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75화 (75/226)

75. 호광 무창(22)

무덥고 조용한 여름 하오(下午)는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보였다.

흘러가는 물조차 소리를 듣기 힘들었다. 새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적막이 사방을 꽉 조인 가운데 한 줄기 바람소리가 구중궁궐 같은 담과 담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 바람은 하늘이 만들어 땅위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주위를 진동시키는 권격(拳擊)의 기세였다.

상중(喪中)에는 쇠붙이는 가까이하지 않는 법이라. 이도협 진윤타의 일신에는 무기가 없었지만 팔과 두 다리가 능히 창과 도를 대신하고 있었다.

노인의 양 팔꿈치가 풀을 베는 낫처럼 예리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공기를 가르며 대적을 베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당태세 역시 몸을 낮추고 목괴로 들어오는 공격을 막으며 우수를 뻗어 권을 진윤타에게 날렸다.

하지만 진윤타의 두 손이 엇갈리며 들어오는 당태세의 공격을 튕겨냈고, 재빠르게 발을 아래로 날리며 당태세의 오른발을 제치고 어깨로 당태세를 들이받았다.

당태세는 불편한 오른발을 슬쩍 뒤로 무르며 들어오는 고(靠)를 같이 왼 어깨로 들이밀어 기세를 상쇄한 뒤 다시 목괴를 앞으로 뻗어 진윤타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이도협은 이번에도 양손을 가볍게 엇걸어 목괴를 퉁기고 몸을 재차 밀어 넣어 당태세의 가슴팍에 이타 삼타의 충권을 연속으로 날렸다. 당태세 역시 몸을 슬쩍 뒤로 빼며 우수 하나로 들어오는 권세를 하나하나 파훼한 뒤 자리를 바꾸었다.

눈 깜짝할 새에 대여섯 번의 살초가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펼쳐졌지만 두 사람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였다.

실로 견정문의 수비는 빗장을 내린 성과 같아 쉽사리 파훼를 하며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가히 일절(一節)이라 불릴만한 공력이 그 안에 숨어 있었다.

진윤타는 나이를 먹었어도 결코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당태세는 어느새 천천히 몸을 돌리며 우수를 앞으로 펴 기수식을 취하며 진윤타를 바라보았다. 진윤타 역시 다시 자세를 잡은 뒤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진윤타의 눈은 붉게 충혈된 채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노인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진한 살기를 가감 없이 뿌려대고 있었다. 당태세도 아마 비슷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을 터였다. 당태세는 발을 옮겨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당태세의 몸이 정자가 있는 섬에서 벗어나 붉은 구름다리 위로 움직였다. 당태세가 뒤로 움직이며 구름다리를 타자, 진윤타 역시 구름다리 위로 올라서서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당태세의 움직임이 구름다리의 한가운데에서 멈추었다.

진윤타가 천근의 무게로 발을 내디디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며 당태세와의 거리를 줄여갔다. 당태세는 진윤타의 움직임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진윤타는 지금 견정문의 절기 팔보천괴권(八步天壞拳)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기를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모아서 적에게 강맹한 일격을 날린다. 여덟 발짝 안에서 승부를 내며 대적자는 능히 여덟 보를 막지 못하고 패한다. 일격이 필살이니 능히 천하의 강권이라.’

당태세는 예전 견정문의 권보를 빌려 읽을 때 보았던 구결을 머릿속에 띄워 보았다. 익히 자신도 알고 있는 권이고 흉내도 낼 수 있는 권이었지만 지금은 가능하지 않은 권법이었다. 오른발이 망가진 지금 상태로는 따라할 수도 없는 권법이었다.

“절름발이.”

진윤타가 당태세를 노려보며 입을 움직였다.

“이 다리 위에서 결판을 내자. 네 놈의 몸뚱어리를 내 손으로 부숴주마.”

진윤타의 언사는 다분히 노골적이고 도발을 의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태세 역시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진윤타를 보고 말하였다.

“오늘자로 견정문과 진가의 후사는 모두 끊길 것이다.”

진윤타가 당태세의 말을 듣자 이를 부드득 갈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태세! 그때 나에게는 지킬 것이 있었어! 핏덩이 같은 내 아들이 성내에 있었다. 네놈은 그것을 알면서 우리에게 순절(殉節)을 말하였지!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었더냐!”

당태세의 눈빛도 점점 사나워지더니 미소가 사라지고 이가 드러났다.

“모든 걸 버릴 각오도 없이 황성에는 왜 들어왔더냐! 달아나려거든 혼자 갈 것이지 네가 무엇인데 의리를 저버리고 나라까지 박살냈느냐. 그게 살아날 보신책이라 여긴 게지!”

진윤타는 당태세의 꾸지람에도 낯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분노한 듯 눈을 빛내며 한 발짝을 더 앞으로 내디뎠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였다. 순천문주!”

“오냐, 나도 오늘 내가 할 일을 하련다. 너도 네가 할 일을 해 봐라! 견정문주!”

당태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윤타의 발이 불쑥 당태세의 앞으로 들어가며 주먹이 움직였다.

***

“멈추어라! 신분을 밝혀라!”

북문을 지키는 시위가 손을 들고 말을 막아서는 순간, 말 위에 앉아있던 사내의 손이 품 안에서 번쩍이는 옥패를 꺼내어 시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시위가 무슨 경우 없는 일이냐는 듯 눈에 쌍심지를 돋우는데, 말 위의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내었다.

“북경 보국장군 서림각라부의 통부다! 명을 받들어라!”

순식간에 시위의 성났던 눈썹이 가지런히 제자리로 돌아오며 벌어져 있던 두 다리가 한데 모이더니 허리가 저절로 펴졌다.

“하명하십시오! 무창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무창의 견정문이 어느 곳이냐! 화급히 그곳을 가야 한다!”

“네? 견정문이라 하셨습니까?”

먼지투성이의 날카로운 콧수염 사내가 시위를 노려보았다.

“왜 그러느냐? 무창에 견정문이 없느냐?”

“있긴 있습니다요. 당연히 있는데…….”

콧수염 사내가 말없이 시위를 노려보다 시위는 말을 얼버무리다가 한 마디를 던졌다.

“지금 그곳은 며칠 전 장자(長子)가 죽어서 상중(喪中)입니다.”

“뭐야?”

먼지투성이 콧수염 사내가 멍하니 사위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성문 안쪽으로 바라보았다. 사내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앞장서라! 한 시가 급하다!”

***

일격은 소리 없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당태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시야로 확인되는 막을 수 없는 무성(無聲)의 쾌권이 당태세의 얼굴을 짓이길 기세로 밀려오자 당태세는 목괴를 들어 들어오는 권을 빗겨내었다.

권은 일격이 아닌 연격(連擊)으로 이어졌다. 화살 같은 주먹들이 당태세의 오장과 근육을 노리고 앞에서 빗발처럼 쏟아졌다. 당태세의 목괴와 오른손이 번갈아 움직이며 들어오는 권을 잇달아 쳐 내었지만 진윤타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순간, 진윤타의 발이 한 발 더 들어오며 권의 공세가 바뀌었다.

이보(二步)!

당태세의 옆구리를 향해 태산 같은 기세로 강권이 들어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르고 느린 권이었지만 한 발 한 발에 바위 같은 묵직함이 담겨 있었다.

당태세는 재빨리 몸을 틀고 목괴를 방패처럼 들어 진윤타의 기세를 돌렸다.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허리뼈가 부서지고 늑골이 박살날 것이었다.

하지만 이격, 삼격으로 이어지는 강권이 들어오자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른발에 체중을 온전히 실어 몸을 돌릴 수가 없는 상황에서 들어오는 팔보천괴권은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당태세가 한 발을 뒤로 빼는 순간, 진윤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스윽 한 발을 더 미끄러져 들어왔다.

삼보(三步)의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 강권의 태세가 일순간 바뀌며 권이 수(手)로 바뀌어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목괴로 들어오는 손발을 막아내는 당태세의 왼쪽 목을 향해 진윤타의 팔꿈치가 도끼처럼 날아왔다.

당태세 역시 팔꿈치를 들어 들어오는 진윤타의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온몸을 뒤흔드는 충격이 오른발까지 전해지며 욱씬거리는 통증을 만들어내었다.

‘뒤로 몸을 빼는 순간 죽는다!’

당태세는 팔보천괴권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몸의 중심이 뒤로 밀리는 순간 진윤타는 육칠팔보의 권격을 그대로 이어 쓰며 당태세의 몸 한 군데는 그대로 부러뜨려버릴 수 있다.

당태세의 수비를 뚫지 못한 진윤타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발을 아래로 밀어 넣었다.

순간 당태세는 깜짝 놀랐다. 진윤타의 발이 땅을 치고 진각을 밟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미끄러지며 당태세의 오른발을 부인각으로 깎아 차버린 것이었다.

“빌어먹을!”

당태세는 오른발을 들어 부인각에 맞기 전에 뒤로 발을 빼어버렸다. 삽시간에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진윤타의 몸이 낮게 들어오며 번개처럼 주먹을 당태세에게 쏘아 보냈다.

당태세는 목괴를 돌리며 들어오는 진윤타의 권을 힘겹게 받아내고 다시 중심을 잡았지만 이미 진윤타는 한 발짝을 더 들어와 오보(五步)를 밟고 있었다. 진윤타는 사보(四步)를 내기 전 발을 내뻗어 상대의 중심을 날리는 묘법을 터득한 것이었다.

이미 승세는 진윤타에게 넘어간 뒤였다. 권격에서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속절없이 밀리는 것이 상례였다. 하물며 접근전에서는 천외천의 경지를 가진 팔보천괴권이라면 더 말할 경우도 없었다.

당태세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가득 차오를 때, 진윤타는 먹이를 노리는 짐승 같은 눈빛을 띄고 있었다. 당태세의 흐트러진 중심을 향해 진윤타의 강권이 단단한 중심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그 순간, 당태세의 몸이 뒤로 그대로 넘어갔다. 마치 바람에 밀려 넘어가는 억새처럼 당태세의 몸이 뒤로 젖혀지자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던 진윤타의 권이 일촌의 간격으로 허공에 헛손질을 하였다.

진윤타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당태세의 몸이 왼쪽으로 회전하며 다시 앞으로 돌아오면서 오른손을 진윤타의 가슴팍에 박아 넣었다.

어느새 당태세는 목괴를 뒤로 돌려 몸을 받치고 다리만 땅에 닿은 채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진윤타는 그런 어정쩡한 상태로 있는 당태세를 멍하니 바라보다 뒤로 주춤 한 발을 물러섰다.

진윤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최심곤(摧心棍)의 수를…….”

“무창신룡 진언표가 적면사자 고중명을 이긴 비장의 수로다.”

진윤타의 입에서 선혈이 왈칵 솟아나왔다. 어느새 진윤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당태세는 그 모습을 보더니 차갑게 내뱉었다.

“명부에 가거든 무창신룡에게 사죄하여라. 네놈의 죄과가 모든 것을 망쳤다고 말이다.”

순간, 당태세는 입을 다물었다. 입에서 선혈을 쏟아대던 진윤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견정문의 문주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선혈을 토해내며 구름다리의 난간에 고개를 기대었다. 채 감지 못한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노인의 몸에서 피와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왔다. 당태세는 말없이 옛 원수를 보고 있었다. 그가 다리 위 난간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그칠 때까지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짧은 한숨이 목발을 든 노인에게서 흘러나왔다.

***

“문을 열어라! 북경 보국장군의 어명이다!”

견정문의 앞에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군마 두 필이 흙바람과 함께 멈춰 섰다.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 뛰어내린 먼지투성이의 사내가 통부를 들이밀자 견정문의 문도는 고개를 저으며 출입을 거절했다.

“아무도 후원에 들이지 말라는 문주님의 명이 있었소이다.”

“혹시, 이 안으로 절름발이 노인이 들어갔느냐?”

문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어갔다 나왔는데…… 대체 그것을 어찌 아시오?”

“비켜라!”

순간, 먼지투성이 관인과 수문장이 같이 문을 열고 뛰어들자, 멍하니 그들을 보고 있던 문도들 역시 몽둥이를 짊어진 채 그들을 뒤따랐다.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웅성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더니 다시 먼지투성이의 관인과 수문장, 그리고 눈물콧물 뒤범벅이 된 견정문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관모를 위로 젖힌 먼지투성이 사내가 뒤를 쳐다 보며 외쳤다.

“그 절름발이와 수레는 언제쯤 떠났느냐!”

“하… 한 식경은 족히 지났습니다.”

구이도 종리세리는 남쪽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빌어먹을!”

사내는 무더운 하늘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욕을 토해내었다. 숨 막히는 열기가 그제야 사내의 온몸을 휩싸기 시작했다. 견정문 거택의 언덕 아래로 동서로 오가는 배들의 자취가 개미떼처럼 보이고 있었다.

***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오시니 기분이 나으십니까?”

“아무래도 훨씬 낫구나.”

뭍과 달리 강 위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의 더위와 근심을 씻어내 주고 있었다. 당태세와 아룡이 탄 배는 수레를 실은 채 바람을 타고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 서쪽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거대한 호수, 홍택호가 나오고 그 옆에 큰 도읍, 장사(長沙)가 모습을 내밀 터였다. 아룡은 기분이 한껏 좋아졌는지 뒤로 멀어지는 무창을 바라보더니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무창이 머물 때는 별 감흥이 없던 곳 같았는데 멀리서 보니 좀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곳이긴 합니다. 나중에 시간 되면 한 번 더 들러보고 싶네요.”

“장사를 들리고 소항으로 바로 안 가고 말이냐?”

“아니지요! 지금 말고 다음에 말입니다. 아직 젊은데 평생 잊고 살겠습니까? 세월이 가더라도 풍광은 머릿속에 남겠지요. 다음에 와서 한 번 더 보면 기억이 새롭지 않겠습니까?”

당태세는 아룡의 말을 듣고 씩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렇게 되겠지.”

“그럼요! 저는 아직 젊으니까 다시 한 번 와 볼 거라고요!”

아룡은 호기 있게 말을 남기고는 왁자지껄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슬쩍 걸음을 옮겨 재미있는 일이 있는지 구경을 하러 갔다.

넓은 대선의 안에 홀로 남겨진 당태세는 아룡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품 안에서 붉게 물든 첩지를 슬쩍 꺼내보았다.

진윤타가 품 안에 가지고 있던 증서는 구봉방과 충룡방이 가지고 있던 문서와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종이를 품에 넣고 흐르는 강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이 가도 잊을 수 없는 것이 풍광뿐이랴.”

당태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이는데 배는 노인의 혼잣말과 함께 바람을 타고 천천히 물위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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