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87화 (87/226)

87. 호광 장사(12)

하루 종일 꾸물대던 하늘은 결국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빗방울을 하나둘 떨구기 시작했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하늘을 가린 희뿌연 장막에 되어 사방을 뒤덮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어딜 나가십니까? 침의한테 가시는 겁니까?”

“그래, 하루라도 빨리 나아야 할 것 아니냐.”

“참 숙부님은 한결같으십니다. 그 정성이면 다리가 낫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죠.”

아룡의 한결같이 깐작대는 말버릇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태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름 먹인 종이우산을 들고 목괴를 짚었다.

“너는 오늘 안 나갈 셈이냐?”

“오늘 같은 날은 방 안에서 객잔의 술을 마시며 조용히 시부를 읊는 것이 더 운치 있을 것 같습니다. 굳이 길거리의 진흙을 밟고 온몸이 젖은 채로 돌아다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오냐, 그렇다면 나 혼자 나갔다 들어오마.”

당태세는 아룡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길을 나섰다. 이제 바야흐로 우기가 접어들고 있었으니 비는 한결같이 내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태세는 기름 바른 새 우산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목괴를 겨드랑이에 낀 채 빗방울이 모든 것을 가려버린 장사의 회색빛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채 열 걸음을 떼기도 전에 이미 바짓자락이 흠뻑 젖어버렸다.

“약속은 약속이니.”

당태세는 자신을 타이르듯 혼잣말을 중얼대며 호부인의 저택이 있는 곳을 향하였다.

이런 우중(雨中)에 시장에 모여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만 부인의 성정으로 미뤄 봤을 때 여인은 시간을 미루거나 자신의 생각을 고칠 것 같지 않았다.

당태세는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여인의 집을 향해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이미 내려진 결정은 후회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지금부터는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뿐이었다. 영우문이 나오면 영우문에 맞서 싸우면 되는 것이고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할 터였다.

“늦지 않게 오셨군요.”

여인은 대문 앞에서 당태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빗방울은 매섭게 여인이 쓰고 있는 우산을 두들기고 있었고 호부인의 발은 당태세와 마찬가지로 흠뻑 젖어 있었다. 포석이 깔린 길 양편으로 빗줄기가 흐르며 이미 작은 내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날이 좋지 않은데 다음에 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상인들은 어차피 지붕 아래에서 회의를 주재할 것이고, 시장의 처마 아래에서는 비를 맞지 않겠지요. 가는 길이 힘들다고 할 일을 미룰 수는 없지 않겠어요?”

“가시지요. 뒤에서 한 발 떨어져 가겠습니다.”

당태세의 말에 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앞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쏟아지는 비는 우산을 금세라도 찢어발길 것처럼 드센 빗발을 뿌리고 있었다. 빗방울은 시야를 가려 방향을 어둡게 하고 사방에서 울어대는 빗소리는 오감을 둔하게 만들었다.

호부인은 우산을 받쳐 들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시장으로 가는 대로의 한가운데를 걸어가는데, 그를 호종하는 하인 몇을 제외하고는 길에 나와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태세는 목괴를 찍으며 여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이미 길은 냇가가 되어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갔고 포석이 깔려 있지 않은 곳은 황토가 비에 씻기며 누런 강을 만드는 중이었다.

앞장서 가는 호부인의 작은 몸은 빗줄기 사이로 언뜻 보였다. 여인은 옷이 젖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다리를 빠르게 놀렸고, 그 덕에 여인의 발은 마치 물을 헤치고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당태세는 여인을 따라 넓은 대로를 지나 남으로 이어진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높은 처마와 담이 이어지는 골목 안으로 하늘에서 땅이 이어지는 듯한 하얀 빗줄기가 화살처럼 꽂혔다. 당태세는 불현듯 고개를 들어 끝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와 그 위에 머무르고 있는 검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쉽사리 그칠 비가 아니었다.

“멈추어라.”

순간, 사방을 에워싼 빗소리를 뚫고 또렷한 사내의 목소리가 당태세의 귀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당태세 뿐 아니라 앞을 가고 있던 호부인과 그 종자들의 귀에도 들린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가 골목 안에서 우뚝 멈춰선 순간, 골목의 끝에서 한 사내가 그들을 기다리며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검게 칠한 죽립 아래 검은 장포와 갈색 마괘를 두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콧수염과 매 같은 눈은 억수 같은 빗속에서도 그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당태세가 우산을 옆으로 벗어던졌다. 따듯하면서도 억센 빗줄기가 노인의 어깨와 머리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호부인, 먼저 움직이십시오.”

“대협, 어쩌시려고…….”

“바로 따라잡겠습니다.”

당태세의 말을 들은 호부인은 급하게 옆의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흑립사내는 여인을 쫓지 않았다. 사내는 천천히 걸어오며 당태세와의 거리를 좁혔다.

당태세는 비를 맞으며 사내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안모도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지만 그와 더불어 흉흉한 기세를 여과 없이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당태세의 입이 먼저 열렸다.

“영우문에서 보냈느냐.”

“본관은 보국장군 서림각라부의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다.”

당태세가 눈살을 찌푸리자 종리세리는 천천히 안모도를 뽑아들었다. 장식하나가 달려 있을 뿐인 평범한 칼이었지만 그 칼은 주인과 함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손에 칼이 들린 사내의 섬뜩한 기세는 점점 정도를 더해갔다. 당태세는 천천히 오른발을 뒤로 빼고 목괴를 앞으로 내밀며 얼굴에 묻은 빗줄기를 닦아 내렸다. 종리세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귓가에 울렸다.

“그대는 산동 제남, 하남 개봉부, 그리고 호광 무창의 각 문파 두령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죄를 인정하는가.”

“죄라 하였는가?”

당태세의 눈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새파란 안광이 뻗어 올라왔다. 노인의 이가 뿌드득 갈리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였다. 물러서라.”

“죄를 인정하였으니 본관은 그대를 치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름이 무엇이냐.”

높은 담벼락 사이로 은색으로 빛나는 비가 한 덩이가 되어 땅에 찍히며 파편을 사방으로 뿌렸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종리세리는 눈꺼풀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당태세 역시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미동도 없이 종리세리를 노려보았다. 노인의 입이 열렸다.

“만주족의 개에게 알려 줄 이름 따위는 없다.”

“그럼 죽인 뒤에 알아내마.”

순간, 종리세리의 발이 물을 박차고 빗줄기를 뚫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사내의 도가 빗줄기를 베며 옆에서 빠져나와 주인과 함께 노인의 몸을 향해 움직였다.

노인의 손에 들린 목괴가 땅을 떠나 하늘로 치솟으며 달려드는 종리세리의 몸을 향해 물방울과 함께 튀어 올랐다.

나무와 쇳덩이가 허공에서 부딪히며 피 대신 물보라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당태세의 몸이 앞으로 움직이며 목괴를 뻗었다.

순간 종리세리의 도가 목괴를 한 합에 퉁기며 일촌도 안 되는 틈을 타고 당태세의 목을 향해 보이지도 않게 앞으로 뻗었다. 당태세가 어깨를 슬쩍 움직여 검의 진로에서 목을 빼냈다.

그와 함께 노인의 목괴가 다시 좌에서 우로 움직이며 빗방울을 때려 부쉈다. 종리세리의 도신이 목괴를 그대로 걷어 올리며 다시 옆으로 짧은 참격을 넣었다. 순간 당태세의 몸이 뒤로 뻗어 나가며 다시 목괴를 걷어들였다.

목괴를 걷는 것과 동시에 종리세리의 칼날이 앞으로 방향을 바꾸며 당태세를 따라붙었다. 예리한 살기가 당태세의 목 언저리를 감싸며 파고 들어왔다.

오른손의 목괴가 재빠르게 들어오는 도의 끝을 위로 튕겨내며 방향을 잡았지만 아내 종리세리의 도가 허공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당태세의 목괴를 베어냈다. 물이 튀기며 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목괴가 긁히는 소리가 빗속에서 울려 퍼졌다.

두 사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며 적을 마주보았다.

종리세리의 칼은 여전히 당태세의 목을 겨누고 있었고 당태세의 목괴 역시 하늘로 들린 채 종리세리의 무표정한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당당한 자세와는 달리 이를 드러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당태세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짧은 검결 동안 한 번도 승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상대의 칼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도법이었고 그 연륜도 깊어 보이지 않았다. 초식의 연결은 채 두 합을 넘지 않는 것이 군진(軍陣)에서 체득한 도법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빈틈이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무결(無缺)의 도법이었다. 일찌감치 젊을 때 강호에서 만났어야 할 위인을 엉뚱하게 장사의 어두운 골목길에서 다 늙은 노인이 되어 만나고 만 것이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목괴를 거둬들이며 다시 사내의 도법을 파훼할 수 있는 자세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종리세리가 취한 평범한 선인지로(仙人指路)의 자세는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빗줄기는 하염없이 쏟아져 눈을 흐리게 하였고 목괴를 잡은 손을 미끄럽게 만들었다. 당태세는 천천히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 괜찮았던 오른 다리가 다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부목을 대고 있지만 몸을 급하게 쓰면서 체중이 많이 얹힌 것이 틀림없었다. 총제적인 난국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당태세는 목괴를 내리고 땅을 짚었다. 그 순간, 종리세리의 칼이 빗줄기를 뚫고 튀어나왔다.

“망할!”

당태세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며 땅을 짚었던 목괴를 들어 화살처럼 날아오는 종리세리의 칼을 막았다. 종리세리의 손목이 돌며 칼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회전하며 빗방울을 사방에 뿌리고 당태세의 머리를 쪼개려 날아들었다.

당태세의 목괴가 위로 뻗으며 들어오는 칼날을 받고 오른손으로 목괴를 들어 종리세리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종리세리는 그새 몸을 틀어버렸고 그와 함께 뒤로 돌아간 종리세리의 안모도가 바람소리를 내며 당태세의 뒷머리를 박살 낼 기세로 날아왔다.

“젠장!”

당태세가 비틀거리며 목괴를 있는 힘껏 휘둘러 들어오는 안모도를 막아내고는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종리세리는 목괴를 들고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에서 그를 노리고 있는 종리세리를 견제하였다. 종리세리는 아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선인지로의 세로 그를 대적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큰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까지 밀려본 적은 강호에 출도한 이래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다리가 멀쩡하다 하더라도 종리세리와 백중세(伯仲勢) 이상으로 칼을 나눌 수 있을지 이젠 의심까지 일어났다.

어떻게 저 한인(漢人)이 청인의 벼슬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될 법도 하였다. 성치 않은 발로 목괴의 묘용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기격(奇擊)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당태세는 이를 지그시 깨물더니 다시 혼잣말을 내뱉었다.

“무리를 하더라도 제대로 싸워야 결판이 나겠구나.”

묵묵히 당태세를 바라보던 종리세리 역시 심호흡을 하고 한 발을 앞으로 뻗으며 노인을 향해 다가왔다. 그 순간, 당태세가 한 손을 올려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라.”

“무슨 일이냐.”

“이대로 싸우기는 좀 벅차구나.”

“그렇다면 항복하라. 목발을 던지고 순순히 따라오라.”

당태세는 대답 대신 자신의 품 안 전대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종리세리는 가늘게 눈을 뜨고 당태세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노인의 품에서 나온 것은 넓적한 날이 달린 창촉이었다.

당태세는 그를 가져다가 목괴의 끝에 돌려 끼워 고정시키고 짧은 나무못을 꺼내 구멍에 박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리세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를 던졌다.

“목발에 창촉을 끼운다고 달라질 성싶으냐.”

“곤법과 창법은 초식이 다르니라.”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랴.”

“달라져야지.”

목괴에 창촉을 끼운 당태세가 고개를 들어 종리세리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씻을 생각도 없이 노인은 젊은 호적수를 바라보다가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인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지 않으냐. 당연히 가는 것이 장부의 도리니라.”

당태세가 목괴가 아닌 괴창을 돌려 휘리릭 묻은 빗물을 털어내고 다시 종리세리를 바라보았다. 당태세의 표정에는 이미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종리세리 역시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자세를 갖추었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보세!”

노인의 고함과 함께 노인의 왼발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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