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88화 (88/226)

88. 호광 장사(13)

당태세의 손이 앞으로 뻗으며 새로 달아 넣은 예리한 창날이 종리세리의 목을 노리고 뿌려졌다.

빗살을 뚫고 날아가는 검은 창날이 종리세리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종리세리는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칼날로 창날을 친 뒤에 당태세의 목을 향해 도를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종리세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칼날이 창을 치는 순간 창이 먼저 회전하며 칼날을 퉁겨 보내고 그대로 연장선이 이어지며 종리세리의 목을 향해 날아든 탓이었다.

종리세리가 발을 뒤로 빼며 들어오는 괴창을 피하고 도를 수습해 다시 창날을 아래로 내리쳐 죽인 뒤 빈 공간을 점하여 당태세의 가슴을 베어 들어갔다. 순간 당태세의 손에 들린 괴창이 허공에서 회전을 하며 종리세리의 칼을 퉁겨내 버린 것이 아닌가.

괴창은 창의 중간에 손잡이가 하나 달려 있어 이 손잡이로 각종 묘용을 부리는 법인데, 지금까지 목발의 손잡이로 사용되던 손잡이가 어느새 당태세의 왼손에 잡혀 있었다.

종리세리의 칼이 튕겨 나가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반회전을 한 당태세의 괴창이 다시 독사처럼 머리를 들더니 순식간에 종리세리의 가슴과 목과 허벅지를 향해 독오른 머리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종리세리의 도가 다시 가슴 앞으로 모이며 들어오는 창날의 자격(刺擊)을 막아 내었지만 어느새 검결의 주도권은 종리세리가 아닌 당태세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종리세리는 다시 칼을 뻗으며 당태세의 괴창을 뿌리치고 당태세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었다. 당태세의 창이 다시 들어오는 칼날을 난창(欗槍)으로 튕겨내었다.

순간 종리세리의 몸이 낮게 땅바닥에 붙으며 손목을 돌리자 솟구쳤던 안모도가 그대로 날을 뒤집으며 빗물을 튀기면서 당태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 순간 종리세리의 오른 소매가 당태세의 단창에 찢겨 나가며 창날에 걸리고 소매가 옆으로 휙 제껴졌다. 그 순간, 종리세리의 두 발이 땅을 박차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선무사 천호의 몸이 뒤로 공중제비를 하며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비와 함께 땅에 가뿐히 착지하였다. 하지만 종리세리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느새 선무사 천호가 쓰고 있던 죽립은 저 멀리 날아가 비를 흠뻑 맞고 있었다.

창(槍)과 곤(棍)의 진퇴(進退)는 구별이 무의미하나 공방(攻防)의 기법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곤은 적을 찌르고 때리는 기법이 있고 창 역시 찌르고 때리며 베는 기법이 있지만 창술은 란창(欗槍)과 나창(拿槍)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막으며 찰창(扎槍)으로 란나창의 기법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 공방의 정석인 법이었다.

곤술의 화려한 타격 대신 일점(一點)의 자격(刺擊)과 면(面)으로 된 방어가 동시에 합쳐진 창술은 곤술보다 공부가 깊고 스승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법이라 뿌리깊은 무문(武門)이 아니라면 창술의 극의를 깨우치기는 힘든 면이 있었다.

설상가상 지금 당태세가 사용하는 기법은 단창(短槍)의 묘리를 사용하여 괴창(拐槍)을 운용하니 당태세의 창술은 그 길이의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변화무쌍함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가 일찍부터 알고도 남는 것이었다. 수많은 전장에서 창과 도를 맞부딪혀 본 종리세리였다. 창의 묘리를 모르는 그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창촉을 단 당태세에게 일방적으로 밀린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당연히 이해가 안 되겠지.”

당태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종리세리를 향해 재빠르게 걸어갔다.

난창과 나창의 보법을 사용하면서 오른무릎이 슬슬 아파 오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 그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비는 기세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당태세도 시간이 없었다.

당태세의 손이 움직이며 괴창이 빠르게 옆으로 날았다. 괴창의 날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빗방울을 동강내고 종리세리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종리세리의 안모도가 창날을 막으며 칼날을 돌려 괴창을 빗겨 올리고 당태세의 옆구리를 똑같이 노렸다.

하지만 그 순간 괴창날이 번득이며 종리세리의 귓가를 스쳤다. 종리세리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트는 순간 괴창의 중간 손잡이를 쥔 당태세의 왼손이 다시 움직이고 괴창은 그대로 방향을 바꿔 종리세리의 허벅지로 떨어졌다.

안모도가 들어오는 괴창의 날을 막아서는 순간, 괴창의 반대편 손잡이가 그대로 종리세리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종리세리가 왼쪽으로 몸을 회전하며 검을 회오리바람처럼 몸을 중심으로 휘둘렀다.

순간의 간격이 벌어지자 종리세리는 몸을 추스르고 다시 한 번 당태세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그 순간, 번쩍하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울려 퍼지고 땅이 진동하더니 종리세리의 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종리세리에게 떨어진 번개는 다름 아닌 당태세의 괴창이었다. 거꾸로 쥔 괴창의 손잡이가 종리세리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었다.

비틀대는 종리세리의 앞으로 당태세의 얼굴이 불쑥 나타나자 종리세리는 노인의 얼굴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도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리세리의 의지에 불과했다.

당태세의 우수가 장(掌)으로 변하더니 종리세리의 오른 가슴을 강하게 한번 밀어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종리세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벽에 부딪혔다. 그와 함께 괴창이 아래로 내려오며 종리세리의 뒤축을 걸어 당겼다.

순식간에 선무사 천호의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빗물과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보라와 함께 사내의 신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큰일 날 뻔했군.”

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종리세리의 머리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종리세리는 멍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도를 찾았다. 안모도는 이미 한 장은 넘는 거리가 떨어진 곳에 볼썽사납게 뒹굴고 있었다.

“내가…… 진 것인가.”

“자네가 졌군.”

“……이해가 되지 않아.”

종리세리의 누운 얼굴 위로 사정없이 비가 쏟아졌다. 종리세리는 여전히 뭔가 속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들고 당태세를 바라보았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노인은 어깨를 들썩이더니 툭 한마디를 건넸다.

“창촉 때문이다.”

“뭐라고?”

“내 목괴가 창촉을 꼈으니 오촌(五寸)은 늘어나지 않았겠느냐.”

종리세리는 멍하니 당태세의 말을 듣다가 그제야 고개를 뒤로 떨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늘어난 오촌의 길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그가 패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제야 종리세리는 왜 당태세가 창촉을 끼자마자 물러서지 않고 죽자고 앞으로 달려들며 공격을 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거리 잴 틈이 없었군.”

“알았으면 되었다.”

두 사내는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쓰러진 종리세리는 자신의 앞에 우뚝 선 채 비를 맞고 있는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손에 들린 괴창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지금 그 자리에서 그에게 어깨만 한번 움직이면 그대로 목을 뚫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느냐.”

“네가 나에게 창촉을 낄 기회를 줬으니, 이번 검결은 무승부다.”

종리세리가 누운 채로 노인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게 강호의 대련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너도 강호를 아는구나.”

노인은 괴창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나무못을 빼고 창촉을 뽑아내었다. 노인은 그제야 잊고 있던 약속이 생각났다는 듯 화급하게 창촉을 전대에 밀어 넣고 비틀대며 목괴를 겨드랑이에 낀 채 던져놓았던 종이우산을 집어 들었다.

종리세리는 가슴을 움켜쥔 채 노인의 하는 짓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은 화급하게 호부인이 사라진 골목을 향해 뛰어갔다.

“잠깐만!”

종리세리의 다급한 외침에 노인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종리세리의 눈이 그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노인은 물끄러미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종리세리를 바라보더니만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입을 열었다.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라고 한다.”

노인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는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종리세리는 아무런 말없이 노인이 등을 보이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끝없이 내리는 비가 사내의 얼굴과 온몸에 쏟아졌지만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소리 없이 노인이 불러준 그의 이름을 되뇌어보았다.

“쓸데없는 공명심이라니.”

노인은 입술을 끌끌 차며 어설픈 짓을 한 자기 자신에게 욕을 퍼부으며 빗속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뭐하러 천호인지 백호인지 하는 인간을 살려줬으며, 당초 뭐가 잘났다고 이름까지 알려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등돌리고 돌아서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불쏘시개만 화덕에 넣어준 꼴이었다.

“내가 내 앞길을 망치는구나! 어리숙한 놈! 미숙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당태세는 자신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사내를 죽이지 않은 것을 그리 후회하지는 않았다. 초식의 난해함이 아니라 오직 정묘한 검로(劍路)와 빠르기로 자신과 맞먹은 사내를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그는 살의가 분명하였지만 자신의 검을 믿고 늙은 적에게 한 수를 물러주는 자신감도 있는 무인이었다. 한 번의 만남으로 없애기는 아쉬운 호적수임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청의 군졸에게 인의를 베풀어 준 것이 가당한가.”

그는 청의 관인(官人)이고 이다음에는 분명 자신의 목숨을 집요하게 노리며 자신의 단점을 없앨 것인데, 그 때에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당태세는 알 수 없었다. 결코 즐겁지 않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당태세는 더 복잡한 생각을 멈추었다.

칼이 들어오면 막고 싸우면 될 것이고 그전까지 자신의 복수를 이루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들과 관계없이 호부인의 몸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호부인은 지금 시장에 영우문에 맞서 홀로 싸우러 간 것이 아니었던가. 당태세는 종이우산을 내던지고 지팡이를 손으로 쥐고는 빗속을 절뚝이면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다시 희뿌연 빗살이 천지를 뒤덮은 시장의 앞마당에 이르러서야 당태세는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가 천지를 뒤덮었어도 여전히 시장 안에는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중이었고 수많은 이들이 시장의 한 켠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중이었다.

당태세 역시 그들 사이로 목발을 집고 발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러워졌다. 사방을 메운 빗소리가 조금씩 사람들의 목소리에 의해 옅어졌다.

사람들은 서로 떠들고 잡담하며 앞으로 다가가고 이리저리 뭉치며 하나가 되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점점 짧아지고 거세지며, 그 안에서 욕과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당태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며 숨결이 가빠졌다.

노인은 언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모여드는 사람들을 어깨로 밀치고 앞으로 나가며 사람들 사이를 풀을 헤쳐 나가듯 떠밀고 계속 몸을 앞으로 디밀었다. 그리고 인파를 헤치고 뛰어든 시장의 한가운데에 도달했다.

당태세는 눈을 크게 뜨고 앞에 벌어진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곳에는 호부인이 종자들과 함께 누워있었다. 화려하던 겉옷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하얀 속옷을 둘러쓴 채 모로 누워있는 노부인의 몸은 참으로 작아 보였다.

그리고 노부인이 누워있는 곳에서부터 흘러나온 붉은 샘물은 바닥을 타고 흘러 낮은 곳으로 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와 뒤섞여 작은 호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당태세는 천천히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쓰러진 여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호부인의 등 가운데에는 붉은색으로 찍은 듯한 매화모양의 혈흔이 깊이 나 있었고 혈해(血海)의 근원은 그곳이었다. 당태세는 넋나간 듯 뭔가를 중얼거렸다.

“매화문(梅花紋)…….”

당태세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여있는 사람 누구 하나 눈을 부릅뜨지 않은 이가 없었다.

빗소리는 점점 거세지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 사방을 두들기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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