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호광 무창(18)
“오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시장의 십자로를 지키던 늙은 짐꾼 하나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혀로 입술을 축이며 눈을 껌벅였다.
수천까지는 안 되어도 기백은 되어 보이는 인파가 시장을 종횡하며 한쪽으로 밀려가는데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문을 열라 창고를 열라 외치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손에 몽둥이나 횃불 같은 것을 든 것도 아니고 그저 터덜터덜 무리를 지어서 동쪽으로 가는 것인데도 눈동자들은 하나같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곳이 고영약당의 약재창일세!”
선두에 서 있던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그 곳에는 커다란 건물 하나가 부두 근처에 연이어 놓여 있었는데 들어오는 입구를 제외하고 양쪽이 높은 벽으로 막혀 있어 사방이 트인 진가약실의 창고와는 다른 모양새였다.
아예 적당의 침입을 방지하고 만들어 놓은 요새와도 같은 느낌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는 고영약당의 일꾼들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자신의 앞으로 밀려드는 시장의 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고영약당 앞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몸으로 막으며 일꾼들을 향해 눈썹을 치켜 올리는 중이었다.
“창고 문을 열어라!”
“무슨 소리냐! 갑자기 몰려와서 무슨 행패들이냐!”
“진가약실이 죄를 자백하였다! 네놈들, 서로 배 맞추고 약재 값을 올렸다지? 대체 얼마나 해 먹은 게냐!”
“그게 무슨 소리인지 난 모른다! 나는 창고를 지킬 뿐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문을 열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가 화적이냐!”
고영약당의 창고지기는 사람들의 힐난에도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이면서도 자신의 본분은 잊지 않았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런 사내의 말투는 모여드는 사람들의 공분만 사게 만들 뿐이었다.
원래 사람 혼자서 대화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만한 말들도 여럿이 같이 들으면 확 심지에 불티가 옮겨 붙는 법인지라 창고지기가 제 딴에는 고결하게 한 말에 앞에 있던 시장 상인들은 격분하고 말았다.
“우리가 화적이라고! 이 견자 놈아! 내가 네 아비다!”
“창고 문 열라고! 이 놈은 진가약실보다 더한 도둑일세!”
“애초에 고영약당이 분탕질을 쳐서 무창 약재상이 이 꼴이 난 것이다! 저 놈들이 원흉이야!”
“창고 문을 못 열겠으면 거기서 나와! 다 태워버릴 테다!”
창고지기는 해쓱한 얼굴에 애써 위엄을 갖추고 사람들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이 놈들! 이곳을 지키는 혈선도인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 네놈들을 모두 치죄하실 것이다! 목숨이 몇 개라도 된단 말이냐! 이놈들아!”
“혈선도인 아까 죽었다!”
“뭐?”
창고지기가 입이 떡 벌어지는데 이제는 사람들에게 협박까지 한지라 듣고 있던 상인들의 분노는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거세지기 시작했다.
“네놈은 무사할 것 같으냐? 창고문 안 열면 네놈도 죽을 테다!”
“아니, 뭘 기다리나? 저 놈부터 끌어내고 문을 엽시다!”
삽시간에 사람들에게 불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창고지기는 이제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눈동자만을 이리저리 굴리며 창고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유려한 몸동작으로 하늘에서 몸을 뒤집어 고영약당의 창고 앞을 단신으로 막아섰다.
다름 아닌 무창신룡 진언표였다.
“형들이여. 누이들이여! 진정해주시오! 이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이다! 여기 있는 이들도 같은 시장식구들 아니오!”
진언표의 호통이 떨어지자 지금이라도 불을 창고 지붕에 던져버릴 것 같던 사내들이 숨을 고르고 창고 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진언표는 슬쩍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뒤에 요새처럼 우뚝 서 있는 고영약당의 창고를 노려보더니만 그 아래 죄인처럼 서 있는 창고의 일꾼들과 앞에서 씩씩대며 상인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여러분, 고영약당과 진가약실이 서로 협잡한 죄는 크지만 우리가 이 창고를 불태울 수는 없소이다. 그랬다간 상도(商道)를 알지 못하는 청인들이 군사를 풀어 애꿎은 우리만 상하게 될 것이오. 그리되면 오히려 우리만 죄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그러면 어쩌잔 말인가. 무창신룡?”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진언표 역시 진가약실의 사람이고 그들의 이문을 챙겨간 견정문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시장 상인들을 진언표를 그들과 동류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진언표는 시장상인들을 보며 예의 시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냥 놔두십시오. 그래도 변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 창고 문을 열러 온 것이 아니라 이들을 보호하러 온 것일 뿐입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차피 우리는 조금 전 진가약실의 약재를 그냥 시장에 풀었습니다. 모두가 쓸 만큼 넉넉한 것은 되지 못할지언정 사람들이 여유를 가지고 쓸 정도가 된다면 굳이 비싼 고영약당의 약재를 쓸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우리가 약재를 이미 넉넉히 쓸 수 있다면 고영약당이 값을 올린다 한들 무용지물이고, 가격은 지금보다 내린다 하여도 이문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리되면 결국 고영약당도 스스로 문을 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모여 있던 이들이 진언표의 말에 모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간단하면서도 과격한 방법이었다.
이리되면 두 약방은 모두 타격을 받게 될 것이 자명하였지만 진언표에게는 이미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일이었다.
시장 상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진언표를 우러러보았다.
진언표가 무슨 연유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있는 이는 하나도 없었으나, 그가 결심한 바가 쉽지 않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견정문의 소문주의 위치를 버리고, 조금 전 아버지와 의절까지 하는 모습을 모두가 보지 않았던가.
“무창신룡이 그리 말하시면 우리는 따를 것이오!”
“그럽시다! 그리 합시다!”
“참으로 오늘 시원한 날이구먼! 살다 살다 이리 쾌한 날도 오는구나!”
모여있던 사람들의 표정에서 시나브로 분노가 사라지고 만족감과 경탄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유해지는 것과 함께 진언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감복하는 것을 넘어서 경탄과 경외의 표정이 드러났다.
심지어는 뒤에 서 있던 고영약당의 창고지기조차 진언표의 말에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서 삿된 말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상도를 어지럽히려 하는가. 소문주!”
쩌렁쩌렁 땅을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신형이 창고의 뒤쪽에서 울려 퍼졌다.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고의 옆 높은 벽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비단장포를 차려 입은 네댓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건장하면서도 살기가 흐르는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맨 앞에 서 있는 이는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는 검은 비단장포에 붉은 수를 놓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사내는 창고 옆의 계단을 타고 벽을 내려와 진언표의 앞에 뒷짐을 지고 다리를 벌린 채 우뚝 멈춰 섰다.
다름 아닌 적면사자(赤面獅子)였다.
“저 위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소롭기 짝이 없군.”
적면사자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지으며 진언표를 바라보았다.
“네 놈이 지금 하는 일이 바로 교언영색(巧言令色)아니냐? 태어날 때부터 유복하게 자라나 다른 이들과 다르게 자라고 교육받으며 살다가 지금 와서 뭔가 깨달음을 얻은 척하며 사람들을 이리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 무엇이냐?”
진언표가 적면사자를 노려보며 말하였다.
“내가 자라고 배운 것에 부족함이 없어 내가 누린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고치려 함이 잘못 되었다 말하는 것인가?”
“네 잘못을 깨달았으면 조용히 산 위에 올라 암자에서 면벽하고 도나 닦을 일이지. 어찌하여 멀쩡한 무창의 성시를 뒤집어 놓느냐? 네놈의 치기어린 행동으로 수많은 이들이 피해를 보며, 지금 당장은 속 시원한 일일지 모르나 조금 뒤 큰 환란으로 다가올 것임은 알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죄과를 그대로 두며 간직하여, 가문의 비리와 토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란 말이냐?”
“그랬으면 소인배 소리는 들었을지언정 이런 일까지 벌어지진 않았겠지.”
적면사자는 말을 끊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성시의 상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들어라! 나는 고영약장의 소가주 고중명이다. 고영약당 고중명은 몰라도 적면사자 고중명은 들어 봤으리라! 이 자리에서 당장 떠나고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라!”
적면사자가 사나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노려보며 다시 소리 질렀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팔기의 순무(巡撫)가 창검을 들고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되는 것을 원하느냐!
사람들이 팔기라는 소리를 듣자 움찔대며 서로의 눈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적면사자는 진언표를 바라보며 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디 갈 곳도 모르는 양들을 끌고 온 양치기 주제에 천군만마를 거느린 장수흉내를 내느냐. 내 진가약실에 가서 오늘의 손해는 톡톡하게 값을 돌려받겠다.”
진언표 역시 지지 않고 적면사자 고중명을 노려보았다.
“나는 이미 진 씨의 인연을 끊었다. 네놈이 받아갈 수 있는 것은 고작 내 목숨 하나뿐일 것이다.”
“호, 아쉽지만 그거라도 받아야지. 네 녀석은 그동안 목구멍 안의 가시였으니.”
적면사자가 짧게 턱짓으로 시늉을 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붉은 저고리를 입은 사내 둘이 자기 팔뚝만큼 굵은 박도(朴刀)를 손에 쥐더니 천천히 진언표를 향해 다가섰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일제히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누구 하나 고영약당의 창고 앞으로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적면사자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실속 없기로는 제일이 진가약실의 진낭자로구나. 오늘 그 계집 같은 목이 잘려서 시장 한복판에 장대 높이 달릴 것이다!”
“천만에, 오늘은 네 흉측한 얼굴이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는 날이 될 것이다!”
진언표가 말을 내뱉자 지금까지 적면사자의 뒤에서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갈색조끼를 입은 중년사내가 불쑥 한 발을 내디뎠다.
마치 돌을 대충 찍어서 눈코입과 주름을 새긴 듯한 투박하고 거칠어 보이는 사내였다. 적면사자가 슬쩍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웃어보였다.
“사부께서는 뒤에서 저와 제자들의 공부를 견식 하십시오. 어찌 닭을 잡는데 소의 칼을 쓰겠습니까?”
그와 함께 적면사자의 눈이 일순간 번득이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박도를 둔 두 사내에게 명을 내렸다.
“쳐라!”
그때였다. 갑자기 소리도 없이 창고의 뒤에서 나타난 한 줄기 그림자가 딱하고 바닥을 치는 것 같더니만 박도를 든 두 사내의 가운데로 뛰어들어 왔다.
외형을 분간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바람소리와 함께 회초리인지 막대기인지 알 수도 없는 것이 두 사내의 가운데에서 휘몰아치는가 싶더니만 이내 두 사내의 신음이 울려 퍼지며 각자가 가슴과 머리를 쥐고는 그대로 앞뒤로 고꾸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둘이 쓰러지며 일으킨 흙먼지 사이로 흐릿하던 형상이 점차 또렷하게 모습을 갖추는데 먼지 사이로 적면사자를 바라보는 형형한 눈빛에는 오만함과 자존심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쓰레기들로 무창의 용을 낚겠다니, 꿈이 참 허황되구나.”
다름 아닌 귀린갈 당태세였다.
그의 모습을 보던 무창신룡 진언표의 입에 자기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가 씨익 올라왔다. 마치 사람 많은 골목에서 미아가 되었다가 아비를 만난 아들과 같은 표정이었다.
“노야! 어쩌다가 지금에서야 오셨습니까?”
“사자가 노는 꼴을 구경하느라 늦었다.”
당태세의 입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구경은 그만하고 슬슬 사냥이나 해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