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호광 무창(16)
다음 날 아침, 당태세는 일찍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심신은 멀쩡했다. 멀쩡한 것을 넘어서 신경이 모두 곤두설 지경이었다. 지난 밤 늦게까지 무창신룡 진언표와 함께 반주 없이 저녁까지 먹으며 사내를 달래 준 당태세였다.
당태세는 애초에 아룡과 겸상을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미였건만 울적해 보이는 진언표를 그냥 보고 갈 수가 없었다.
맨 처음 그와 부두의 고영약당 잔당을 토벌할 때 언뜻 보인 아들의 환영이 쓸모없는 잔정만을 남겨놓고 사라진 때문이었다.
“애꿎은 일을 시작한 게지.”
당태세는 연신 입술을 차며 풀러놓은 발목의 지지대를 다시 가죽 끈으로 연결하였다. 이제 보행이야 한결 나아진 듯싶었지만 여전히 가죽 끈과 지지대를 풀면 돌아가는 발목과 무릎은 잠이 올 때마다 쑤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장사로 가서 양중일을 만나는 것도 한시가 급한데 여기서 발목을 잡히다니…….”
입으로는 투덜대면서도 당태세는 어제 진언표와 작별하면서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말이 영 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어찌 할 것이냐는 당태세의 말에 진언표는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앞으로는 모든 게 달라질 것입니다.
대체 뭘 어떻게 다르게 하겠다는 말인가. 그럴 자유와 자원이 있단 말인가. 그저 일신의 무용 하나를 믿고 아비에게서 벗어나겠다는 말인가. 하긴 그것도 괜찮겠지.
“네가 없어진다면 그날로 네 아비는 내 손에 죽을게다.”
당태세의 입에 히죽 서늘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때였다. 객잔의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비틀대면서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당태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객잔에 들어온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니, 아룡. 너 어제 객잔에 안 들어온 것이야? 잠은 바깥에서 잔거냐?”
“아,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요. 뜻이 맞는 사람들하고 같이 한 잔 하다 보니 그냥 달이 지고 해가 뜨는데… 하하…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말이죠. 숙부님.”
“엉?”
“그 미친놈이 지금 시장바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니 그냥 말만 할 것 같지는 않고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분위기던데 말이죠. 숙부님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룡이 일컫는 ‘미친놈’이라면 당연히 진언표를 말하는 것일 테고 이른 아침에 시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상인들이지 일반 백성들은 아닐 것이었다.
당태세는 뒷머리가 선득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새벽 댓바람 찬 공기에 오른다리가 저려오자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를 보던 아룡이 입맛을 다셨다.
“숙부님, 지금 가 보실 겁니까? 안 그래도 주무시면 깨워드릴까 말까 했었는데….”
“아룡, 그 이야기를 나에게 알려주려고 한 이유가 뭐냐?”
“그저… 숙부님이 그 놈은 좀 챙기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도 무창에서 인연도 맺고 잔치도 초대받았으니 영 남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태세가 빤히 아룡의 얼굴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괴를 짚고 몸을 움직였다. 아룡 역시 그를 따라 객잔을 다시 나섰다.
새벽 아침의 무거운 공기가 두 사내의 뒤를 따랐다.
부지런히 목괴를 놀리며 부둣가에 접한 시장 쪽으로 방향을 잡자 일단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웅성대는 것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오는데, 가만 보이 모두 상인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당태세가 슬쩍 그들에게 다가가 눈치를 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이보시오. 여기 혹시 진가약실의 소문주가….”
“아, 벌써 소문이 다 퍼졌나보이. 노사도 약재를 대고 있소?”
“아 예? 네! 그게…….”
당태세가 아룡이 뭐라고 답을 하기도 전에 상인이 손가락을 뻗어 시장의 깊숙한 곳을 가리켜보였다. 당태세가 무창에 와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저 안쪽 약시에 진가약실의 약재창고가 있지. 그리 가 보시오. 거기서 일을 벌인다니까.”
“일? 무슨 일?”
아룡이 상인에게 되물었지만 상인은 이미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다른 상인들과 진언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상인들은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하는 중이었다.
“거 대단할세. 범인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일인데 말이야.”
“모자란 것 없는 소문주가 광증(狂症)이 도진 거 아닌가?”
“예이, 이 사람아! 그게 협기(俠氣)지 어째 광증이야!”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를 보던 당태세가 아룡을 급하게 불렀다.
“아룡, 가자! 저 안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아룡도 당태세가 무두리가 아닌 아룡이라 부른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당태세의 말을 듣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두 사내가 시장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급기야는 한 발짝을 떼고 들어가기도 힘들 만큼 어깨와 어깨사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시장상인들을 밀어붙이며 한 발 한 발 지나가는데, 저 앞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같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환호성과 탄식이 같이 흘러나왔다.
당태세가 기를 쓰고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 보니 거대한 창고 앞에 무창신룡 진언표가 서 있고 그 뒤에 진가약실의 사내들이 어쩔 줄 모르면서 진언표의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당장 문을 열어라! 이곳의 약재는 모두 무창 성민의 것이다!”
“소문주!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진가약실의 상품이지 마구 나눠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천하에 물산(物産)을 내려주었고 사람은 그것을 쓰기만 할 뿐이다. 누가 그것에 가치를 매겼는가! 하물며 사람들 사이에 약조로 맺어진 가격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것이 정당하다 하겠느냐!”
진언표는 말을 마치가 모여 있던 사람들을 보며 말하였다.
“무창의 가형들이여, 누이들이여! 진가약실의 진언표가 그간의 과오를 무릅쓰고 내 수치를 공개하오! 그동안 우리는 여기 있는 가형들에게 실제보다 더 많은 이문을 붙여서 약재를 팔아왔소! 고영약당과 싸움이 붙어서 약재를 구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은 거짓이오! 사실은 우리와 고영약당 둘이 작당하고 약재의 값을 올려 받은 것이오!”
순간 모여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로의 얼굴과 진언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진언표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하여 나는 진가약실을 대표하여 오늘 모여 있는 무창의 부형들에게 진가약실의 약재창을 개봉할 것이오! 그동안 우리가 취한 이문이 그릇된 것임을 알고 있으니 지금 이렇게나마 여러분에게 돌려줄 것이오. 아무쪼록 약재상들은 여기서 가져간 약재들을 필요한 이와 의자들에게 공평하고 저렴하게 팔도록 하시오!”
“미쳤구나…….”
당태세의 뒤에 서 있던 아룡이 멍하니 진언표의 표정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한 필의 말이 울음소리를 내려 빼곡히 모여 있는 사람들의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화급하게 양쪽으로 비키며 길을 터주니 말은 쏜살같이 창고 앞으로 들어가는데, 복색을 보아하니 진가약실의 사내였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진언표를 보며 말을 이었다.
“문주님의 전갈입니다! 소문주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당장 본전으로 귀환하라는 명이시오!”
“가지 않겠다 전하라!”
“소문주! 문주님의 엄명이십니다!”
“분명하게 전하거라. 나는 다시는 견정문과 진가약실로 들어가지 않으리라!”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얼굴이 창백해진 진가약실의 사신이 다시 한 번 빠르게 말을 전하였다.
“소문주! 만약 명을 어기고 본문으로 귀환하지 아니할 시에는 절연(絶緣)이라 하셨습니다!”
“절연이라?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하셨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순간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커지며 진언표와 사자에게로 온 시선이 다 쏠렸다. 아룡 역시 입이 바싹 말라붙었는지 연신 혀로 입술을 핥으며 앞을 보고 있었다.
진언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말을 못하고 있었다. 사신의 채근은 점점 심해졌다.
“소문주!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본문으로 돌아가셔서 이 모든 혼란에 대한 사죄를 청하시어….”
“되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너는 빠짐없이 문주께 전하여라.”
“네?”
진언표는 어느새 짚고 있던 곤을 들어 양 어깨 사이에 걸치고 하늘을 쳐다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내의 표정은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 몸 진언표는 부친의 정(精)과 모친의 혈(血)을 받아 이 세상에 왔고, 그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세상에 떳떳하게 장부로 설 수 있었노라. 이제 그가 자라 선과 악을 구분하며 정(正)과 사(邪)를 판단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어찌 부모의 은공이 아니냐.”
진언표는 하늘을 보며 목울대에 핏줄을 세웠다.
“그릇됨을 그릇되다 말하지 못하며 내 안위와 이득을 위해 사사로이 공정함을 팽개친다면 그것이야 말로 불효로다! 나는 그렇게 배우며 살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부모의 욕을 보이지 않겠노라!”
진언표가 사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서 전하라! 소문주 진언표는 이제 없다! 오직 이 앞에 있는 것은 무창신룡 진언표일 뿐이니, 나는 그릇된 진가약실의 전횡과 폭리를 치죄할 것이다! 나는 무창 사람이지 견정문의 사람이 아니다!”
순간 시장에 모여 있던 상인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진언표는 다시 곤을 휘리릭 앞으로 내쥐더니만 창고를 지키고 있던 견정문의 사내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창고의 문을 열어라! 견정문의 소문주가 아닌 무창의 진언표가 명한다! 나와 내 동무들이 흘렸던 피땀을 헛되었다 말하지 말라!”
순간, 진언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창고의 접장이 얼굴이 벌게지더니 이를 악물고 일꾼들을 향해 말하였다.
“무창신룡의 명이시다! 창고 문을 열어라!”
“존명!”
“우리 벗들이 저분과 함께 이곳에서 같이 싸웠다! 창고 문을 열어주어라!”
일꾼들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고의 문을 뜯어내고는 안에 있는 짐들을 재빨리 앞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창고 앞에 서 있던 상인들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에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견정문에서 온 사신은 이제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비틀대며 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룡이 멍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저 놈 미련퉁이네요…….”
당태세 역시 뚫어지라 진언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하기 그지없던 노인의 입술이 씰룩대더니 슬쩍 끝이 위로 올라갔다. 노인이 이를 부드득 갈더니 웃는 잇새로 말이 새어나왔다.
“이도협 이 개 같은 놈. 아무리 봐도 너에게는 과분한 아들이야.”
그때였다. 갑자기 동쪽 항구부터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고함과 욕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급변하는 상황에 무슨 일일지 모두 고개를 죽 빼고 동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단의 사람들이 거칠게 인파를 몰아붙이며 성큼성큼 진가약실의 창고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고영약당 아닌가?”
순간 당태세와 진언표의 표정이 동시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때 징이 깨지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 하나가 좌중을 압도하며 시장골목을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진가약실에 물어봐도 되겠나!”