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83화 (83/226)

83. 호광 장사(8)

종리세리가 입을 연 순간부터 널찍한 영우상방의 집무실은 고요한 선방이나 다를 것이 없어졌다.

방 안의 두 사내는 급격하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종리세리는 자신이 아는 바를 짧게 말하였고 영우문주 전영포는 짧은 물음 외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종리세리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영우문주는 거북이처럼 앞으로 죽 뻗었던 목을 다시 뒤로 빼며 어깨와 허리를 바로 하였다.

사내는 어느새 평정심을 회복한 듯 보였다.

“천호의 말씀은 잘 들었소이다. 허나.”

종리세가 영우문주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절름발이 노인이라는 자를 모르고 지금 이 일이 나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소이다.”

“왜 그리 생각하시오.”

“그 일이 나 전영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 않소. 나는 그 세 문주와 연이 닿지 않은지 근 십여 년이 다 되어가오. 서로의 얼굴도 잊게 생긴 판인데 어찌하여 그들과 내가 같은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오?”

“서림각라부는 그리 생각하지 않소.”

“그러실 수도 있겠지. 보국장군이야 그 일을 책임지신 분이니까.”

“그건 무슨 말인가?”

전용포가 술을 마시고 볶은 수박씨를 입에 털어 넣더니 종리세리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눈에 다시 은은한 내공과 패기가 서리기 시작하는데, 그는 북경의 사자 앞에서도 자신의 위신을 잃기 싫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십칠 년 전에 우리에게 한 약조를 가지고 우리 여덟 문파를 협박할 수 있는 이가 있다 칩시다. 그 이가 결국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소? 이 일로 가장 손해를 보는 이들이 누구냔 말이오.”

“그대들 여덟 문파 아닌가. 생사가 오가는 문제인데.”

전영포는 손을 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그는 우리 목숨을 장기말로 쓰는 것이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숫자가 얼마나 되어서 우리를 치려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 화살은 결국 보국장군 서림각라부로 움직이고 있다 생각하오.”

“무엇 때문에?”

“우리야 한 지역 한 문파만을 잃을 뿐이지만 보국장군은 그동안 쌓아온 명성과 후손에게도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소? 잘은 몰라도 나 역시 패륵들의 논공행상에 대해 들은 풍월이 있소이다. 결국, 누군가 서림각라부를 음해하려고 하는 짓일 가능성이 있다 이거요.”

종리세리는 슬쩍 콧수염을 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영우문주의 말이 과감하기는 해도 어폐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북경 귀족가문의 권력구조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보이지 않는 투쟁이 횡행하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종리세리의 표정을 보고 있던 영우문주는 히죽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술을 들어 종리세리에게 권하였다.

“이 몸, 영우문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이 흑칠 되어 있는 작은 집은 내게 금성탕지(金城湯池)나 다름없소이다. 오히려 천호께서 의심스럽고 걱정되는 일이 있다면 제게 하명만 해 주십시오.”

“하명을 하라?”

“그리하면 무엇이든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인명(人命), 재물, 명성. 무엇이든 말이오.”

종리세리는 도깨비가 웃는 것 같은 영우문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술을 입에 털어 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종리세리의 차가운 눈은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그나마 가장 가까운 감정은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위법 아닌가.”

“단견(短見)으로 보면 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길게 되면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지요.”

“궤변이네.”

“관(官)과 부상대고(富商大賈) 모두가 이 영우문에 부탁을 하오이다. 그들의 흥성이 이 장사의 흥왕이고, 그것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이 전모는 믿고 있습니다.”

관(官)의 청부.

아마 그 때문에 통판(通判)도 영우문을 쉽게 보지 못한 것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일은 누군가 처리하는 이가 있기 마련. 그제야 종리세리는 왜 영우문이 상방이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아무런 재화를 팔지 않는지를 알았다.

이곳은 영우문주의 말마따나 사람 목숨과 재물을 청부받은 대로 거두고 나누는 상회였다. 아마 이 자와 거래를 하는 자는 장사의 관인(官人)뿐 아니라 불법하고 무도한 자들도 다수일 터였다. 종리세리는 이곳에 오래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절름발이 노인을 찾게 되면 연락을 주시오.”

“관(官)이 보낸 자가 아니라면 청부를 따로 받은 고수일 것이오. 저도 그런 자는 본 적이 없어서 확언은 못 하겠습니다.”

“보국장군께 응당한 보수를 달라 말씀드릴 것이니.”

종리세리의 말에 영우문주의 입가에 올라온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거한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활짝 웃으며 술잔을 두 손으로 들어 이마 높이로 들어 올렸다.

“찾게 되면 바로 연락을 드리리다. 생사(生死)불문(不問)으로 처리하리까?”

“심문은 내가 하고 싶군.”

대화가 아닌 거래가 끝난 셈이었다. 종리세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가타부타 말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호종하던 시위가 종리세리를 모시고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전영포는 웃는 낯을 버리고 심각한 얼굴이 되어 두툼한 손을 위로 들었다. 벽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묵의를 입은 팔자수염의 중년이 그의 신호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문주께서는 하명을 하옵소서.”

“지금 나간 북경의 개에게 사람을 붙여라. 고객이지만 고객이 아닐 수도 있다.”

“존명.”

“그리고 허우대 멀쩡한 헌헌장부 공자와 함께 다니는 절름발이 노인을 찾아라. 성부(城府) 내에 잠입했을 수도 있다. 위험한 자니 필시 삼인 이상이 협격해서 잡아야 할 것이다.”

“존명.”

“마지막으로… 그 호씨 아낙네는 어찌 되었느냐.”

“점점 시장에서 분탕질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정대인에게서 연락이 온 상태입니다.”

“선금은 들어왔고?”

“물론입니다.”

전영포는 몸을 의자 뒤로 젖히더니만 게슴츠레 눈을 뜨고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눈이 천장에 고정된 채로 입만이 열려 명령을 내렸다.

“총두 둘에게 명하여 참(斬)하게 하라. 백주에 중인환시(衆人環視)할 수 있도록 하라.”

“명을 받겠습니다.”

팔자수염의 중년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자기 혼자 남은 적막한 집무실 안에서 전영포는 천장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날이 가도 쉬운 게 없구먼.”

굵고 탁한 사내의 목소리는 이내 허공으로 흩어졌다. 사내는 두툼한 손가락을 들어 앞에 있는 촛불을 비벼 꺼버렸다. 어둠과 고요함이 동시에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

한편 당태세는 아침 일찍 아룡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는 서문의 양중일을 한 번 더 보고 그에게 진맥을 더 받기로 약조한 터였다. 하지만 당태세는 객잔을 떠나기 전 아룡을 불러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도 치료가 끝나면 한 번 장사 부둣가의 화려한 풍광을 보고 싶긴 하구나. 하지만 지금은 치료를 받아야 하니 너와는 길이 엇갈리겠다.”

“걱정마십시오! 숙부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지요!”

“오늘도 그곳에 가서 놀 요량이라면 한 번 그 보리가 뭔지 캐 묻는 것도 시간 때우기에는 좋겠구나. 나도 네가 어제 한 말을 듣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잠을 설쳤지 뭐냐.”

아룡은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그 제안에 응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저도 한번 슬쩍 알아볼 생각이었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다 꺼리니 거리는 이유라도 알아야 관심을 끊던가 할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다.”

대충 당태세는 말을 얼버무리다가 슬쩍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행여 위험한 일이라도 벌어지면 당장 몸을 빼야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위험한 일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바로 무두리 아닙니까!”

당태세는 자신이 왜 마지막에 그런 말을 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알음알음 정이 든 것인지 양중일의 영우문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여간 당태세는 어딘가 어수선한 마음을 붙잡고 어둑한 해도침옹 양중일의 처소로 다시 들어갔다.

오늘은 류소화가 자리를 비우고 오직 양중일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따님은 안 보이시는군요.”

“예전에 이 땅에 역질이 돌아 사위랑 같이 죽었다네. 그 뒤로 내가 이리 건너온 게지. 무창을 떠난 것은 비단 견정문 때문만은 아니야.”

“괜한 것을 물어봤군요.”

“어쩌겠는가. 아비가 의원이라도 때가 닿지 않으면 죽음을 피하지 못하더군. 천명(天命)이라는 것은 따로 하늘이 정해놓은 것이 맞다는 생각이야. 요즘은 그런 생각이 부쩍 많이 들어.”

“제 천명은 어떻겠습니까?”

당태세의 말에 양중일은 삐쭉 아랫입술을 내밀더니 얇은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

“네 놈의 명은 하늘이 아니라 명부(冥府)에 불어봐야 한다. 사람을 개 잡듯 잡아대면서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으로 봐서 넌 명부에서도 넌더리 내는 놈이야.”

양중일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를 당태세의 오른발에 대고 두르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해도침옹이 하는 일을 보고 있는데, 해도침옹은 당태세의 발을 보더니 자신의 침이 들어갔던 곳을 다리를 둘러싼 종이 위에 붓으로 표시를 남겼다.

무릎 위쪽부터 꼼꼼하게 점을 찍으며 종이에 혈을 기록한 해도침옹은 이내 종이를 다시 벗겨내더니만 이제는 침상 아래쪽에 개어놓았던 진흙을 가져오더니 당태세의 오른 다리에 철썩철썩 붙이기 시작했다.

“해도침옹, 지금 뭘 하시는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네놈의 오른 다리는 아무리 해 봐도 예전의 각력(脚力)을 회복할 수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놈이 내공을 돌리고 공부를 하면 다리의 근(筋)이 단련되어 어느 정도 뒤틀림을 잡아주겠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지. 네놈의 발을 다시 제대로 잡아주려면….”

양중일은 침상 위에 풀러놓은 당태세의 부목과 가죽끈을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저런 허접스러운 것 말고 진짜 부목이 필요하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네놈은 이 다리고 치고받고 달리기를 원할 것이다. 안 그러냐?”

“가능한 노릇입니까?”

당태세의 말에 양중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장사의 끝 성벽 언저리에 내가 아는 야장(冶匠)이 하나 있다. 내 침을 만들고 벼르는 곳이지. 그곳에 내가 이 종이와 흙으로 본뜬 네 오른 다리를 가져갈 것이다.”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양중일을 바라보자 늙은 침술가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가 네놈보다는 낫단 말이다. 근사한 걸 만들어줄 것이니 너는 돈이나 더 내놓거라.”

“그 은괴로 부족하단 말이오? 도적이 따로 없구먼.”

“이놈아! 이걸 만드는데 얼마나 공력이 들어가는지 알어? 최소 일주일에서 보름은 걸려야 할 것이다! 나도 야장도 그동안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야?”

“일은 외손녀가 다 하면서 무슨….”

말은 그리하면서도 당태세는 전대에 손을 넣고는 다시 은전을 양중일에게 건네었다.

해도침옹 양중일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당태세의 오른발은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보름 안에 장사를 떠나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그리되면 나만 돈을 벌게 되는 셈인데 말이다.”

“보름까지는 남아 있을 겁니다. 이래저래 조사해볼 것이 많이 생겼으니까요.”

당태세가 중얼거렸다. 해도침옹 양중일은 슬쩍 당태세의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행여 그 전에 영우문 놈들하고 손을 섞지는 말아라. 저 어설픈 부목에 목발을 짚은 채로 그놈들하고 붙는 일은 삼가란 말이지.”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당태세가 슬쩍 쓴웃음을 짓자 양중일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노력이 아니라 아예 만나지를 말란 말이다.”

양중일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당태세는 건성으로나마 그에게 알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도침옹이 비록 침과 뜸을 잡고 사는 의자이긴 하지만 그 역시 강호의 협사이고 어지간한 잡졸들은 손짓 한 방으로 정리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영우문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은 당태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만사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으렸다.”

당태세는 혼잣말을 하면서 아룡과 만나기로 약조했던 부둣가의 작은 다관 앞으로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놀랍게도, 아룡은 다관의 앞에서 술 하나 취하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당태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당태세가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아룡은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풀고 그의 ‘숙부’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니 무두리, 어찌 된 일이냐. 이렇게 일찍 나와서 기다리다니. 내가 괜한 수고를 끼친 것이냐?”

“아닙니다. 숙부. 이런 건 수고도 아니지요.”

“그런데 왜 술 한 잔 입을 축이지도 않고 이렇게 길거리에 나와 서 있는 게야? 이 늙은이 때문이냐?”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아룡은 대답 대신 다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당태세를 바라보며 슬쩍 곁눈질을 해 보였다. 당태세가 아룡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무슨 일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는데 아룡이 소리를 죽이고 당태세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어제 그렇게 사람들이 말을 꺼리던 게 무엇인지 바로 보고 알았지 뭡니까요.”

당태세의 가느다란 눈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