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호광 장사(9)
당태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시장 초입의 광장에 모여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모여있는 사람들의 복색은 하나같이 비단에 굵은 띠를 두르고 머리에 터럭 하나 안 남기고 변발을 깨끗하게 친 사내들이었는데 행색을 보아하니 이 근방의 상인들이었다. 그것도 꽤나 벌이가 괜찮아보이는 이들 같았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인상을 굳히고 그들 가운데에서 이야기하는 이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개중 몇은 아예 대놓고 인상을 쓰며 입술을 일그러뜨린 표정이었다.
당태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사람들의 모임을 바라보다 가운데에서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고는 놀랍다는 듯 눈을 껌벅였다. 상인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여자였다.
그것도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꽤나 나이 들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상인들과 비슷한 비단옷에 두꺼운 허리띠를 매고 한 손에는 커다란 산판(算板)을 몽둥이나 방패처럼 이리저리 흔들어대는데 걸걸한 목소리로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여간한 남자도 감당을 못할 것 같았다.
“정신들 차리란 말이오! 여기 모인 사람들이 그래도 장사에서 미곡을 가지고 강남을 좌지우지한다는 인물들인데 어찌하여 상단 하나에서 제시하는 가격에 끌려다닌단 말인가! 아니, 막말로 이야기해서 우리가 그네들 허수아비라도 된단 말이오!”
“호부인, 우리 처지 알면서 그런 이야기를 또 하는 이유가 뭐요. 대봉상회가 어떤 이들이고, 또 그들 뒤에 누가 있는지도 알면서…….”
“이대인! 그렇게 담이 약하면서 어찌 시장판에서 먹고 사는 게야! 보리 한 되 값이 쌀에 맞먹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호부인이라 불린 여자가 빽 하니 소리를 지르자 말을 꺼냈던 사내는 놀란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사람들 사이로 숨어버렸다. 호부인이라 하는 여인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춘궁기 지나고 바로 나온 보리를 이렇게 비싸게 부르면 누가 살 것이며! 산다 해도 없이 사는 사람들은 어찌하란 게요! 막말로 우리가 부처도 아니고 자비를 베풀 일도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 처지를 봐주면서 팔아야지. 그게 상도(商道) 아닌가! 더군다나 이렇게 값이 점점 올라가면 나중에 미곡이 가을에 풀릴 때는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게요? 쌀이 금값이 되겠구만!”
“호부인, 우리도 그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대봉상회보다 우리가 싸게 매석을 하면 그다음엔 어찌 될지 모르시나? 그놈들 뒤에….”
호부인이 산판을 치켜들고 말을 꺼낸 사내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내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나와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뭔가! 상단 일을 회주가 알아서 할 일이지 시장 앞에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소! 영우상방인가 야차 걸귀인지 모를 놈들이 우리 모가지를 노리니까 더욱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오!”
“호부인!”
사람들이 사색이 되어 여인의 말을 말리려 들자 여인은 오히려 거세게 산판을 좌우로 흔들며 사람들에게 고함치기 시작했다. 참으로 여걸(女傑)의 풍모를 지닌 부인이었다.
“아니야! 조용히 있으면 우리만 다치는 게야! 장사의 성민들도 다 아는 이야기야! 대봉상회가 돈을 올려서 보리를 매수하고, 그 가격 아래로 보리를 매수하겠다는 상인은 대봉상회의 돈을 받은 영우상방에서 보낸 자객들에게 맞아 죽는다는 걸 말이오!”
“아, 참! 호부인! 미치겠구먼!”
“우리가 언제까지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면서 살아야겠소! 엉? 죽는 게 그리 무섭소?”
여인의 말을 듣고 있던 아룡이 넌지시 당태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대충 알아듣지 않겠습니까? 아까부터 저 소리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니까요.”
“대충 알겠구나. 커다란 상단이 살수들을 고용해서 상인들을 겁박한다 이런 이야기렸다?”
“그렇습니다. 장사(長沙)도 썩어 문드러졌네요. 한인(漢人)놈들이 모이면 한다는 짓이 백성 핍박하는 짓 아니면 모략으로 사람을 뒤에서 죽일 생각뿐이니… 어찌 저놈들이 만주족의 강건함을 이기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어느 순간, 당태세는 밀려드는 욕지기 없이 아룡의 말에 수긍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하도 많이 들어서 자신이 아룡의 빈정거림에 이골이 난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아룡의 말에 동감을 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당태세는 찌푸린 미간을 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었다. 해도침옹 양중일이 말한 영우문의 행동이라는 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나이를 먹고 순후해지는 건 고사하고 어디가 뒤틀린 게냐.”
“네? 숙부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야. 늙으니 괴상한 버릇이 다 생겨서…….”
당태세가 손을 내저으며 화급히 자신의 버릇이 된 혼잣말을 자책하는 순간, 갑자기 기이한 울림이 먼발치에서 느껴졌다.
사방을 옥죄며 오감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 다름 아닌 고수가 근처에 있을 때 발동하는 무인의 촉각이었다.
당태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울림이 퍼져나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가득 모여 호부인의 연설을 듣고 있는 저 너머로 한 사내의 그림자가 올라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상가의 처마 아래 햇살이 들지 않는 곳에 한 사내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은 장포에 갈색 마괘를 입고 작은 모자를 눌러쓴 청인(淸人)의 복색을 한 사내였다. 날카로운 콧수염을 기른 사내의 눈동자는 정확하게 당태세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장포의 왼쪽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분명 도(刀)의 형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태세가 지금까지 봐 온 사람 중에서도 손꼽을만한 위압적인 기도였다.
“천하의 고수로구나.”
당태세는 꿈꾸듯 중얼거리며 슬쩍 몸을 일으켜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멀리 있던 사내도 몸을 움직이며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사내는 당태세의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 자가 영우문의 수하라면 영우문주 전영포는 정말 대단한 이를 수족으로 쓰고 있는 것이었다. 당태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목괴를 단단히 잡았다.
풍겨오는 기감만으로도 저 사내와의 검결은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늙은 당태세의 입이 저절로 굳게 닫히고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그때였다.
“모두 물러서지 못할까!”
한 소리와 함께 일단의 녹영군이 관리들과 함께 부둣가를 끼고 사람들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녹영군의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창 대신 긴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것을 봐서 저들은 치안을 위해 형부(刑部)에서 따로 관리하는 이들인 듯하였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던 당태세는 슬쩍 눈빛이 달려졌다.
녹영군의 뒤쪽으로 검은 복색을 한 청년 일고여덟 명이 녹영군이 움직이는 대열 뒤에 붙어서 그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그들은 그때 당태세를 습격했던 영우문의 복색이었다.
당태세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안 봐도 알 법한 이야기였다. 개봉의 구봉문, 제남의 충룡문이 하던 일과 대동소이한 경우가 여기에서도 벌어지는 것 같았다.
순간, 당태세의 눈이 다시 옆을 향하였다. 인파 사이에 가로막혀있던 사람들이 녹영군 덕에 길이 터지자 처마 아래에 서 있던 사내가 천천히 발길을 이쪽으로 돌린 것이었다.
고수가 접근해오고 있었다.
당태세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이 시장바닥에서 결국 한바탕 일을 치뤄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영우문주와는 얼굴도 마주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길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무두리. 어째 영 꺼림칙하구나. 슬슬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저도 그 생각 중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그려.”
녹영군을 관할하는 것으로 보이는 관리가 모인 상인들을 보며 소리를 높였다.
“시장에서 왜 이리 모여 소요중인가!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호부인이라는 여인이 산판을 옆으로 들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관리를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구대인 아니신가요! 우리가 여기 모여서 보리수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봉상회가 억지로 수매가를 높이 쳐서 올리려 하는데 이것은 관에서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관은 민가의 상업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오. 호부인도 아시지 않소!”
“너무 대봉상회를 봐주시는 거 아닌가요! 대봉상회 뒤에 영우상방과 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어찌 이리 백주에 사람들에게 핍박을 하여 제대로 된 토의도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
형부의 사내는 호부인을 일찍부터 알았는지 아니면 더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없다 여겼는지 뒤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녹영군이 앞으로 나서며 옆에 쥐고 있던 긴 몽둥이를 들어 사람들에게 겨누기 시작했다.
“해산하지 않는 이들은 철저하게 계도하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형부의 군사들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매를 본 닭떼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데, 상인과 백성 모두 비명을 지르며 시장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중이었다. 그와 함께 호부인 역시 한차례 고함을 지르고 뒤로 물러서 시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녹영군의 뒤에 있던 검은 옷의 사내들이 앞으로 나와 호부인이 사라진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순간, 당태세는 바로 옆의 골목에서 예리한 살기가 퍼져나오는 것을 감지했다. 이미 건너편에 있던 살수가 자신의 앞까지 당도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화급하게 아룡의 팔을 잡더니 더듬대며 골목을 가리켰다.
“무두리! 저, 저기 보아라! 누가 긴 칼을 들고 돌아다닌다!”
아룡의 눈의 휘둥그레지더니 주변을 들쑤시고 다니는 녹영군을 보며 두 손을 흔들어댔다.
“이보시오! 여기 도자(刀子)가 있소이다! 사람을 해하려 하네! 세상에! 백주에 이게 웬일이냐!”
우렁찬 목소리로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는 아룡의 모습은 금새 녹영군의 눈에 들어왔고, 도자(刀子)라는 말이 귀에 들어가자 마자 녹영군의 표정은 험악하게 굳어졌다.
순간 골목에서 튀어나온 콧수염의 사내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녹영군을 바라보더니 주춤하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사내의 날카로운 매같은 인상은 그대로 당태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실로 기백만큼이나 매서운 생김새였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무두리, 이거 몰려다니면 더 위험하겠구나! 따로 가자! 나중에 객잔에서 보자꾸나!”
아룡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당태세는 목괴를 땅에 찍으며 몸을 낮춰 장소를 벗어났다.
당태세가 몸을 움직여 빠져나가는 것을 보던 콧수염의 사내는 재빨리 그를 따라가려 하였지만 그의 앞에는 이미 긴 막대를 든 녹영군들이 그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진짜 칼을 패용하였구나. 네 놈은 대체 누구냐!”
“나도 관인(官人)이다. 내 길을 막지 마라!”
“장사(長沙) 사람이 아닌데 무슨 소리냐? 어디서 온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라!”
평정심을 지키고 있던 사내의 얼굴에 노기가 확 치솟았다. 사내는 재빨리 품속에서 옥패를 꺼내 녹영군의 코앞에 들이밀고는 으르렁대는 소리와 함께 이를 뿌드득 갈았다.
“보국대장 서림각라부의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다! 당장 비키지 못할까!”
녹영군의 눈의 휘둥그레지는 순간, 종리세리는 어깨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군사들을 들이밀며 사람의 장막을 벗어나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내는 주위를 다급하게 둘러보았다. 하지만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는 상인들과 백성들의 모습만 눈에 잡힐 뿐, 목발을 짚고 뛰어가는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종리세리가 이를 드러내며 눈을 부릅떴다.
“젠장!”
그 순간, 당태세는 시장의 좁은 길을 건너가며 다급하게 자신이 찾는 이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검은 옷의 사내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모든 골목길로 흩어져서 먹잇감을 찾는 듯, 당태세의 시야에 검은 복색의 사내가 먼 골목 사이로 몸을 넣는 장면이 들어왔다.
당태세는 몸을 낮추고 목괴를 옆구리에 끼고 두 발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가죽끈을 댄 부목이 오른다리 사이에서 딱딱 울리는 소리가 났지만 당태세의 몸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앞을 향해 움직였다.
오른발이 땅에 닿고 있었지만 신통하게도 통증이 밀려오지 않았다. 실로 양중일의 침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노인의 귓가에 바람소리가 스치며 골목 입구가 쉭쉭 뒤로 지나가며 땅이 앞으로 다가왔다. 실로 오랜만에 밟아보는 속보(速步)였다. 순식간에 흑의인이 들어간 골목으로 접어든 당태세의 귓가에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울려 들려왔다.
“이 더러운 놈들! 영우문의 졸개들이냐!”
분명 조금 전 들었던 여장부 호부인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