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호광 무창(17)
고함을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고영약당에서 보내온 사람들의 우두머리였다.
앞머리는 변발을 한 것인지 원래 벗겨진 것인지 반질반질 하기 그지없었고 귀 아래로 덥수룩한 터럭이 자라나 있어 우락부락한 인상을 더 험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내는 얼굴만큼이나 울퉁불퉁한 두 팔에 커다란 선장(禪杖)을 끼고 있었으니 전직(前職)이 승려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들고 있는 선장에 비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칠고 포악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누구에게 손해를 끼치려고 갑자기 창고를 허무느냐? 네가 창고를 헐게 되면 우리 고영약당의 물건들은 그야말로 헐값이 되는데, 이 짓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고육지책을 써서 두 약당을 모두 망하게 하려는 속셈이렷다?”
“네가 고영약당의 창고지기 혈선도인(血禪道人)이로구나.”
“첫 눈에 나를 알아보다니 그래도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니구나. 무창신룡! 그래! 내가 바로 그 혈선도인이시다!”
진언표는 득의양양한 그의 표정을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짓고 그를 향해 답하였다.
“이 문제는 우리 진가약실의 문제이다. 그동안 상인들과 의자들을 노략질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문이로다. 이것을 돌려준다는 데 그것에 고영약당이 무슨 상관인가?”
“왜 상관이 없는가! 호협에 눈이 먼 네 놈 덕에 우리도 덩달아 파산하란 말이더냐!”
그때였다. 누가 누군지 보이지 않게 빽빽하던 사람들 사이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영약당 놈들아! 네놈들이 약재를 더 비싸게 팔아 처먹고 왜 여기 와서 행패야!”
“그래! 당장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퉁방울 같은 눈을 부라리던 혈선도인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시끄럽다! 하찮은 쥐새끼 같은 것들아! 지금 나는 진가약실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혈선도인은 다시 진언표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거칠게 말하기 시작했다.
“좋은 말을 할 때 창고 문을 닫아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힘으로 닫겠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선장과 곤이 부딪히며 불꽃을 튀겨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될 것인지 사태를 예견한 당태세는 재빨리 아룡에게 먼저 선수를 쳤다.
“무두리, 나는 남평수에게 가서 침이나 맞아야겠다. 너도 여기 있지 마라! 아무래도 한바탕 싸움질을 할 것 같다.”
“멀찍이 서서 구경이라도 하고 가겠습니다. 숙부님은 어서 가시고요!”
“어허, 네가 이런데서 저런 아이들 싸움이나 구경할 위인이냐? 자고로 군자는 선한 것과 좋은 것을 보고 듣는다 하였다. 어서 강변의 누각이나 올라가서 호연지기나 품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귀 얇은 아룡은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만 또 그런 것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나을까요? 하긴 싸움질을 본다고 뭐가 남는 게 아니겠지요?”
“너는 마음이 선량하니 안면 있는 진언표가 싸우는 걸 보면 분명 도와주겠다고 들어갈 것이다. 그랬다가는 큰일이 나는 게야! 어서 자리를 옮기거라!”
아룡이 눈을 껌벅이더니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태세와 함께 슬쩍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무렴! 이런 일에 휘말리면 나만 손해지! 숙부님은 잘 다녀오십시오!”
아룡이 등을 돌리고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갑자기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혈선도인의 선장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자 진언표의 곤이 튀어 오르는 잉어처럼 올라오며 선장을 받아쳤다.
순식간에 창고 앞에서 검결이 벌어지고 고영약당의 무리가 몽둥이를 들고 덤벼대자 물건을 꺼내던 진가약실의 창고지기들도 일제히 몽둥이를 들고 맞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물결이 사방으로 퍼지며 가운데 커다란 원을 만드니 인파가 출렁대며 다시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당태세조차 밀려나는 사람들 덕분에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할 정도였다.
“젠장, 너무 일찍 시작된 거 아닌가!”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던 아룡도 다시 고개를 돌리고 멍하니 창고 앞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상황이라면 들어가서 저들을 도와주기도 뭐한 처지였다.
아닌 게 아니라 당태세는 사람의 벽에 둘러싸여 지금 당장 들어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당태세는 슬쩍 주위를 돌아보고는 뭔가 결심한 듯 인파를 헤치고 뒤로 빠져 상가의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향해 목괴를 내뻗었다.
“죽어라!”
혈선도인의 선장이 상하로 움직이며 진언표의 목곤을 휘몰아쳤다. 혈선도인은 풍채에 맞먹는 무식한 완력과 그 힘을 보충하는 정묘함도 겸비한 고수였다.
양쪽에 삽과 날이 달린 선장은 베어지지 않는다 해도 잘못 맞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뼈가 부러질 물건이었다. 하지만 진언표는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은 채 곤을 돌리며 맹렬하게 들어오는 선장의 공격을 죄다 퉁겨내고 있었다.
게다가 접전의 와중에도 진언표는 한줄기 미소를 입에서 잃지 않은 채 혈선도인의 공격을 받아내는 중이었으니, 앞뒤 상황을 모르는 이가 이 모습을 봤다면 과격한 대련을 하는 것으로 보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놈이 날 놀리는 겐가!”
혈선도인이 벌컥 화를 내며 선장을 가일층 빠르게 움직였다. 진언표의 곤 역시 속도를 맞춰 같은 빠르기로 좌우가 돌아가며 공방을 펼쳐냈다.
순간 두 사람의 사이로 일진광풍이 불며 사방으로 바람과 먼지를 쏘아대는데, 그 광경이 거칠면서도 웅장하니 사람들은 자욱한 먼지 속에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들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고사(古史)의 영웅담이 족자에서 튀어나와 현실에 떨어진 것 같았으니, 어느새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진언표를 응원하고 있었다.
“때려눕혀, 소공자!”
“무창신룡! 고영약당을 물리치시게!”
“장관이다! 장관이야!”
한 차례 강맹한 공격으로 진언표의 공세를 무마시킨 혈선도인이 선장을 고쳐 잡고 견정문의 청년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사내의 숨소리는 거칠어져 있었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중이었다. 그의 뒤에서는 여전히 진언표를 응원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혈선도인이 일그러진 얼굴로 좌중을 돌아보다가 진언표를 향해 선장의 날을 뻗으며 이를 뿌드득 갈아댔다.
“네 놈이 한 줌도 안 되는 무지렁이들의 찬사에 헛바람이 들어간 게지! 나중에 분명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다.”
혈선도인의 말을 들은 진언표가 다시 곤을 바로 세우며 그의 앞에 있는 장한을 노려보았다.
“오직 협객은 등 뒤에 백성을 두고 그 힘으로 일어서니, 그것이 어찌 무지렁이의 찬사인가.”
“허! 협객! 네놈은 견정문의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술을 먹는 소공자에 불과하다!”
“나는 이제 견정문의 사람이 아니다.”
“뭐라?”
“나는 애오라지 곤을 든 무인일 뿐, 승패 뒤의 일은 하늘이 알아서 정하실 것이다!”
“헛소리!”
혈선도인이 선장을 그대로 앞으로 뻗으며 진언표의 중심을 찔렀다.
진언표의 곤은 휘장을 치듯 옆으로 움직이며 선장을 빗겨내고 그대로 땅과 하늘이 바뀌며 혈선도인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순간적인 움직임에 허를 찔린 혈선도인이 비틀거리며 발을 내디뎠다.
진언표의 눈이 번득이며 빈틈을 노리고 곤을 뻗어 혈선도인의 머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그 순간 혈선도인의 빛나는 머리가 거북처럼 아래로 쑥 내려가며 진언표의 곤을 피하였다.
그와 함께 혈선도인의 선장이 땅을 스치듯 날면서 진언표의 옆구리를 찍어 눌렀다. 진언표는 재빨리 곤을 내리며 들어오는 선장을 막아내었지만 쾅하는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뜨며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땀이 진득한 혈선도인의 얼굴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승기(勝氣)를 거머쥐었다는 표정이었다.
비틀대며 겨우 땅에 착지한 진언표를 머리를 향해 혈선도인의 삽이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앞에 서 있던 여인의 입에서 꺄악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진언표의 곤이 땅을 찍으며 배를 젓는 삿대처럼 땅을 밀어버렸다. 그 서슬에 진언표의 몸이 마치 낚시에 꿰인 미끼처럼 뒤로 껑충 튀겨나갔고, 혈선도인의 삽은 무지막지한 소리를 내며 나무 바닥을 찍으며 땅에 박혀 버렸다.
혈선도인의 안색이 삽시간에 바뀌는 순간, 소리 없이 바람을 뚫고 나타난 진언표의 곤이 정확하게 혈선도인의 태양혈을 후려치며 옆으로 빠져나갔다.
진언표는 한손으로 곤을 들어 옆으로 뻗은 채 바로 옆에 붙어 있던 혈선도인을 향해 속삭이듯 말하였다.
“어찌 기격(奇擊)을 자기 혼자 쓸 수 있다 믿으신 게요? 나도 무인이라 하지 않았는가.”
“허, 말도 안….”
혈선도인의 코에서 주르륵 피가 흐르더니만 사내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며 그대로 눈이 감겼다. 땅에 박힌 선장을 잡고 있던 혈선도인의 몸이 맥없이 앞으로 쓰러지는 것을 본 성시의 상인들과 구경꾼들은 일제히 다시 광기에 찬 환호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무창신룡이 이겼다!”
“진언표의 승리다!”
“고영약당이 진 것이다!”
사람들이 부글부글 끓는 물처럼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고영약당의 패거리들은 쓰러진 자를 제외하고 모두 몽둥이를 내던지고 동쪽으로 도망치는데, 그 모습을 보던 백성들은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놓았다.
“애초에 저놈들이 이 사달의 근원이다! 저놈들을 치죄하자!”
“옳은 말이다! 왜 진가약실만 창고를 내 놓는가! 저들 창고도 열어야지!”
“맞는 말일세! 왜 더 흉포한 놈들은 배불리 먹고 그나마 나은 놈이 다 뒤집어쓰는가!”
인파는 진가약실 앞에서 조금씩 조금씩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않은 변수에 진언표와 진가약실의 사내들이 상인들과 백성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흥분한 사람들 사이에 불씨를 집어던졌다.
“어서 고영약당으로 가세! 그곳의 창고도 열어젖히고 물산을 나누세! 어찌 한 쪽만 이런 일을 부담하는가! 무창신룡의 말처럼 다시 이문을 공평하게 나눠야지!”
“그렇지! 공평하게 나눠야지!”
“고영약당으로 간다!”
“창고로 간다!”
어느새 오합지졸이던 사람들의 오와 열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눈을 번득이기 시작했다. 갈 길을 모르던 이들이 행선지가 생기자 목적이 생기고 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를 바라보던 진언표는 말없이 곤을 잡고 그들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그를 바라보던 창고지기 접장이 걱정스러운 듯 뒤에서 말을 걸었다.
“진대협, 우리가 같이 합세할까요?”
“아닙니다. 대형은 이곳에서 약재를 백성들에게 나눠주시면 됩니다.”
“혼자서 어찌 고영약당의 세를 감당하려 하십니까? 지금 여기 쓰러진 두령이 있다지만 고영약당을 지키는 이는 비단 이 자 뿐이 아닙니다.”
진언표를 웃음을 지으며 접장을 바라보더니 곤을 들어 자신의 앞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향하는 상인과 의자, 성민들의 행렬을 가리켰다. 사내의 입에서 뿌듯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내가 어찌 혼자란 말이오.”
사내는 훌쩍 창고의 앞에서 몸을 날려 그와 함께 움직이는 성민들의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사람들이 손을 들어 진언표를 환영하고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진언표 역시 웃으며 그들과 함께 발을 맞춰 걸어갔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창고의 접장은 자기도 모르게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무창에서 창고를 맡아 평생 일하면서 오늘같이 뼈와 심장이 떨리는 날이 없었다. 내가 진정한 협객을 만났구나.”
사람들은 어느새 물결이 되어 또 다른 장강을 만들며 동으로 동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