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호광 장사(1)
어두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는 말 그대로 표발대우(瓢潑大雨)라 부를 만하였다.
하늘에서 퍼붓는 비는 드넓은 동정호에 하얀 막을 쳐 놓았다.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배는 천천히 장사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데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객실에서 보던 아룡은 못내 돌아가는 꼴이 맘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비쭉대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망할! 어떻게 비가 이렇게 온답니까? 아직 오후가 되지도 않았는데 하늘은 저녁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드넓은 동정호를 보며 호연지기를 만끽하려 했더니 뱃전도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여름이 되었으니 폭우가 몰아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느냐.”
점잖게 말하는 당태세의 말을 듣던 아룡은 입이 댓 발은 나온 채 점점 가까워지는 장사의 성읍을 보며 혼잣말을 투덜거렸다.
“아무리 부성(富城)이면 뭐하나. 날이 밝아야 놀 수 있는 것이고 날이 좋아야 풍류가 사는 것이지….”
“기왕에 왔으니 즐겁게 있다 가면 될 것이다. 매일 비가 오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당태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도 날씨가 맘에 안 드는지 밖으로 경치를 내다보았다. 사방이 회색으로 물든 풍경 가운데로 높은 성벽과 누각이 마치 그림자처럼 그들의 앞으로 천천히 밀려왔다. 원래 장사는 강남의 동서를 잇는 곳이다.
동으로는 소항과 무창이고 서쪽으로 가면 파촉의 강역이니, 강남의 미곡이 모두 장사에 모였다가 동으로 가서 북경까지 조운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쌀이 모이면 돈이 들고 나는 법이니 이곳이 부유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높은 성벽과 웅장한 누각은 그 권세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억수로 내리는 빗속에 보이는 회색빛의 성채는 화려하다기 보다는 위압적으로 여행객의 눈에 들어왔다.
당태세는 투덜대는 아룡의 거동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장사에 들어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해도침옹 양중일 노사를 찾아 그의 다리를 제대로 고치는 것이었다.
비록 무창의 남평수가 신기에 가까운 침술로 그의 통증을 한결 덜어주었다지만 그의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게 만들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해도침옹이라면 분명 그의 오른 다리가 불구일지언정 예전의 감각을 조금이라도 되찾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진각은 못 밟더라도 체중을 나눠서 보법을 밟을 수 있고 방향을 바꿀 때 유연하게 축을 쓸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제대로 된 공부를 펼 수 있을 것이다.’
당태세는 무창에서 이도협 진윤타와 나누었던 마지막 검결을 생각하고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진윤타의 팔보천괴권을 피한 것은 순전히 요행이었다. 진윤타의 느리지만 상대의 발을 잡아채는 팔보천괴권의 보법 아래에서 당태세의 부서진 오른발은 실로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양중일을 만나는 것이 그래서 무엇보다 우선이다.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영우문주를 만나 봤자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당태세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해도침옹을 만난 다음에 할 일로 넘어갔다. 영우문과 해묵은 포한을 청산하는 게 그다음의 일이었다.
당태세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첩지와 문주 셋을 죽이고 얻어낸 증서들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당태세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독백을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영우문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영우문. 그리고 영우문주 전영포.
긴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을 한가지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영우문주 전영포의 성격은 한가지 단어로 축약이 가능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호걸(豪傑)이었다.
당태세가 아는 한, 영우문주는 북경 구대문파를 포함한 북경의 어떤 무인들보다도 호협하고 거칠 것이 없는 위인이었다. 불의한 일이 보이면 누구보다 먼저 나섰으며 누군가 위기에 처해 있으면 자신의 몸을 내던져 그를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옷차림이나 예절 같은 것도 그저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일이었다.
정도무문의 문주에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독문병기는 다름 아닌 쌍도끼, 즉 쌍부(雙斧)였고 영우문의 도법 개월도천도(蓋月跳天刀)를 자신의 부법으로 만든 월천부박(月天斧搏)은 화려하다기 보다는 거칠고 패도적이기 그지없었다.
성격 또한 불같았다. 위선자의 꿀 바른 혀를 누구보다 싫어했고,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원수보다 미워했다. 하지만 말이 통하는 이와 만나거나 무학(武學)이 경지에 이른 자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의 핏줄보다 귀하게 대할 줄 아는 이였다.
그런 성격의 문주 아래 있는 영우문도 그 기풍이 호쾌하고 직선적이었다.
북경이 이자성에 의해 침노되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졌을 때 가장 많은 문도를 끌고 온 자가 다름 아닌 영우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함락 직전까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문파도 다름 아닌 영우문이었다.
그런 자가 버젓이 살아남아 배신한 여덟 문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모를 일이야.”
뱃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당태세는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전영포는 다른 문주들과 달리 사적으로도 당태세와 친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당태세가 형(兄) 대접을 받았고 자신이 스스로 아우라 칭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태세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눈을 부릅뜨고 있는 대로 인상을 쓴 채 도끼를 휘어잡고 그를 향해 달려들던 야수와 같은 형상이었다.
결국 역모의 전날 밤, 아홉 문주 중 여덟이 배신을 맹세하고 당태세를 친 것이었는데 무엇이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전영포 같은 이까지 변절을 하게 만들었는지 당태세는 여전히 알 도리가 없었다. 견정문주 진윤타에게서도 뾰족한 대답을 찾지 못한 당태세였다.
“숙부님, 이제 부두에 다 온 모양입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기름을 먹인 등롱(燈籠)들이 부둣가에 도열하며 어두운 물과 뭍을 구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부두에는 왕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확실히 번성하고 있는 도읍이라는 것이 한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배의 덧창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룡 역시 작게 신음을 내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 곳이네요. 성벽도 높고 사람도 많으니 작은 나라에 온 듯싶습니다.”
“옛부터 장사는 대처였다. 사람과 물산이 많으니 볼 것도 많을 것이다. 그나저나 벌써부터 눅눅하니 옷이 젖어 드는구나. 빨리 객잔을 알아봐야겠구먼.”
“어디로 잡을까요? 이런 성읍이라면 꽤나 객잔도 비싸겠습니다.”
당태세는 슬쩍 자신의 봇짐과 그 안의 궤짝을 살펴보았다.
아직 충룡문에서 털어온 돈과 개봉에서 받아온 돈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산동에서 금월방주가 떠날 때 준 노자도 아직 깊숙한 곳에 넣어둔 채였다. 아룡이 미친 듯이 도장(賭場)에라도 가서 탕진을 하지 않는 한 여비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다. 무두리, 이럴 때일수록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하느니라. 원래 상인들이 많은 고장은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법이다. 네가 잘 차려입고 좋은 곳에 묵는다면 사람들이 괄시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풍채도 좋지 않으냐?”
괄시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 당태세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아룡의 눈이 슬쩍 커지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맞잡았다. 이번에도 당태세가 한 말이 여지없이 심중에 꽂힌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겠지요? 안 그래도 저도 숙부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지 뭡니까! 원래 한인들은 고고한 만주족과 달라서 사람의 속내를 보지 못하고 그저 껍데기 하나 체면치레 하나에 목숨을 거는 족속들 아니겠습니까? 그런 치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태세가 보기에 아룡은 자신에게 좋은 말이 있으면 그것을 백배 천배 확대하여 좋게 알아듣고,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안 좋은 말이라 생각하면 그에 대한 악감(惡感)도 백배 천배로 부풀려 생각하는 위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룡이 당태세를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이고, 뭔가 하나 미끼를 던져주면 절대로 그 미끼를 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룡은 벌써부터 두 팔을 걷어붙이더니 선창에 실어놓은 수레와 나귀를 보러 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무두리, 아직 비가 오는데 벌써부터 나갈 준비를 하느냐?”
“아닙니다! 먼저 준비하고 어서어서 나가야 좋은 객잔을 얻겠지요! 이 배가 큰 데다 타고 있는 사람도 많으니 빨리 나가는 게 제일입니다! 제가 모시러 오면 지체 없이 나오십시오!”
당태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룡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당태세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부둣가에는 녹영군으로 보이는 군졸들이 죽립을 쓰고 들어오는 배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대오를 흩트리지 않고 자신의 임무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성읍들에 비해 꽤나 절도가 잡혀 있는 군사들이었다.
또한 부두의 일꾼들도 누구 하나 요령을 부리는 이들 없이 들어오는 배를 기다리며 비를 맞고 서 있는 이들도 있었다. 당태세에게 장사의 첫인상은 잘 짜여진 군진(軍陣)과 같다는 모습이었다.
당태세는 비를 맞으며 태산처럼 서 있는 장사의 회색빛 성벽을 올려다보며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하나 쉬운 일이 있었더냐.”
장사와 동정호에 하늘이 문을 열고 비를 뿌리던 때, 장강의 초입에서 동정호로 들어오는 작은 중선 위에도 하나 둘씩 빗방울이 떨어져 물자국을 남기는 중이었다.
뱃사람들이 화급하게 돛을 손보고 화물을 안으로 들여놓기 시작하자 타고 있던 손님들도 비를 피하게 위해 객실 쪽으로 들어섰다.
작은 북새통이 일어나며 사람들이 번잡하게 오가는 와중에서도 유독 한 명의 사내만은 이물 쪽 갑판에 좌정하고 앉은 채로 뱃머리가 움직이는 곳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던 뱃사람 하나가 주춤주춤 다가오더니만 관모와 칼을 차고 있는 사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나으리, 이제 비가 내릴 것 같은데 선실로 들어가심이 어떠신지요? 쉽게 그칠 비가 아닌 듯싶습니다.”
“고맙네. 비가 많이 오면 내가 알아서 움직이지.”
격식을 갖춘 말이었지만 사내의 목소리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뱃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신의 할 일을 하러 몸을 들렸다. 그때였다.
“이보게, 선부(船夫)”
“예예! 말씀하셨습니까!”
제풀에 깜짝 놀라 토끼 눈이 된 채 뒤를 돌아본 뱃사람을 보며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뱃사람은 순간 입을 꽉 다물어버렸다.
장강 물질로만 십수 년을 살아온 뱃놈 인생에 수백 수천의 인생을 접해본 그였지만 이렇게 사람의 뱃속까지 훑는 듯한 매서운 눈빛을 가진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앞에 있는 이와 비견될 만한 이는 없었다.
“장사까지는 멀었는가?”
“아… 네! 지금 동정호를 지나서 바로 들어갈 것입니다! 장사는 동정호의 남쪽 끝에 있지요! 비가 오면 조금 더 시간이 지체되지만 바람만 잘 타면 하루 반나절 정도 걸릴 것입니다.”
“늦어지는군.”
“네?”
“아무것도 아니네. 가보게.”
사내의 명령 아닌 명령에 뱃사람은 마치 선생의 말을 듣는 학동처럼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사내의 얼굴에 떨어진 빗방울이 맺힌 땀과 섞여 턱 아래로 흘렀다.
저 관모를 쓴 사내에게 더 말을 걸거나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태도는 지극히 정중하고 난폭한 말을 쓴 것도 아니었지만 뱃사람은 관모 쓴 사람 곁으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하루빨리 장사에 정박하여 저 사내를 내려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관(官)에서 나온 건 알겠다만… 사람을 잡으러 온 것인가…?’
뱃사람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오한이 일어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하늘은 비를 제법 뿌리고 있었다. 배와 강이 동시에 젖어 들고 있는데, 여전히 갑판에 앉아 있는 매 같은 사내는 뱃머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이 떨어지는 관모 아래로 슬쩍 보이는 사내의 눈동자는 마치 사냥감의 둥지가 보이기만을 기다리는 짐승처럼 보였다.
동정호를 지나면 바로 장사부(長沙府)에 잇닿는 소상강이 지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