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호광 장사(10)
사태가 다급하고 구해줄 사람은 없어 보였지만 호부인의 목소리는 뒤에 천군만마가 있는 것처럼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네 이놈들! 백주에 무슨 짓이냐! 영우문의 졸개들인 것은 장사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데 이러고도 천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하지만 맞은편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당태세는 다급해졌다.
노인은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을 누비며 어디에서 호부인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지 찾아내야만 했다. 호부인의 목소리는 더 울려 퍼지지 않았다. 당태세의 인상이 찡그려지며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것들!”
그때였다. 뭔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며 신음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당태세가 서 있는 바로 옆의 골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노인은 바로 목발을 움켜쥐고 두 발로 나는 듯이 뛰어 가장 가까운 골목으로 뛰어든 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쓰러져 있는 몇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분명 호부인이 데리고 있던 종자들일 터였고, 쓰러져 있는 사내들은 이미 땅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는 상태였다.
영우문의 사내들은 여기 모인 호부인 일행을 모두 도륙내 버릴 심산임이 분명하였다. 당태세는 재빨리 땅을 박차고 검은 옷의 사내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멈추어라!”
당태세의 몸이 저녁놀을 받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늘어나듯 앞으로 뻗으며 사내들의 사이로 몸을 넣었다. 당태세의 왼손에 잡힌 목괴가 호선을 그리며 앞으로 떨어져 단도를 쥐고 있는 영우문도의 뒤통수를 그대로 가격했다.
앞에 있던 사내가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머리를 벽에 박으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순간, 당태세의 몸이 다시 한 발 앞으로 나가며 길을 막고 있는 두 명의 영우문도를 향해 목괴를 상하좌우로 번갈아 후려쳤다.
두 사내가 동시에 양옆으로 튕겨나가 벽에 부딪히며 그대로 모로 쓰러졌다.
그제야 당태세의 눈에 호부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금 호부인은 자신의 앞에서 방패가 된 채 영우문도의 단도를 막고 있는 시종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손을 부들부들 떨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겁먹은 표정은 짓고 있을지언정 여인은 끝까지 자신의 손에 들린 산판을 쥐고 가까이 다가오려는 자들을 향해 위협하는 시늉을 하는 중이었다.
당태세가 그들을 향해 몸을 날리자, 호부인을 둘러싸고 있던 세 명의 흑의인이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냐!”
의미없는 물음에 당태세는 대답대신 목괴를 앞으로 뻗었다. 장창처럼 뻗어나간 목괴의 끝이 독사처럼 흑의인의 가슴을 찍으며 다시 당태세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흑의인 하나가 그대로 무릎을 꿇는 순간, 두 명의 흑의인도 정신을 차리고 단도를 들더니 당태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 당태세의 눈이 번득이더니 오른발로 땅을 치고 앞으로 몸을 뻗었다.
화살처럼 두 흑의인의 앞에 당도한 당태세의 두 손이 옷깃을 날리며 회전하자 손에 잡힌 목괴가 마치 신룡처럼 두 사내를 위아래에서 덮쳤다. 순식간에 두 번의 격타음이 동시에 울려 퍼지며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단도 두 자루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사내 두 명이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이를 보고 있던 호부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어서 이리 오시오 부인, 이곳은 위험하오!”
당태세의 말에 호부인은 산판을 들어 당태세의 뒤를 가리켰다.
“아직 뒤에 남아 있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태세가 몸을 돌리고 쇄도해오는 네 명의 흑의인에 맞섰다.
흑의인은 동료가 쓰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누워 있는 동료의 몸을 밟고 칼을 뽑으며 당태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당태세의 목괴가 허공에 떠있는 흑의인의 목을 가볍게 찍어 넘기고 뒤를 이어 들어온 두 명의 사내에게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연타를 날렸다.
순식간에 세 명의 몸이 벽에 처박히며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료 셋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벽에 늘어붙는 모습을 본 마지막 흑의인은 멍하니 단도를 든 채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가 그를 보며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사태 파악이 안되는 구나. 도망을 가든지 덤비든지 해야지.”
순간 당태세의 오른발이 그대로 앞으로 뻗어 부인각을 날려 흑의인의 무릎을 찍으며 좌수가 권으로 변해 흑의인의 턱을 그대로 쳐올렸다.
우직 하는 소리가 두 곳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며 흑의인의 몸뚱이가 철퍼덕 소리를 내며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당태세는 인상을 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각법(脚法)을 쓰는 것은 무리였구나. 다리가 완전한 것이 아니니…….”
그때였다. 뒤에서 다소곳한 여인의 목소리가 침착한 말이 터져나왔다.
“대협께서는 누구십니까? 미천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호부인이었다. 늙은 여인은 아직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지만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여전히 산판을 손에 든 채로 당태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여인을 바라보더니 살짝 목례를 하였다.
“영우문에 원한이 있는 사람이외다.”
“저와 같은 사연이 있는 분이로군요.”
여인은 파리한 안색에 억지로 웃음을 밀어넣더니만 주변을 돌아보더니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염치불구하고 더 부탁을 드리자면…제 종자들의 시신을 여기서 수습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데려가고 싶습니다만.”
“아닙니다. 부인.”
당태세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심이 최우선입니다. 가슴이 아파도 뒤로 미루십시오.”
“……알겠어요. 노사. 그렇다면 염치없지만 제 호위를 맡아 주시겠어요?”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두 노인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
“그곳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요?”
장사부(長沙府)의 지부(知府)는 권태로운 목소리로 앞에 앉아있는 종리세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외인인 네가 왜 칼을 차고 그 자리에 있냐는 것을 돌려 말하는 관인(官人) 특유의 어조였다.
종리세리는 지부의 의뭉스러운 어투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부에게 답하였다.
“의심스러운 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돌아다니던 것뿐이오. 지부대인의 부하들 때문에 그 자를 놓친 것이고.”
“나 이거야 원.”
지부는 앞에 앉은 북경의 관인은 밥맛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목도 뻣뻣한데다 나오는 말이라는 것도 순전히 자기 위주였다. 게다가 상하의 구분도 없는 위인 같았다.
“분명 황도에서 무슨 명을 받았으니 여기까지 오셨으리라 믿소이다. 하지만 멀쩡한 대낮에 칼을 차고 상인들을 겁박하는 것 같은 경우는 삼가해줬으면 좋겠소.”
“상인을 겁박하는 것은 내가 아닌 것 같소만 유념은 하리다.”
“그럼 누가 겁박을 한다는거요?”
종리세리는 슬쩍 지부를 쳐다보았다. 지부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동자가 지극히 불손하면서도 위험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벼슬의 품계를 따지지 않는 곳이었다면 저 종리세리라는 자에게 머리를 숙였을 것 같았다. 종리세리의 입이 열렸다.
“내가 어제 영우상방이라는 곳을 들렸다 왔소이다.”
“그렇습니까?”
“관(官)하고도 잘 아는 것 같더군요.”
지부의 입이 닫혔다. 종리세리의 차가운 눈이 계속 그를 주시하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최소한 북경에서 여기까지 혼자 돌아다닐 정도라면 만만한 위인은 아닐 거라 믿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들이밀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통판에게 보고를 받은 날부터 왠지 뒷목이 싸하던 지부였다.
“그래서 종리천호는 무엇을 원하시오?”
“제가 특정한 용의자를 오늘 봤습니다. 얼굴을 아니 조금만 탐문하면 찾을 수 있을거요.”
“그렇습니까? 잘된 일이군요.”
“그러니 제가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을 조금 허락해주십시오. 영우문에도 들러야 할 것 같으니 그 문제도 눈 감아주시고.”
한 부(府)를 담당하고 있는 지부의 앞에서 거리낌없이 말하는 사내의 모습을 보던 지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크게 콧김을 불었다.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위인이었다. 하지만 지부는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미곡시(米穀市)에서 있던 일은 대봉상회와 장사 지부가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다. 영우문은 덤일 뿐이었고 지부는 이 일을 외지인에게 확산시키고 싶지 않았다.
“좋소이다. 천호의 편의를 봐 그리하겠소.”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선무사도 아니고 선무사 천호라니. 종리세리. 그대의 품계가 어찌 되는 거요? 나와 같은 사품의 반열인가? 아니면 오품인가?”
“나는 품계에 연연하지 않소. 그저 보국장군께서 내려주신 별개의 관직일 뿐이외다.”
지부는 입술을 핥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천호라면 오품이고 선무사라면 자신과 같은 사품인데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관직이라면 뭐라 할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니, 만약 저 품계가 종리세리라는 개인을 위해 주어진 관직이라면 그것은 더 골치아픈 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저 앞에 앉아있는 인간은 보국장군의 측근이라는 소리였다.
지부도 그런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각 패륵이 데리고 있는 그들의 ‘그림자’들에 대해서 전해오는 풍문 같은 것이었다.
위법한 자를 잡아 치죄하되, 법에 구애받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였다. 장사지부는 바싹 마르는 입술을 다시 한번 핥고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흔쾌히 책상 바닥을 쳤다.
“좋소이다! 어차피 보국장군께서 명하신 일이니, 내 있는 힘껏 돕겠소! 힘이 필요하면 뭐든지 말하시구려!”
“이 후의는 꼭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종리세리의 형식적인 인사가 지부의 귀를 무척이나 달콤하게 간지럽히는 중이었다.
***
“고맙습니다. 대협 덕에 천첩의 잔명과 명예를 지켰습니다.”
떡 벌어진 거대한 기둥 사이로 화려한 대문 장식이 인상적인 장원의 앞에서 호부인은 그를 호종한 당태세에게 거듭 인사를 올렸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외다.”
“협객은 명성과 무위로 보상을 받지만 장사꾼은 돈으로 계산을 할 뿐이지요. 조금이나마 사례를 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상인의 도리입니다.”
호부인의 말투는 격(格)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말을 숨기지 않는 솔직함이 있었다. 당태세는 슬쩍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한 번 손사래를 쳤다.
“재물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재물을 받을 수는 없겠지요. 대신…….”
“대신?”
당태세가 고개를 들고 호부인을 바라보았다.
“영우문이 어떤 놈들인지 잠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입니다.”
“원한이 있다 하셨지요?”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부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만 알겠다는 듯 자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천하를 오시하는 여장부라 하여도 모든 말을 밖으로 내돌리고 싶지는 않은 듯 보였다.
“그렇다면 이 노파도 조금은 할 말이 있지요. 대협의 과거가 어떤지 몰라고 나도 포한은 있으니까요.”
“부인께서도 말입니까?”
당태세의 말에 호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합죽거렸다가 다시 입을 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두 아들이 영우문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었다면 충분하겠지요?”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