야. 들어는 봤는가? 이미 멸문당한 사천당가의 마지막 작품이지.”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슬쩍 구리구슬 앞에서 몸을 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양중일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데, 두 노인이 하는 짓을 보던 류소화는 팔짱을 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진짜 만장백편독입니까? 약효는 남아 있습니까?”
“나도 수중에 들어온 뒤에 써본 적이 없네. 구리환 안에 소량이 들어있다고만 전해지지. 만약 쓰려거든 구리환을 깨고 써야 하네. 하지만 이게 밖으로 나오면…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지?”
“만 장 안에 있는 사람이 다 죽겠지요. 전해지는 바로는 그렇습니다만…….”
양중일은 히죽 웃으면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구리환이 점점 얇아지는 것 같아서 처리를 고심하던 중이었어. 자네가 가져가게.”
“이건 제가 돈을 받고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양중일은 당태세의 투덜댐을 무시하며 손에 쥐고 있는 붉은 종이에 싼 다른 환(丸)을 보여주었다. 어른 엄지손톱만 한 환을 지켜보던 당태세는 안색을 바로 하더니 양중일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엇이냐는 물음이었다.
“천하의 귀린갈도 이건 처음이겠지. 당연히 그럴 것이다. 실물을 보는 것은 이게 처음일 테니.”
“실물이라니… 이 환의 이름이 뭡니까?”
“구식환혼단(龜息還魂丹)이라는 물건일세. 이름은 들어봤나?”
당태세가 고개를 가로젓자 양중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시적으로 호흡과 단전을 정지시키지만 심맥은 붙여놓는 환일세. 정확하게 사흘 뒤에 다시 몸을 쓸 수 있지. 한 마디로 죽은 척할 때 쓰는 물건이라네. 사흘간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지내다 다시 일어나는 물건이지. 고대의 비서를 취합하여 내가 만든 것인데… 이론상으로 결점은 없다네.”
“이론상으로 말이지요?”
양중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먹고 시험을 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 손녀를 주랴? 그렇다고 죽다 살아나 보라고 누구에게 권해볼 수도 없고 말이네.”
“죽었다 살아난 사람 입장에서 별로 갖고 싶은 물건은 아닙니다.”
당태세가 말하자 양중일은 슬쩍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손바닥을 펼치고 툭툭 책상을 두들겼다. 당태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양중일을 보다가 한숨을 쉬며 쇄은(碎銀)을 내주었다. 절대로 손해는 보지 않는 위인이었다.
양중일은 물건 세 개를 주머니에 곱게 넣어 당태세에게 주며 이번에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대봉상회를 건드리면 필시 영우문이 들어올 것이다. 관과 대봉상회, 영우문은 서로 이어진 꼬리와 머리나 다름없느니라. 관은 몰라도 필시 영우문의 졸개들이 일어날 터이니 그를 염두에 두어라.”
“찾아오기 전에 제가 먼저 가 없앨 뿐입니다.”
양중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필요한 것은 없느냐?”
“류소저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예전에 영우문에서 일하신 적이 있다니 그곳의 간략한 약도라도 하나 기억나는 대로 그려주십시오. 그렇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 손녀는 이 일에 끼워 넣지 말라는데도!”
양중일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류소화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해도침옹 양중일은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양중일이 알기로 사내는 시작한 일을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당태세는 이대로 이곳을 떠나 바로 대봉상회로 갈 것이 틀림없었다. 사내의 모습이 못 미덥기 그지없었던 신선 같은 노인은 결국 당태세의 얼굴에 대고 한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과감하게 네가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돌아와! 네놈 의족은 아무에게도 못 쓰니 말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도침옹. 사흘이 지나도 안 오면 영우문에서 죽은 줄 아십시오.”
“이놈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두 사내는 류소화가 약도를 그려 가져다줄 때까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류소화가 약도를 당태세에게 넘겨주자 노인은 슬쩍 웃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장부 같은 덩치의 여인은 얼굴이 빨개지며 같이 고개를 숙여 보였고 당태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목괴를 짚고 천천히 초옥을 나섰다.
“죽지 마라.”
“노력하겠습니다.”
천천히 수풀의 그림자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당태세의 모습을 보던 양중일은 굳은 표정이 되어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문 앞을 지켜보았다.
“사람의 업보는 시간이 간다고 쉬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로구나.”
노인의 독백을 듣던 여인 역시 우거진 풀숲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