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호광 장사(4)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떠나실까요?”
채 반 시진이 되기도 전에 류소화는 일을 마치고 당태세를 동행하여 수춘루를 나섰다. 빠르게 일터를 떠나면서도 사람들에게 괄시를 받지 않은 것을 보니 류소화의 일솜씨는 꽤나 괜찮은 듯 보였다.
“다리가 불편하시네요. 이러고 천리길을 오셨단 말이예요?”
당태세가 목괴를 짚고 여인을 따라나서자 류소화는 당태세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늦춰 걸었다. 생각보다 더 마음 씀씀이가 깊은 여인이었다. 당태세는 웃으며 류소화의 말을 받았다.
“원래부터 이러지는 않았다네. 양노사가 이 꼴을 보면 가소롭다고 웃겠지.”
“원래 외조부님이 괴팍하시기는 하죠. 하지만 다친 분을 보며 웃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럴까. 하긴 양노사는 환자들에게는 늘 엄격한 사람이었으니까.”
“조금만 더 가시면 되요. 저희 집은 수춘루하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그래, 그거 다행이구먼.”
마치 딸과 아비처럼 서로 만담을 나누며 지나가는 당태세와 류소화는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섞여 들었다.
학관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자 다시 여염의 여인들과 상인들이 북적대는 작은 시장 골목이 또 하나 나왔다. 참으로 장사는 장사꾼들의 도시다웠다.
사람과 물건이 흔전만전인데 여기저기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과 호객하는 상인들이 뒤섞여 마치 까마귀 떼 사이를 지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양노사가 이런 곳에서 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바로 옆에 있는 사람 목소리도 안 들리겠군.”
“저희 집은 조용한 곳에 있어요.”
“오. 그런가.”
“그리고 외조부께서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으세요.”
조곤조곤 미소지으며 걸어가는 류소화를 보며 당태세는 자신도 오랜만에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오는 격의 없고 계산하지 않은 웃음이었다.
“우습구먼. 그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가 어찌 그렇게 산단….”
순간, 당태세는 말을 멈추었다. 노인의 예리한 기감이 사방을 탐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느껴진 기묘한 기운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의 뒤를 미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나이 많은 노인의 과민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길을 재촉하던 당태세였으나 시장 골목을 지나가면 갈수록 점점 그 기묘한 기운은 또렷하게 그의 뒤를 밟고 있었다.
당태세는 이마를 문지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대로 뒤를 잡히면 곤란한데 말이야.”
“네? 뭐라고 하셨어요?”
“오늘 돈 많이 쓰겠구먼.”
작게 투덜대던 당태세는 품 안에서 다시 은편을 꺼내어 슬쩍 류소화에게 다시 보여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양노사를 보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가 있는가. 이것으로 돼지고기라도 좀 사 오게나. 나도 여기저기 좀 둘러볼 테니. 여기서 반다경쯤 뒤에 다시 만나는 것은 어떻소?”
말하는 표정이나 행동이 영락없이 시장에 딸을 데리고 온 아버지의 모양새였다. 류소화도 너무 많이 돈을 준다는 둥 부담스러워하는 말투였지만 이내 표정은 행복한 미소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러면 노사, 조금 있다 여기서 뵙겠습니다. 안 그래도 장을 보러 갈 생각이었거든요.”
“잘 되었구먼.”
당태세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뚜벅뚜벅 목괴를 짚고 옆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골목 안까지 바글대는 중이어서 당태세는 일부러 한적한 곳을 찾기 위해 때아닌 발품을 팔아야만 하였다.
이윽고 사람들의 종적이 뜸한 막다른 골목길에 이르자 당태세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는 기지개를 길게 켰다. 초행인 성읍의 시장 골목에서 오가는 것도 이제는 꽤나 지치는 일이 되고 있었다.
“이거 참. 나이는 못 속이겠구나.”
당태세가 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며 주변을 바라보고 있자, 골목의 초입에서 두 명의 사내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부터 당태세의 뒤에서 읽히던 그 기척이었다.
두 사내는 막다른 골목 앞에 서 있는 당태세를 확인하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성큼성큼 노인을 향해 다가왔다.
“늙은이, 잘도 도망 다녔지만 이젠 갈 곳이 없으렸다.”
“내가 도망 다녔다고?”
당태세가 몸을 돌려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두 사내는 검은 흑의를 입고 있었지만 두 손에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권사(拳士)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니, 분명 저들의 품 안에는 단도나 몽둥이 같은 것이 숨겨져 있을 듯싶었다.
당태세의 말을 들은 사내 하나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늙은이,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영우문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두 사내는 자신들의 소속이 영우문이라는 것을 대놓고 말하는 중이었다.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에 영우문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가장 귀가 많은 시장에서 물어본 것뿐이외다. 왜 그러시오?”
“영우문에 무슨 관심이 그리 많은가? 어느 상회(商會)의 사람이냐?”
“나는 상회의 사람이 아니오, 그저 행객(行客)일 뿐이외다.”
당태세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이제 두 사내는 웃는 표정이 아니라 죄인을 추궁하는 포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행객이 영우문을 찾는다면 그것이 더 수상하다. 장사에서 영우문을 함부로 찾는 것은 관례로 금하고 있는 것을 모르면서, 왜 영우문을 찾는 것이냐?”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희한한 소리만 지껄이는 사내들이었다. 당태세는 인상을 찌푸렸다.
맘 같아서는 두 사람을 어디 음침한 곳에 묶어두고 하루 종일 심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류소화와 곧 만날 시각이 다가오니 그럴 수도 없었다.
분명 영우문은 장사부 안에 존재하지만 태양 아래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듯 보였다. 대체 사람들이 모두 영우문의 이름을 아는 판국에 왜 은밀하게 보이려 하는지, 그리고 그 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뭐가 어찌 되었든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해도침옹 양중일을 만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나를 보내다오.”
“뭐라고?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을 못 들었느냐? 너는 우리와 함께 가야 한다.”
“늙은이, 너는 우리가 노상에서 중얼대는 행각승(行脚僧)으로 보이느냐?”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참새처럼 연이어 말하는 두 사내의 말을 듣던 당태세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우습구나. 영우문을 입에 올렸다고 돈이라도 몇 푼 달라는 말인가.
“이런 망할 늙은이가!”
두 사내는 일시에 소매에서 작은 쇠추가 달린 철퇴를 꺼내었다. 앙증맞아 보이는 크기였지만 충분히 사람의 머리를 깨버릴 수 있는 효용이 있는 병기였다.
“영우문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몸으로 깨닫게 해주마!”
당태세가 목발을 슬쩍 앞으로 뻗으며 두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 쇳덩이로 나를 어찌할 요량인가?”
“당장 따라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제삿밥을 먹게 해 주마.”
당태세가 두 사내의 말을 듣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이를 드러내 보였다.
“이거 고맙구먼. 젊은이 두 사람의 목숨값에 한 푼 양심의 가책을 섞어볼까 하였는데.”
“뭐가 어째!”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두 청년이 동시에 몸을 움직이며 당태세의 머리를 향해 작은 철퇴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당태세의 목괴가 땅에서 하늘로 솟구치며 들어오는 오른쪽 흑의 청년의 머리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후려쳤다.
순간 동작이 정지한 오른쪽 청년이 멍하니 하늘을 보고 서 있는 동안, 당태세는 발을 빙그르르 돌리며 몸을 젖혀 왼쪽에서 날아오는 철퇴를 피하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오른발의 허벅지 쪽에서 투툭 하는 소리가 나더니만 발이 휘청하며 돌아가고 푹하니 땅이 꺼져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른발이 마치 구덩이 속으로 빠지듯 주저앉으며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태세가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무는데, 그를 본 젊은이가 다시 한번 손에 든 철퇴를 뒤로 젖히더니 기세 좋게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당태세는 목괴를 위로 창대처럼 올리며 머리로 떨어지는 철퇴를 막아내었다. 그와 함께 왼 무릎을 꿇고는 다시 목괴를 돌리며 나무뿌리를 뽑아대듯 목괴를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목괴의 손잡이가 청년의 종아리에 걸쳐지며 앞으로 휙 하니 젖혀지자 흑의청년은 그대로 발이 껑충하니 허공으로 뜨며 엉덩이부터 땅에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찌릿한 충격이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흑의청년의 얼굴을 향해 목괴의 손잡이가 나무로 된 도끼가 되어 그대로 날아들었다.
둔탁한 충격이 당태세의 두 손에 전해지는 것과 동시에 짧은 비명을 지른 청년이 그대로 몸을 옆으로 누이며 쓰러졌다.
그와 함께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던 오른쪽의 흑의 청년 역시 나무토막이 쓰러지듯 뻣뻣하게 굳은 채 뒤로 넘어갔다.
그제야 당태세는 자신의 오른발을 돌아보았다. 다리에 대놓았던 부목 두 개를 지탱해주던 가죽끈이 어느새 낡아서 터져나가며 오른발이 속절없이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당태세의 이마에서 한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어이없는 일을 당해 잡졸의 손에 죽을 뻔하였구나.”
당태세는 찢어진 가죽끈을 팽개치고 부목 두 자루를 손에 쥔 채 목괴를 짚고 비틀대며 일어섰다. 옆으로 돌아간 오른 다리는 땅에 닿을 때 힘을 받지 못하였다. 당태세는 실로 강호에 재출도한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절름발이가 된 채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어디를 다녀오신 건가요? 그 나무조각 두개를 사 오신 거예요?”
“허허, 그냥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당태세와 류소화는 어느새 시장 골목을 지나 남쪽으로 나 있는 수풀 무성한 작은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큰 길을 따라 걷다 작은 개울을 끼고 한적한 소로로 접어들자 북적대던 인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고요한 시골의 정취가 두 사람을 감쌌다.
기이한 골목이었다.
북적대는 장사의 성중(城中)에 이런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당태세는 예견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마치 슬쩍 시중의 골목을 지나자 선경(仙境)이 펼쳐지는 것 같은 것이 해도침옹 양중일이 몸을 숨기고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교묘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하는가?”
“조금만 더 가서 한 번 더 꺾어지면 그곳에 저희 집이에요.”
류소화가 싱글대며 당태세를 바라보고 말하던 순간, 갑자기 류소화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웬일로 오늘은 밖에 나와 계시네요.”
당태세는 류소화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사이를 쳐다보았다. 늘어진 줄기를 시냇가에 담그고 있는 버드나무 잎 사이로 하얀 장포를 입은 노인 하나가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변발을 치지 않은 하얗게 센 머리를 관으로 묶어 올리고 다듬지 않은 긴 수염을 장포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선경에 나오는 신선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노인은 물끄러미 손녀와 함께 다가오는 변발의 노인을 바라보며 눈가에 깊은 주름을 잡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네 놈은 누구냐!”
아직 노인의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당태세는 노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귀린갈 당태세가 찾아왔소. 해도침옹.”
순간, 노인의 찌푸렸던 눈이 화들짝 크게 터졌다.
“귀린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