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호광 무창(19)
그때, 적면사자의 뒤에 서 있던 갈색조끼의 중년인이 불쑥 적면사자와 당태세의 사이로 파고 들었다.
갈색조끼의 사내는 홀연히 나타나 두 사내를 쓰러트린 당태세의 무위에도 별다른 감흥을 받지 않은 듯 게슴츠레한 눈을 위로 흘기며 당태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당태세 역시 적면사자보다는 그의 뒤에 있던 중년인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단단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사내의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쨍쨍하고 맑았다. 그를 바라보던 당태세는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만 중년인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당태세를 바라보던 중년인은 짜증난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물음을 던졌다.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노인.”
“네 놈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구나.”
당태세의 말에 슬쩍 중년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를 바라보던 적면사자가 피식 웃으면서 중년인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던졌다.
“사부, 저런 늙은이의 말에 격동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찌어찌 사람을 흔들어서 심란하게 아려는 얕은 수 같은데 그런 게 통할 리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겝니다.”
“닥쳐라 적면사자. 저 분은 그런 소인배가 아니다.”
곤을 한 손을 들고 서 있던 무창신룡 진언표가 적면사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것, 우리 둘이 검결로 승부를 짓자. 내가 죽으면 내 목숨으로 이 일을 끝낼 것이나 만의 하나 네가 진다면 너는 이곳의 창고를 열고 근신하거라.”
“허, 제법 통이 큰 협객노릇을 하는구나. 너는 구세안민의 화신이 되고 나는 탐욕의 주구가 되라 이것이냐?”
“싫으냐?”
적면사자는 슬쩍 뒤춤으로 손을 돌리더니 번개처럼 다시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적면사자의 양손에는 새하얗게 번쩍이는 쇠갈퀴 두 자루가 각각 끼워져 있는데 세 가닥 짧은 칼날 같은 철조(鐵爪)가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니 실로 사자의 발톱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나 역시 무인이니 이곳에서 내 명을 걸어주마. 덤벼라 무창신룡, 오늘에야 두 약방의 기나긴 분쟁에 종지부를 찍는 거다!”
“오냐, 네놈도 사내로구나!”
두 사람이 곤과 철조를 뽑아들고 서로를 쳐다보며 상대편을 향해 기수식을 잡는데, 그 자세가 당당하고 절도가 넘쳤다.
그와 더불어 목숨을 내놓고 대결하는 청년들의 기세에서 엄청난 박력과 긴장감이 감도니, 좌중에 모여 있던 상인들은 모두가 일순간 말을 잃고 조용히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갈색조끼의 중년인은 슬쩍 적면사자를 말리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당태세의 목소리가 중년인의 뒤에서 짧게 울렸다.
“그만두어라. 무영쌍륜(無影雙輪). 저건 젊은이들의 싸움이다.”
처음으로, 무표정하던 중년인의 뺨이 씰룩대더니 목발 짚은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년인의 미심쩍은 눈동자를 지켜보던 당태세는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형문 십대제자. 무영쌍륜 은곽. 네놈은 젊을 때보다 얼굴이 훨씬 나아졌구나.”
“늙은이, 네놈은 누구이기에 나를 알고 있느냐. 정체를 밝혀라.”
당태세는 대답 대신 목발을 짚고는 창고를 향해 등을 돌렸다. 당태세의 목소리가 갈색조끼의 중년인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등을 지고도 목소리가 또랑또랑 귓속에 울려 퍼지는 걸 알게 된 중년인은 그제야 노인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곳은 젊은이들의 장이니,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승부를 보세.”
당태세는 이젠 얼이 빠질 대로 빠져 있는 고영약당의 창고지기를 보며 말했다.
“잠시 문 좀 열어주게. 내가 저 사부라는 작자와 나눌 말이 있다.”
무영쌍륜 은곽이라고 불린 중년인은 창고지기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지기 둘이 문을 막아놓았던 나무판 하나를 뜯어놓자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통로가 생겼다.
당태세가 목발을 짚고 어두운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 무영쌍륜 은곽 역시 뒷짐을 지고 그 안으로 몸을 옮겼다. 창고 안은 사방천지에서 풍겨오는 각종 약재들의 냄새가 코를 찌를 지경이었는데 한일자로 똑바로 나 있는 햇살의 자취를 통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당태세의 등이 또렷하게 보였다.
“승부를 나누기 전에 네 정체를 밝혀라. 너는 누구냐. 나와 만난 적이 있었는가.”
“당연히 너와 만났던 적이 있지. 네놈 뿐 아니라 사형문도 꽤 많이 방문을 했더랬지.”
“나에게는 네놈을 서안에서 만났던 기억이 없다.”
앞장서 가던 당태세가 발걸음을 멈췄다. 두 사내는 한줄기로 길게 들어온 햇살이 만들어낸 복도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영쌍륜 은곽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목발 짚은 노인의 체구가 갑자기 커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안이 아니라 황도에서 너를 보았다. 기억나느냐.”
“무엇이?”
“내 문파는 순천문, 내 이름은 당태세.”
순간 아무런 감흥이 없어보이던 은곽이 헛하며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앞에서 햇살을 받고 서 있던 당태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보국구대문파맹주 귀린갈 당태세가 사형문의 무영쌍륜에게 일합을 청하노라.”
“무슨…… 무슨 소리냐. 순천문주는 이미 십… 오년 전에 돌아가셨느니라.”
순간, 은곽은 그를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등 뒤로 소름이 좍 돋는 것을 느꼈다. 음산하게 이어지는 노인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귀신이라 다를 바가 없었다.
“십칠 년 전이다. 그리고 난 살아서 돌아왔느니라. 지옥에서 네놈들을 잡으려고.”
“맙소사!”
은곽의 두 손이 번개처럼 허리춤으로 돌아가더니만 커다란 두 개의 원을 꺼내들고 양손에 거머쥐었다. 무영쌍륜이라는 별호를 내려주었던 은곽의 절기, 건곤권(乾坤圈)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당태세가 낮게 웃으며 저벅저벅 앞으로 목발을 짚으며 걸어왔다.
“네놈의 건곤권이 얼마나 완성되었는지 확인해 볼까.”
“수… 순천문주가 맞으십니까?”
“무정금 유독중이 정정하게 살아있다지? 그런데 내가 살아서 안 될 일이 무엇이냐?”
“빌어먹을…….”
은곽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한 듯싶었다.
두 자루 날이 선 원반을 두 손에 쥔 사내는 무릎을 굽히고 건곤권 하나는 명치 앞에, 하나는 눈앞으로 뻗으며 당태세를 마주보았다.
당태세 역시 자신의 목괴를 두 손으로 쥐고 은곽을 바라보았다.
“초영검 성낙신에게 들었다. 사형문은 사방에 문도들을 보내고 있다지? 다른 팔대문파에도 손님들을 보냈느냐?”
“말할 수 없소이다. 문주께서 초영검을 없앤 것이오?”
“나 아니면 누구겠느냐?”
당태세의 하얀 이가 햇살을 받아 드러나는데, 은곽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천천히 다가오는 당태세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다시 당태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형문의 빌어먹을 십대제자들은 모두 잘 먹고 잘 살고 있느냐?”
“말할 수 없소이다.”
“너희들 모두가 나에게 칼을 들이댔던 놈들이렷다?”
“말할 수 없소이다!”
“그래, 말하지 말아라. 들을 때는 지났도다.”
당태세의 눈이 번득이며 은곽을 노려보았다. 은곽 역시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권과 목괴가 천천히 움직이며 상대방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며 몸의 간격이 조금씩 좁혀졌다. 은곽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태세의 매서운 눈초리가 은곽을 찢어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그때, 창고의 바깥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적면사자와 무창신룡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창고의 안에서도 두 사내가 서로의 무기를 들고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햇살을 뒤에서 받은 은곽의 건곤권이 마치 달과 태양이 떨어지듯 빛나며 당태세의 머리와 가슴을 향해 날카롭게 쏟아졌다.
당태세의 목괴가 들어오는 괴를 받아치고 옆에서 들어오는 또 다른 달덩이를 슬쩍 피하며 목괴를 뻗어 은곽의 허벅지를 찍어 눌렀다. 하지만 은곽은 들어오는 당태세의 공격을 그대로 받으며 건곤권을 그대로 앞으로 뻗어 올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은곽의 허벅지에 괴가 찍혔지만 그와 동시에 건곤권이 당태세의 목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왔다.
당태세는 인상을 쓰며 겨우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에서 허공을 베어내는 건곤권을 노려보았다. 한 치만 더 깊게 들어왔더라면 당태세의 왼쪽 눈은 영영 앞을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은광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대로 앞으로 들어오며 다시 건곤권을 휘둘렀다. 일순간 공수가 전환되며 당태세가 수세로 몰렸다.
현란하게 빛나며 소용돌이치는 건곤권이 빛을 받은 채 어둠속으로 몸을 감춘 당태세의 몸을 향해 떨어졌다. 당태세가 몸을 피하여 땅을 괴로 찍으며 빙글 돌리자 은곽의 일월권이 창고의 짐을 상하로 찢어발겼다.
포장해둔 짐과 밧줄이 끊어지며 약재들이 우르르 땅바닥에 쏟아졌다. 당태세는 재빨리 괴로 땅을 찍으며 몸을 낮추고 사각(死角)을 찾았다. 하지만 은곽은 마치 고삐 풀린 소처럼 날뛰며 주변의 모든 것을 휘감고 찢어발겼다.
‘무공을 배울 만큼 배운 놈이 어째 하오문의 신출내기처럼 싸우는 것인가?’
당태세는 슬쩍 인상을 쓰면서 들어오는 은곽의 건곤권을 받아내면서 상대의 초식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맨 처음 당태세의 목괴에 찍혔던 허벅지가 문제가 되는 듯 보였다. 속전속결로 검결을 해결했다는 심리가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초식들이었다.
‘보행에 문제가 생긴 건가.’
눈앞에서 현란하게 펼쳐지며 들어오는 두 자루 건곤권의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당태세의 머릿속은 냉정하게 은곽의 보법과 초식을 살피는 중이었다.
‘실초인가 허초인가. 나를 꾀어내려는 수작인가 아니면 부상인가.’
당태세는 목괴를 뻗어 들어오는 건곤권을 막아내고 다시 어둠속에서 목괴를 거꾸로 잡고 빛살 아래 서 있는 은곽의 목을 걸어버리기 위해 목괴를 뻗었다.
하지만 은곽은 재빨리 건곤권을 휘둘러 목괴를 걷어차고 다른 손에 잡힌 건곤권을 휘둘러 당태세의 손목을 자르려 시도했다. 실로 번개 같은 출수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당태세의 손목은 잘려나가 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태세는 그 모습 보고 눈을 번득였다.
‘마구잡이 공격을 내는 것이 아니다.’
당태세는 재빨리 목괴를 거둬들여 비틀대며 꼬이는 발걸음을 보조하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를 바라보던 은곽이 다시 두 자루 건곤권을 들고 창고의 어둠속으로 숨은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문주. 숨지 말고 나오시오.”
“숨다니, 그 무슨 소리인가.”
말을 마치는 것과 함께 목괴로 땅을 찍고 도약한 당태세가 굴에서 튀어나온 범과같이 은곽을 향해 환한 햇살 속으로 뛰어들었다.
당태세는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오는 흰 빛살을 가볍게 피하고 다시 목괴로 땅을 찍은 뒤 몸을 뱀처럼 틀면서 은곽의 옆으로 돌아가며 목괴를 위로 찍어 올렸다.
턱을 부술 것 같은 당태세의 강맹한 일격이 목괴를 통해 올라가는데, 은곽은 거칠게 몸을 돌리며 오른손의 건곤권으로 목괴를 막아내고 회전하는 몸의 서슬을 타고 왼손의 건곤권을 그대로 한 바퀴 돌려 당태세의 허리를 베어 들어갔다.
순간,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은곽의 건곤권이 당태세의 옆구리에서 튕겨나갔고, 당황하는 은곽의 표정을 아래에서 보던 당태세의 눈이 빛나며 오른손이 번개처럼 은곽의 갈빗대를 후려치며 뒤로 빠져나갔다.
갈색 조끼가 갈갈이 찢어지며 빛살 아래 허공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은곽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당태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당태세가 그런 중년인을 바라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그 나이에 새로운 외문(外問)을 익혔다는 이야기지?”
어느새 당태세의 오른 손에는 새하얗게 빛을 뿌려대는 단도가 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